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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지리산 섬진강변 농가에 보금자리를 튼 지 4개월째다. 행여 견딜 만하지 못해서 늦깎이로 지리산 행려 생활에 접어들었을까? 내가 굳이 지리산으로 오게 된 사연을 대라면 지리산 시인의 시 한 구절로 대신하고 싶다.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첫 마음이니/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 이원규, 행여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중에서

 

구차한 이유는 댈 필요가 없다. 시인의 노래처럼 "행여 견딜 만하지 못해서" 지리산 언저리 빈 집을 찾아 그냥 온 것이다. 지리산 시인 이원규. 그는 온 몸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는 깬 사람이다. 그는 10년 서울생활을 접고 훌쩍 떠났다고 한다. 나는 40년 만에 서울을 떠났는데 말이다. 서울을 떠난 그는 낙동강 1300리, 지리산 850리 길을 걸었다고 한다. 중고 오토바이 한 대와 노트북 1대가 그의 전 재산이라고 한다.

 

나는 이원규 시인의 이야길 하자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의 은총이 가득 내린 지리산 찬가를 부르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짧은 기간이지만 지리산 자락에 살면서 바라본 지리산은 아침저녁으로 변하면서도 시인의 노래처럼 언제나 첫 마음 그대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 지리산은 깊고 단단한 땅이다. 태극마크 그리며 섬섬옥수 섬진강이 휘돌아 쳐 흐르는 곳, 지리산!

 

지난 여름을 지내는 동안 폭풍과 사나운 비바람도 견뎌내고, 지리산은 기쁨 가득한 위대한 고행자처럼 어머니의 자세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섬진강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에 가려 모습을 감추기도 하고, 신비로운 운무에 싸여 히말라야 설산처럼 보이기도 하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지리산은 지혜가 충만한 산이다.

 

그런 지리산에 어제는 첫 눈이 내렸다. 그리고 지리산 첫눈은 함양 쪽 해발 1100m 능선에서 난 원인모를 산불을 진화 시켰다. 헬기와 119대원 몇 백 명이 출동해도 끄지 못하는 불을 자연이 내린 눈으로 간단히 꺼버린 것이다. 지리산은 그런 산이다. 자연의 신이 불을 끄는 산, 지리산!

 

 

첫 눈 소식을 접하고 나는 지리산에 오르고 싶어 좀이 쑤셨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부터 서울에서 아이들이 모처럼 내려와 그들과 함께 지내느라고 오르지 못했다. 우리들의 결혼 37주년 기념을 축하해 준다고 아이들이 내려왔지만, 그 실은 지리산 단풍을 구경하러 온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마지막 타오르는 단풍을 구경하면서도 내 마음은 지리산 봉우리에 가 있었다. 노고단 봉우리에는 백설이 눈부시게 드리워져 있었다. 산허리까지는 오색 단풍이 불타고 있는데, 산봉우리는 신비로운 백설로 덮여 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아이들도 아내도 구례구역에서 아침 7시 31분 첫 무궁화호를 타고 모두 서울로 가버렸다. 아이들은 제 할 일이 바빠서, 아내는 병원외래 진찰 때문에. 오호라, 홀로 남은 나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구례구역에 데려다 주고 그 길로 곧 바로 지리산 성삼재로 차를 몰았다. 이른 아침인지라 천은사 입구에는 매표원도 없었다. 창문을 여니 낙엽의 독특한 냄새가 가슴을 파고든다.

 

단풍으로 붉게 타오르는 상선암 중턱을 지나 시암재에 가까이 다가서니 하얀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금년 들어 보는 첫 눈이다. 국립공원 직원들이 제설 작업을 하며 염화칼슘을 뿌리고 있다. 아침 일찍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들이 고맙기 그지없다. 그늘진 곳에서 묵묵히 일을 하는 저런 분들 덕분에 세상은 또 아름다운 것이다.

 

응달진 도로는 드문드문 얼어 있다. 조심하자! 1단 기어를 넣고 자동차를 천천히 몰며 성삼재로 향했다. 성삼재. 해발 1100m. 마한의 어느 왕이 성이 다른 세명의 장수를 파견해 지키게 했다는 곳. 달궁 둘레에는 정령치, 황령치, 팔랑치라는 성삼재가 둘러싸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차 밖으로 나오니 북풍이 세차게 몰아친다. 노고단을 바라보니 푸른 하늘 아래 한 조각 먹구름이 할머니의 모습으로 누워 있다. 저절로 존경스런 마음이 나온다. 노고단을 향하여 합장을 하고 등산화 끈을 조여 맸다. 산을 존경하고 자연을 소중히 가꾸어 나가야 한다. 자연을 훼손하고 산을 무시하면 화를 입게 마련이다. 더구나 노고단(老姑檀)은 지리산의 신령인 '산신할머니(노고-老姑)'를 '모신 곳(단-檀)'이 아닌가!

 

뒤를 돌아보니 만복대에 흰 눈이 하얗게 덮여 있다. 안내센터를 지나 노고단으로 가는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족히 10cm를 넘을 듯한 흰 눈 위에 발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어린애처럼 흰 눈 위에 발도장을 찍어본다. 자연의 신이 내린 이 눈이 아니었더라면 어제 지리산이 홀랑 타버렸을지도 모른다. 산불은 이미 1만㎡를 태워 버리지 않았는가. 오, 흰 눈아! 고맙다! 그대 덕분에 지리산이 온전히 남아있다!

 

이른 아침인지라 등산로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오직 흰 눈과 옷을 훌훌 벗어버린 나무들뿐이다. 나무들은 솔직하다. 옷을 벗을 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시원하게 벗어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눈 속에서 추운 겨울을 견뎌낸다. 낙엽은 눈 속에서 떨며 나무에게 양분을 보내주고 있다. 나무는 자기가 벗은 옷의 일부를 자양분으로 삼는 것이다.

 

고개를 드니 노고단엔 산신할머니 구름은 어디론가 간데없고 시커먼 먹구름이 덮여 있다. 파란 하늘은 사라지고 금세 구름바다가 출렁거리고 있다. 금방 눈발이라도 내릴 기세다.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했던가? 산을 찾는 사람이 무슨 얼어 죽을 흑심을 품겠는가? 노고단은 이미 눈바다를 이루고 있다. 고마운 눈아, 내리려면 내려라!

 

노고단으로 가는 해발 1255m 삼거리에서 '무넹기' 고개로 방향을 틀었다. 무넹기 고개는 1930년 전북으로 내려가는 물줄기 일부를 화엄사 계곡으로 돌려 물이 부족한 구례 일원에 풍년 농사를 짓게한 곳이다. '물을 넘긴다'는 뜻에서 '무넹기'라고 불리고 있다.

 

하얀 눈 길 옆에 선 나무들이 점점 은발로 변해간다. 상고대다! 상고대는 기온이 0˚C 이하로 내려갈 때 대기 중의 수증기가 승화되어 나무나 풀에 붙은 나무서리다. 아마 눈비가 오다가 기온이 내려가자 상고대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니 체감온도는 가중된다. 바람이 초속 1m일 때 기온은 2˚C 차이가 난다고 한다. 아마 초속 10m는 될 듯싶다. 다행히 오늘(11월10일)부터 날씨가 풀려 산 아래는 영상의 기온이지만 이곳은 영하의 날씨다. 무넹기 고개에서 내려다보이는 화엄사 계곡은 여전히 붉은 단풍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멀리 섬진강이 'S'자로 아득하게 보인다.

 

다시 노고단을 향하여 길을 간다. 이제 노고단은 성난 구름바다에 휘말려 앞이 컴컴하다. 바람의 신이 성이 난 모양이다. 바람 때문에 앞으로 한 발도 나갈 수가 없다. 참다 못해 고개를 돌려 종석대(1356m)를 바라보니 봉우리는 구름에 덮여있고, 능선은 노인의 은발 노인의 머리처럼 희끗희끗 상고대가 피어 있다.

 

 

그래도 가야한다. 기를 쓰고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옮기며 눈길을 걸어간다. 그러다가 바람 때문에 다시 고개를 돌리니, 오! 나뭇가지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상고대여! 사슴뿔처럼 파란 하늘에 상고대가 찬란하게 피어 있다! 나는 잠시 넋을 잃고 나뭇가지에 피어있는 상고대를 바라보았다.(계속)

 

(2010. 11. 10  지리산 노고단에서)


태그:#지리산 상고대, #성삼재, #노고단, #구례, #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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