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선생이 쓴 신간 <허수아비춤>(문학의 문학 펴냄)이 출간되었습니다. 대학시절 <태백산맥>을 처음 읽으며 받은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태백산맥>을 읽은 후 지리산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산으로 기억되었고, 마지막 10권을 손에 들었을 때는 책을 다 읽어 버리는 것이 아까워 여러 날 아껴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시민운동을 함께 하는 동료들과 중국의 독립운동 유적지와 백두산을 거쳐 러시아를 여행할 때는 <아리랑> 전편을 읽었습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역사와 아직도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는 동포들의 삶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조정래 선생이 쓴 <아리랑>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리랑은 북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여행하는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여행 안내서'의 역할을 해주었지요. 아리랑은 모두 12권이나 되는 장편인데, 4명이 각 3권씩을 준비해서 여행하는 동안 나누어 읽고, 연해주에 있는 재외동포들이 모이는 '도서관'에 기증하였습니다.
<허수아비춤>은 조정래 선생이 3년 만에 발표한 신작입니다. 10여 년 전 발표한 <한강>을 읽어보지 않았는데, <허수아비춤>은 <한강> 이후 10년간 품어온 경제민주화의 청사진을 제시한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허수아비춤>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면서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사회의, 우리의 자화상을 똑바로 한 번 보자고 합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 모습이 추하든 아름답든 그건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 자화상을 똑바로 보길 게을리 할수록, 회피할수록 우리의 비극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는 이 시점에서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선진국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설 한 권으로 경제민주화를 이뤄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경제민주화가 평화와 통일을 향한 길로도 이어져 있다는 생각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정치적 민주화를 완성하려면, 경제 민주화 이루어야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동안 부자들의 부도덕한 비리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겠지만, '경제민주화'에 대한 희망마저 내려놓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소설 <허수아비춤>은 일류를 다투는 재벌 기업 '일광'이 세상관리 조직을 만들고,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만들고 편법, 불법 상속을 처리하는 과정을 실감나게 펼쳐 보이는 소설입니다. 일광그룹 남회장이 소유한 돈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치는 주인공 강기준과 박재우, 윤실장은 모두 돈을 하느님처럼 떠받드는 자들 입니다.
"돈은 살아있는 신이다, 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전지전능한 힘이 여기 어디든 안 통하는 곳이 없다 그거 아니가?"
"그렇습니다. 그 어떤 조직, 그 누구한테든 통하고, 먹히고, 효과가 납니다. 그건 돈이 생겨난 이후 동서양을 막론하고 돈이 인간을 지배해 온 인간의 역사를 다시 확인시켜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돈 만큼 정직한 것도 없습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돈이라는 것이지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는데, 그들은 권력은 금고에서 나온다고 굳게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 세 사람이 일광그룹 남회장을 위하여 첫 번째로 만드는 '세상관리' 조직 작업은 바로 대학에 건물을 지어주는 일입니다. 대학에 기부하는 것을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남 회장에게 세상물정을 이렇게 알려줍니다.
대학을 관리하기 위하여 돈을 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학 캠퍼스마다 건물을 지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30억짜리 건물 하나만 지어주면 대학교수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해 주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그리고 더 확실하게 기업의 이미지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대학, 연구비 지원보다 건물 하나씩 지어주는 것이 확실
재벌 기업의 이름이 붙은 건물을 지어주고 이미지를 개선하고 사회 환원을 명분으로 세금감면도 받을 수 있으니 조금도 손해나는 장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답답한 것은 이것도 모자라 현실에는 재벌기업이 사립대학을 소유하여 소설보다 더 기막힌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지요.
뼛속까지 돈독이 오른 부자들은 재벌의 부도덕을 비판하고, 사회 환원과 사회적 책임과 같은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허수아비춤>의 일광그룹 남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운동선수가 신기록을 많이 세우면 박수를 쳐대고 상을 주고 하면서 왜 사업가가 돈을 많이 벌면 그렇게 생트집을 잡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그건 적을 많이 무찔러 대승을 거둔 장군을 보고 흉악한 살인자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운동선수의 신기록과 다르게 사업가가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것은 결국 누군가에게 돌아갈 몫을 차지한 결과라는 것을 조금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많이 벌어도 세금은 적게 낼수록 좋다는 생각과도 다르지 않지요.
히틀러의 광기에 빠져있을 때 독일 사람들은 그를 대승을 거둔 '총통'이라고 추앙하였지만, 광기에서 벗어났을 때는 그와 그의 장군들이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흉악한 살인자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아무튼, 소설은 부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이치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사회 환원이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대신에 '세상관리'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정보기관의 고위직 공무원, 출세욕에 불타는 검사에서부터 권력의 요직에 있는 중하위직 공무원 그리고 언론, 방송사의 기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으로 재벌 기업의 이런 '세상관리'가 더 이상 비밀스러운 일도 아닌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쩌다 무슨 일이 생길 때 잘 봐 달라고 뇌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세상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지요.
뇌물 주는 자가 느끼는 야릇한 쾌감과 지배감
그래서 소설 <허수아비춤>을 보고 있으면 여러 재벌그룹과 재벌그룹의 총수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설의 탁월함은 이미 백일하에 드러난 재벌그룹의 '세상관리'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꾸미고 진행하는 자들(허수아비)이 가진 '생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각 기관의 최고위층을 알현하면서 스스로의 위세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건 받는 자가 느끼는 황홀한 존재감과는 또 다른, 주는 자가 느끼는 야릇한 쾌감이고 지배감이었다. 주는 자가 느끼는 감정은 겉으로 굽실굽실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그들은 겉으로 굽실거리는 것만큼 속으로는 상대방을 휘어잡거나 손아귀에 넣었다고 자족감에 흡족해 하고 있었다."
그들은 돈을 이용해 권력을 누리고, 돈을 이용해 권력을 지배하는 지배감을 만끽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특별히 남성이라는 동물들이 이런 지배감의 황홀한 맛에 빠지면 해어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누릴 수 없는 '극치감'을 경험한다는 것이지요.
<허수아비춤>의 주인공들은 바로 이런 일을 꾸미고 실행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허수아비들이지요. 1조 원의 비자금을 만들고 2천 명의 '세상관리' 조직을 구성한 대가로 그들은 각각 50억, 40억, 30억을 스톡옵션으로 받아 '골든패밀리'의 삶을 실현해갑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동안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를 눈여겨 보아온 독자들에게는 <허수아비춤>이 다루고 있는 황당하고 기막힌 이야기들이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재벌들을 더 부자로 만들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정권이 저지르는 만행과 겹쳐보면 소설보다 현실이 더 암담한 것 같기도 합니다.
작가는 소설보다 암담한 현실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 88만원 세대들에게, 386, 486세대들에게 작가는 그래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가난한 난치병환자를 돕자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전화 한 통화에 천 원이나 2천 원이 모아지는 ARS 모금으로 매 회마다 1억 원을 훌쩍 넘어 2억에 이른다. 그런데 그 여러 모금의 중심 세력은 부자들이 아니라 일반 서민인 것이다."
"우리와 비슷한 인구를 가진 프랑스나 독일 같은 나라에는 5만여 개에 이르는 시민단체들이 활약하고 있다. 그 많은 시민단체들은 국민들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는 모든 권력 기관들을 이중, 삼중으로 감시하고 감독한다."
시민단체, 경제민주화를 이루는 디딤돌 될 수 있을까?
작가는 현재 2만 여개의 시민단체를 5만 여개로 늘여나가고 국민들이 낸 회비로 꾸려가는 시민단체가 활약하면서 민주주의의 숲을 이루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민단체들의 활성화만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열리는 유일한 길이요. 희망이다."
참으로 무거운 이야기입니다. 시민단체의 언저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내가 하는 일이 이 난공불락의 자본주의를 바꿀 수 있을까하는 확신에서 멀어질 때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작 안타까운 것은 작가가 보여주는 '희망의 숲'을 가꾸는 일이 답답할 만큼 더디고 느리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추는 춤이 고작해야 '허수아비춤'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약자들의 고단한 삶은 여전히 힘겹습니다. 희망은 왜 이리 느리게 다가오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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