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맑은 영혼과 불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이 세상에서 잠시 바람처럼 머물고 간 사람"
지난 2002년 안면도 국제꽃박람회 당시 태안군 고남면 누동4리에 조성된 항아리 공원내에 세워져 있는 박주훈 추모비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박주훈(2003년 사망, 당시 36세)씨는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 백지화를 이끌어 낸 당시 고남면핵폐기물처분장설치반대투쟁위원회 최규만 위원장과 함께 5·16 현대장 사건을 일으키며 항쟁을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이다.
1990년 11·8 안면도항쟁 이후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을 포기한 듯 보였던 정부가 또 다시 1991년 12월 서울대 연구 용역 결과에 다시 충남 태안을 협의대상 지역으로 포함시키면서 다시 문제가 불거졌고, 1992년 5월 16일 밤 핵폐기장 유치와 관련해 비밀리에 작업하던 핵폐기장 유치 관련 서류를 현대장을 기습해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이렇듯 정부로부터 "안면도는 원자력위원회 제227차 회의에서 철회한 지역이므로 주민 90%이상 찬성하지 않으면 핵폐기물처분장을 설치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이끌어 낸 결정적인 사건인 5·16 현대장 사건의 주역이 바로 박주훈씨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주훈씨는 구속이 되었고, 총지휘를 맡았던 최규만씨는 불구속 기소되는 시련을 맞게 되지만 이 두 핵심세력에 의해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은 완전히 정부의 계획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박주훈씨는 그의 몸을 던져 지켜낸 안면도를 떠나 1996년부터 서울시 산악연맹 산하 청화산악회에 입회한 후 1999년 7월에는 산악조난구조대에 입대, 대원으로 활동하면서 수차례에 걸쳐 고귀한 생명을 구해냈지만, 2003년 10월 5일 히말라야 로체샤르 등정 도중 정상 등정을 불과 150미터 앞둔 지점에서 실족한 후배 동료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자신은 지키지 못한 채 실종돼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이 되었다.
박주훈씨의 안타까운 죽음이 알려지자 최규만 회장을 비롯한 고남면 주민들은 정성을 모아 고남면 누동4리 항아리 공원내에 그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추모하는 추모비를 세워 후세에 전하고 있다.
특히, 그의 추모비는 안면도항쟁 13주기를 맞았던 2003년 11월 8일 '세계 최고봉 등정 박주훈을 가슴에 묻은 모든 이들' 명의로 공원 한 켠에 자리잡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안면도를 지켜낸 항쟁의 주역으로 안면도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최규만 기념사업회장은 박주훈씨의 사망 소식을 접했던 당시를 회상하며 "안면도를 지켜낸 항쟁의 주역으로서 (고남)면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숭고한 뜻을 이어받자는 의미에서 추모비를 건립하게 됐다"고 건립취지를 밝히며 안타까워 했다.
"버스조차 다니지 않던 시절 집에서 십여리 길을 달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을 만큼 강골이었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상이 청송녹죽처럼 푸르고 강직했고, 심지는 그의 고향 장곡리 앞바다만큼이나 넓고 깊었다.
1990년 11월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휴식과 평화의 땅 이곳 안면도에 핵폐기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고 직장마저 미련없이 내팽개친 채 곧바로 귀향하여 핵폐기장 설치 반대투쟁의 선봉에 섰던 그는, 1993년 3월 정부가 설치 백지화를 발표하기까지 구속과 옥고를 감수하면서 핵폐기장 설치 핵폐기장 설치 음모를 온몸으로 막아 고장을 지켜낸 반핵운동가이자 애향의 등불로 많은 사람들이 가슴속에 남아있다."
이렇듯 그의 추모비에는 그를 그리워하는 주민들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
한편, 박주훈씨가 실종되기 전 소속되어 있던 '청화산악회'는 박씨의 실종 이후 매년 음력 9월 9일에 고향인 고남면에 마련된 고인의 묘소에서 추모제를 지내며 고인의 넋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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