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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대물>
 SBS 드라마<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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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프의 잡지사 마감이 끝난 휴일. 말 많은 정치드라마 <대물>을 몰아서 봤다. 한국 드라마를 일부러 시간 내서 본 건 꽤 오랜만이다. 시즌제 외국 드라마에 빠진 후 처음이니 족히 5~6년 만인 셈이다.

<대물>을 보게 된 이유는, '정치혐오'란 말이 공공연히 나도는 한국에서 어떻게 정치드라마가 25%의 시청률을 낼 수 있는지 궁금했고, 외압 아니면 내압으로 보이는 작가교체로 정말 드라마가 막장으로 가는지 확인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고작 8회를 보고 결론을 내린다는 것도 우습지만, <대물>은 '포레스트 뽀로롱 언니 정치체험기'의 무려 '실사판'이라는 것이다. 만화나 블랙 코미디였다면 나름 감동적이기도 할 대사들이 실사판 정극에서 쏟아져 나오는데 오그라드는 손발을 어찌하기가 어려웠다. 고현정, 차인표, 임현식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다. 단지 이 대배우들이 '불꽃슛을 날려주겠어'류의 대사를 치는데 어찌 감정이 이입이 될까.

역사에 뛰어든 포레스트 검프, 서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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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은 한국 드라마로는 참신한 형식이지만 영화들에선 다소 익숙한 포맷의 드라마다. <대물>은 대통령의 탄핵, 잠수함 침몰과 외교긴장, 아랍지역에서의 피랍과 그것을 둘러싼 논쟁 등 아직 우리의 기억에 생생한 역사적 사건들을 차용해 드라마에 활용하고 있다. 역사적 논픽션을 극에 끌고 들어와 픽션을 완성시켰던 <포레스트 검프>가 떠오른다. <대물>과 <포레스트 검프>의 차이는 포레스트 검프는 역사의 흐름에 좌우되는 인간인데 반해 서혜림은 역사에 개입해 역사를 바꾸고자 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포레스트 검프는 스쳐 지나가는 역사에 온갖 영향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때문에 역사적 사건의 진실이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사건들이 검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하지만 서혜림은 다르다. 서혜림은 역사에 뛰어들어 역사를 바꾸려고 한다. 그는 옵져버가 아니라 플레이어다. 때문에 <대물>에는 사건에 대한 가치도, 개연성도, 그리고 시청자 대부분이 기억하고 있는 현대의 사건을 가져다 썼기에, 디테일도 중요하다.

그래서 남편의 죽음을 항의하러 간 서혜림이 홀로 비를 맞으며 목소리를 높이는 비장한 장면의 연출을 위해, 현실에서는 단식과 풍찬노숙도 마다치 않는 비정규직들이 고작 비 때문에 자리를 떠나고 항의를 중단한다는 장면에서 고개가 저어진다.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에 계속 '고등어만한 은어'에 집착하는 것은 현실의 소재를 숱하게 가져다 쓴 드라마에 등장한 도덕책 주인공을 보는 것만큼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총알 탄 대물'이었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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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대물>은 여러 이야기의 명장면들을 모아서 만든 패러디 영화와 비슷한 형식을 취한다. 한국 최초의 패러디 영화였던 장진의 <재밌는 영화>, 그리고 저 유명한 레슬리 닐슨의 <총알탄 사나이> 시리즈에서 보았던 익숙한 포맷이다. 물론 대물의 명장면 차용은 코미디적 장치라기보다는 드라마의 갈등과 감동을 높이기 위한 소재로 사용되니 일종의 '오마쥬' 묶음으로 볼 수도 있다. 원작에 대한 존경의 표시는 없지만 말이다.

유세 중 테러를 당해 병원에 누워 있다가 의식을 회복하고 던지는 "유세장은요?"라는 대사는 저 유명한 박근혜의 "대전은요?"라는 명대사를 패러디했다. 비단 정치권 관련 명장명만 패러디 되는 게 아니라 여러 명장면이 패러디 된다. 보궐선거 마지막 유세는 "비를 맞고 기다리는 관객에게 미안해 비를 맞고 공연했더니, 관객들이 모두 우비를 벗고 함께 비를 맞으며 공연을 관람했다"는 신승훈 경험담의 패러디로 보인다.

7회에서의 감동적이라는 TV토론 연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CF 대사 "정치가 썩었다고 고개를 돌리지 마십시오. 낡은 정치를 새로운 정치로 바꾸는 힘은 국민 여러분께 있습니다"와 2003년 어버이날 대통령 편지의 "대통령의 어버이는 국민입니다. 국회의원의 어버이도 국민입니다. (중략) 어버이는 자식을 낳아놓고 나 몰라라 하지 않습니다. 잘하면 칭찬과 격려를 해주고 잘못하면 회초리를 듭니다"의 패러디로 보이는 대사도 나온다. 정당구도와 정치역학에 의한 대통령이 아니라 평범한 서민대통령의 탄생과 탄핵이라는 드라마의 기본 줄기는 굳이 대사와 장면이 아니더라도 노무현의 그림자를 느끼게 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문제는 서로 다른 인물들이 서로 다른 역사적 시점에서 히트를 친 명장면들이 어떻게 서혜림이란 한 명의 캐릭터에 다 녹아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고등어만 한 은어 노래를 부르던 서혜림은 의정 활동을 시작한 후 고향의 환경문제를 잊어버렸고, 애 엄마의 안타까운 사연에 동분서주하는 서혜림은 남편이 죽을 때부터 국회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던 비정규직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다.

명장면 명대사인데, 그것들이 모여 서혜림을 만들지 못하고 그저 좋은 장면 좋은 대사로 끝난다. 서혜림은 소외받는 누구에게나 눈길을 주는 사람도 아니고, 환경을 중요한 가치로 삼고 의정활동을 하는 정치인도 아니다.

시종일관 아부와 편법으로 일관하는 오재봉 의원, 권력에 몸을 숙이면서 아들의 일신을 최우선에 놓는 하봉도, 하다못해 남자주인공과 개그캐릭터 사이를 오가는 하도야에게도 캐릭터가 느껴지는데, 서혜림에게서는 캐릭터를 느낄 수 없는 이유다.

이미 3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자랑하는 대박드라마에 이런 말을 하기도 뭐하지만, 이런 명장면들을 차용한 <대물>이 블랙코미디 패러디물이었다면 수많은 오타쿠를 양산하지 않았을까?

남송지역에 출마한 서혜림이 테러를 당해 유명해진 후 "대전은요"를 던지며 선거의 여왕이 됐다면, 상대후보 선거운동을 했던 레인보우의 배꼽춤을 문제 삼아 방송에서 퇴출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면, 하봉도가 중국산 소고기를 써서 만든 '대령숙주 곰탕'이 홈쇼핑에서 대박을 치고, 아내사건에 압력을 넣은 혐의로 청문회에 선 오재봉이 '가족을 사랑해서 그랬다'며 알 수 없는 눈물을 쏟는다면, 이런 정치드라마라면 훨씬 감정이입이 쉽지 않았을까? 시청자들에게 현실감 있는 정치의식을 심어주지 않았을까?

서혜림 같은 정치인은 없다... <대물>과 같은 정치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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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매니악한 장르의 드라마였다면 <대물>이 30%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100억대의 광고를 완판 하는 일도, 모처럼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일도 없었을 거다. 느닷없는 명대사가 손발을 오글거리게 하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가족이 모여앉아 볼만한 재미있는 드라마 아닌가.

정치권에 대한 영향이나 그로 인한 외압설도,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과한 감정이입으로 보인다. 작가가 교체된 4화 이전과 이후의 차이는 정치를 시작하기 전의 서혜림과 그 이후의 서혜림의 차이에서 오는 걸로 봐야지 않을까?

이런저런 현실정치의 이야기를 끌어다 쓰는데 누구의 이야기라고 친정부 혹은 반정부로 보는 것도 무리고, 극을 통틀어서 가장 애매한 캐릭터인 서혜림의 캐릭터가 4화 이전과 이후를 기준으로 달라졌다 한들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기 때문이다.

SBS 드라마<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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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은 현실정치의 이미지를 잔뜩 끌어다 만든 정치드라마다. 좋은 이미지, 나쁜 이미지를 모두 끌어다 썼기 때문에 이 드라마가 어느 당 누구에게 득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항간에 서혜림을 박근혜와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유추가능한 정치인 중 박근혜는 서혜림과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다. 자기 할 말은 못 참는 서혜림과 말 한마디도 쉽게 꺼내지 않는 박근혜는 정반대 캐릭터다. 이정희, 한명숙 혹은 노무현 등의 캐릭터와도 쉽게 겹쳐지기 어렵다. 서혜림은 그만큼 현실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캐릭터기 때문이다.

서혜림과 닮은 캐릭터는 없지만, <대물>과 닮아 있는 캐릭터는 있다. 현실정치의 좋은 이미지만 같다가 조합해놓은 서혜림이라는 캐릭터로 만들어진 게 <대물>이라면 이미지들을 활용해 정치하는 정치인들은 모두 <대물>과 닮았다. 어머니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기존의 이미지가 나빠질까 봐 쉬 입을 안 여는 한 여성정치인도, 경제이미지만 앞세우고 다른 문제는 회피하는 정치인도, 그리고 오늘도 시장에서 할머니를 껴안으며 명장면을 연출하는 정치인들도 <대물>과 똑 닮아있다.

드라마는 현실감이 없어도 재미와 감동을 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대물>의 시청률이 30%에 이르는 것은 아무런 불만이 없다. 하지만 이미지로 먹고사는 정치인들이 현실감도 없이 30%대의 지지율을 얻는 것은 걱정이다. 모처럼 드라마가 불러일으킨 정치에 대한 관심이 극적인 이미지와 현실의 정치를 구분하는 시야도 높여주길 바랄 뿐이다.


태그:#대물, #고현정, #노무현,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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