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쟁이는 '행동과 말'이 다르거나 '앞말과 뒷말'이 다른 사람이다. 거짓말쟁이가 끼치는 가장 큰 해악(최악)은 거짓이 참을 대신하게 한다는 것이고, 차악은 참과 거짓을 헷갈리게 한다는 것이다. 늑대에게 봉변을 당했던 양치기 소년을 떠올리면 되겠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최악'이라는 사람도 있고 '차악'이라는 사람도 있다. 간혹 '최선'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차선'이었다는 사람까지 있다. '선-악'논쟁에서는 '악'을 꼽는 사람이 압도적이지만, '최-차'논쟁에서는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워 논쟁이 진행 중이고, 그 판가름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그러나 '선-악'과 '최-차'논쟁을 떠나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민족개조론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상이며, 이광수는 그것을 대필해 국내에 소개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광수 스스로 서문에서 "민족 개조의 사상과 계획은 재외동포 중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 나는 조선 내에서 이 사상을 처음 전하게 된 것을 무상한 영광"으로 안다고 썼다. 이광수가 말한 "재외동포"와 "위대한 두뇌"가 도산임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따라서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쓴 것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대화>로 정리하고, 요한과 베드로가 예수의 복음을 <요한복음>과 <베드로전,후서>로 기록하고, 증삼과 다른 제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을 <논어>로 편집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비슷한 것은 겉모습뿐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후에도 그를 배신한 적이 없다. 요한과 베드로는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뒤에도 복음을 지키고 전파하다가 유배 갔고 순교했다. 공자의 제자들도 천하주유 시절은 물론 공자의 사후에도 스승을 욕되게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광수는 도산이 세상을 뜨기도 전에 변절해 친일부역에 나섰다.
도산의 이광수는 소크라테스의 플라톤이 아니라 메레토스이고, 공자의 자로가 아니라 염구이며, 예수의 베드로가 아니라 가룟유다였던 셈이다. 메레토스는 소크라테스 사후 뒤늦게 후회한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처형됐다. 염구는 스승의 가르침에 배치되는 정치를 펴다가 파문당했다. 가룟유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했다.
그러나 이광수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도 않았고 문단에서 파문당하지도 않았고, 반민족행위자특별법으로 처형되지도 않았다. 조선 여성의 연인이던 문인이자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였던 이광수는 천황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대동아 공영권의 기수 노릇을 하다가 공산주의 치하에서 병으로 죽었다.
가룟유다가 쓴 예수의 복음서가 발견됐다고 가정해 보자. 반응들이 어떨까? 1945년 <도마복음서>가 발견됐는데, 맨 앞에 예수의 제자 "디두모 유다 도마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고 모두 114개의 구절 중 약 40개 이상이 다른 복음서와 겹치는 내용이다. 그래도 성경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하물며 배신자 가룟유다의 복음서가 예수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지겠는가? 그런데도 <민족개조론>은 도산의 사상이라며 읽히고 있다. 왜일까? 불행히도 이광수의 책 말고는 이렇다 할 체계적인 도산의 개조 사상 소개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행이다.
<민족개조론>에 도산의 목소리가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도산의 진짜 모습이고 얼마만큼이 이광수의 개악인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이광수의 변절은 <민족개조론> 출판되기 전에 시작됐다는 게 정설이고 보면 이광수의 도산 개악은 매우 교묘하면서도 근본적인 것이기 쉬울 것이다.
<민족개조론>을 다 읽고 나니 도산 대 이광수의 비율이 90 대 10쯤 되는 것 같다. 자의적인 숫자지만 이를테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10퍼센트가 문제다. 10퍼센트만 가지고도 이광수는 도산을 완전히 엉뚱한 사상가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만큼 글재주가 좋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도산과 뒤틀린 민족개조론을 바로잡으려면 이광수의 10퍼센트를 찾아내야 한다. '도산에게 배운 이광수'에서 '도산을 빙자한 이광수'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쉬운 작업은 아니다. 그런 뒤섞임은 아주 교묘해서 눈치 채기조차 어렵다. <민족개조론>의 서문 격인 '변언(弁言)'에서부터 그런 교묘한 물타기의 예를 찾을 수 있다.
"변언(弁言): ....이 글의 내용인 민족개조의 사상과 계획은 재외동포 중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내 것과 일치하여 마침내 내 일생의 목적을 이루게 된 것이외다. 나는 조선 내에서 이 사상을 처음 전하게 된 것을 무상한 영광으로 알며, 이 귀한 사상을 선각한 위대한 두뇌와 공명한 여러 선배 동지에게 이 기회에 또 한 번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신유 십일월 십일일 태평양회의가 열리는 날에 춘원."이 서문에 따르면 민족개조의 사상과 계획은 재외동포(도산)의 것이며, 이광수는 예의 바르게도 "이 귀한 사상을 선각한 위대한 두뇌"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리고 있다. 자신은 "조선 내에서 이 사상을 처음 전하게 된 것"만으로도 무상한 영광으로 여긴다고까지 했다. 거기까지는 아주 좋았다.
문제는 이광수가 이 서문에 도산의 사상이 "내 것과 일치"한다는 구절을 끼워 넣었다는 점이다. 교묘한 물타기이다. 대개는 눈치조차 채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자주 고백했듯이 이광수가 도산을 스승으로 알고 그의 가르침과 인격에 진정으로 감격한 사람이라면 "내 것과 일치하여" 대신에 "나는 깊은 감화를 받아"라고 썼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는 그렇게 했다. 그의 글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투성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과 공자의 제자 증삼도 그랬다. 한 줄이 멀다하고 "소크라테스가 묻기를..." 혹은 "공자께서 가라사대..."가 나온다. 이 제자들은 스승을 드러내고 자신을 감추었다. 그게 스승의 가르침을 전하는 제자의 바른 태도다.
그러나 이광수는 다르다. 믿거나 말거나, 자기도 스승과 똑같은 생각을 이미 따로 했다는 것이다. 표절 시비에 휘말린 대중가수들이 "우연히 같게 됐다"고 우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도산의 말임에 분명한 것도 이광수는 자기 말인 것처럼 1인칭으로 썼다. 그것이 바로 "내 것과 일치"한다는 서문의 한 구절의 효과다. 이 교묘한 구절로 <민족개조론>의 저작권은 이광수의 것이 되고, '민족개조론'이라는 사상의 주인이 도산인지 이광수인지 모호해져 버린 것이다.
"내 것과 일치"했다는 이광수의 말이 사실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 서문을 썼던 신유(1921)년에 이광수는 29세였는데 그때까지 '참과 힘,' 혹은 무실역행이나 사람과 사회의 개조를 위한 동맹 수련에 대한 다른 글을 써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교육이 중요하다'는 정도의 소설 <무정(1917)>을 써서 유명해졌을 뿐이다.
한편 당시 43세였던 도산은 이미 '사람의 개조 능력'과 '무실역행'과 '정의돈수'에 대해 무수히 연설했고 이를 실천하는 동맹수련 단체로 청년학우회(1909)와 흥사단(1913)을 조직한 바 있다. 이광수가 흥사단 약법을 외고 길고 까다로운 입단 문답을 거쳐서 흥사단에 가입한 것은 <민족개조론> 서문을 쓰기 1년 전인 1920년 5월이다. 이광수가 도산과 같은 사상을 갖게 됐다면 그것은 도산과 흥사단에서 배웠기 때문이지 우연의 일치일 수 없다는 말이다.
혹시 이광수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느라고 일부러 도산의 이름을 감춘 것일까? 그것도 아니다. 1922년 당시는 도산의 이름이 국내에 오르내리는 것이 금지되지 않았다. 설사 그렇다 한들 총독부를 위해 일하기 시작한 이광수로서는 뭐가 문제겠는가. 도산 포섭에 나선 총독부는 이광수와 도산의 관계를 모르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광수의 도산 물타기를 반기며 은근히 사주하고 있던 터였다. 이광수가 1922년 도산의 지시로 흥사단의 국내 지부 격인 '수양동맹회'를 결성할 때도 그 단체 약법을 총독부에 신고하고 허가받아 진행했다.
'이광수가 도산의 대필자'라는 주장에 생소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국무와 잡무, 흥사단 업무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운데 이광수의 글재주를 아꼈던 도산은 자주 그에게 문건이나 서류, 편지를 대필시키곤 했었다.
<민족개조론>은 아마도 이광수가 상해에 도착한 1919년 3월에서 귀국한 1921년 3월 사이에 도산의 구술을 받아쓰는 형식으로 초안이 잡혔을 것이다. 도산의 꼼꼼한 성격을 생각하면 이광수가 입단 문답을 마친 1920년 5월 이후에 자신의 개조 사상을 대필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이광수는 초안을 가지고 귀국한 후 몇 달간 수정과 보완을 거쳐 1921년 11월에는 서문을 썼고 1922년 초에는 <개벽>에 발표했을 것이다.
이광수가 도산의 생각을 받아써서 발표한 것은 <민족개조론>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다. 1919년 4월 이광수는 상해에서 도산이 구술한 1백20쪽에 달하는 '조선 독립 방략'을 받아써서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제출한 바 있다. 1924년에도 이광수는 베이징에서 도산을 만나 그의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받아써서 1925년 동아일보에 일부를, 그리고 1926년에 <동광>에 전부를 발표했었다. 이때의 저자는 '도산'이거나 도산의 별명이었던 '섬뫼'나 '산옹'이었다. 도산의 구술을 받아쓰고서 이광수가 자기 이름을 붙인 것은 <민족개조론> 뿐이다.
만약 이광수가 도산 사상을 사심 없이, 그리고 가감 없이 <민족개조론>에 담았다면 "내 것과 일치" 운운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설사 불가피 그렇게 했더라도 해방이 되고 시절이 바뀌었으면 '개정판 서문'이라도 써서 전말을 바로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광수는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은 '민족개조론'이 이광수의 것인 줄 알고 있다. 도산을 두 번 죽인 처사다.
이광수는 같은 서문에서 민족개조 사상을 "내 일생의 목적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이광수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지 정확히 20년 후인 1941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은 "반도 민중의 애국운동"이라는 글의 일부를 보자.
"이 생활의 혁신은 생활의 황민화, 생활의 합리화, 그리고 생활의 임전화(臨戰化)의 3대 강령에 의하여서 하여야 할 것이다. 생활의 황민화라는 것은 사상, 감정, 풍습, 습관 중에 비일본적인 것을 제거하고 일본적인 것을 대입 순화하는 것이다. 예하면 혼상의례의 일본화, 가족·친척 관념의 일본화, 경신숭조(敬神崇祖) 천황 중심의 생활의 신건설이다." (<매일신보}, 1941. 9. 3)
이것이 도산의 사상과 일치할 뿐 아니라 "일생의 목적"이라던 자신의 '민족개조론'의 목적이요 방법론이었다는 말인가? 반면에 이광수가 "내 것과 일치"한다던 도산의 민족개조론이 그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보자. 도산이 상해에서 체포되어 인천을 통해 서울로 압송된 후 40일간의 모진 취조를 마친 후 일본인 검사가 물었다. "당신은 이래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 다음은 모든 도산 전기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도산의 대답이다.
"나는 먹어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잤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임중빈, <도산 안창호: 그 생애와 정신>, 301쪽; 주요한, <도산 안창호전>, 312쪽; 흥사단, <도산 안창호>, 106쪽; 장이욱, <도산 안창호>, 384쪽).
거짓말쟁이는 "앞말과 뒷말," 혹은 "행동과 말"이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거짓말쟁이의 '최악'은 남이 믿어주지 않는 것이요, '차악'은 참인지 거짓인지 헷갈리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어째서 일부 사람들이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보고 '차악'이니 '차선'이니 하는지 모르겠다. 서문만 읽어도 그냥 '최악'이던데.... (평미레, 201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