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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이번 주에 가족이 올라 온대요. 청소 해야 돼요. 일단 자본론부터…."

책상에 쌓인 서적들 책상위에 쌓인 문제의 서적들. 미리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쌓여있었다. 새삼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순간이다.
▲ 책상에 쌓인 서적들 책상위에 쌓인 문제의 서적들. 미리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쌓여있었다. 새삼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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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뿐만이 아니다. 공산주의 선언에서부터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까지. <삼성을 생각한다> 정도는 최근 이슈가 된 책이니 괜찮다. 다른 자취생들은 가족이 올라오면, 청소를 하거나, 부모님 몰래 동거하는 커플은 이성의 짐을 치우는 일부터 하겠지만, 우리는 일단 '자본론'부터 치운다.

남자 셋, 진보적 생각을 하고 함께 사는 고려대 앞 자취방은 집주인(물론 자취생)의 가족들이 올라온다는 이야기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 나와 나머지 한명은, 공무원의 자식으로 그나마 여유가 있는 귀남(귀한 남자)에게 얹혀산다. 덕분에 신림동 지하방과, 대흥동에서 곰팡내 나는 하숙집에서 살던 두 남자가 비슷한 돈으로 1층집!(서울에 상경해서 처음 살아보는 1층집)에 살게 됐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0만 원. 관리비는 물값이라고 1인당 2만 원씩 받으신다. 한 달 물 값 2만 원이 대동강 물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뺨치지만, 계약할 당시 2명이 살다가 1명이 뒤에 몰래 들어와 아직까지 2명이 사는 걸로 됐으니 쌤쌤이다. 내 고향 부산에서는 월세 30만 원이면 꽤나 좋은 원룸에서 살 수 있는데, 서울은 옥탑방 아니면 지하다.

'지주'라 불리는 남자와 두 세입자

집주인과 세입자들의 아름다운 공존을 위한 계약서 가사노동과 집안운영에 관한 격렬한 논쟁끝에 나온 합의문, G20보다 더 어려운 합의였다지만, 더 실질적이긴 하다.
▲ 집주인과 세입자들의 아름다운 공존을 위한 계약서 가사노동과 집안운영에 관한 격렬한 논쟁끝에 나온 합의문, G20보다 더 어려운 합의였다지만, 더 실질적이긴 하다.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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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진보적 가치 아래 있는 놈이 좀 더 내고, 없는 두 사람은 월 10만 원이 안 되는 돈을 낸다. 그래서 우리는 보증금 전액과 월세의 대부분을 내는 주인을 '지주'라고 부른다. 그리고 매달 월세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쌀을 내가 샀으니 월세를 깎아야 한다고 하면, 지주는 전기료가 많이 나왔다고 맞선다.

그러면 에어컨이나 보일러를 틀지 말고 버티는 생활이 지속되다 누구라도 더위를 먹거나 감기에 걸리면 잠시 안락한 집안환경이 조성된다. 돈 문제뿐만이 아니다. 설거지와 빨래, 청소를 누가 더 많이 했는가 등 논쟁이 수시로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집주인과 세입자의 아름다운 공존을 위한 계약서를 적어서 서명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웅다웅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내막을 자세히 모르는 지주의 가족들이 올라오셨으니, 얹혀 사는 우리는 하루 7천 원짜리 찜질방으로 일단 대피했다. 그러나 아뿔싸, 정신없이 나온다고 양말과 갈아입을 옷을 안 들고 왔다. 할 수 없이 내가 대표로 들어가서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겼다. 자주 집에 놀러 오는 친구로 위장했다.

"자주 놀러 오는가 보네? 옷도 많고? 우리 아이가 공부모임 같은 거 하나?"

절체절명의 위기다.

"아…, 그건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집이 원룸인데도 크고 좋아서 친구들이랑 술 마시러 자주 와서요. 죄송합니다."

쌓인 양말들 양말통이 없어 대야에 개어서(?) 놓는다.
▲ 쌓인 양말들 양말통이 없어 대야에 개어서(?) 놓는다.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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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를 돌려서 이야기한 다음 황급히 집을 빠져나왔다. 대답을 잘 했겠지? 그러나 그런 게 통할 리가 없다. 나중에 들어보니,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빼빼로데이 사건

가족들의 상행과 '사상의 자유 사건(?)'은 아주 가끔씩 벌어지는 이벤트라 할 수 있다. 더 일상적인 에피소드는 '사랑'을 둘러싼 투쟁이 아닐까? 얼마 전 11월 11일은 농민의 날이기도 하지만 '빼빼로데이'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 집에 사는 세 남자는 모두 연애를 한다. 이 집 지주인 후배 녀석이 빼빼로데이 전날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빼빼로 세 개를 집어들었다. 공교롭게도 나의 여자 친구와 지주의 여자친구 역시 이문동에서 함께 산다. 이들도 여자 셋이 돈을 모아 원룸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지주 녀석이 빼빼로를 여자친구에게 주면 자연스럽게 나의 여자친구도 그놈의 빼빼로를 두 눈 부릅뜨고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여자친구와 나는 상업화의 노예가 되지 말자며 빼빼로를 챙기지 않겠다고 합의한 상태.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야, 치사하게 너만 빼빼로 줄 거야, 어떻게 줄 거야?"
"왜요... 비밀이에요."

그런데 12일 밤 후배가 사온 빼빼로 세 개 중 2개가 사라졌다. 11일은 G20 규탄 집회가 있었는데, 그 후배는 집회에 나갔고 당연히 여자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같이 사는 다른 녀석이 남은 건 줄 알고 눈치도 없이 다 먹어버린 것이었다. 분노한 후배 녀석은 손을 부르르 떨며 빼빼로를 외쳤지만, 뱃속으로 들어간 빼빼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700원 정도 하는 빼빼로는 그나마 낫다.

올해 '88만원세대의 연애'라는 주제가 화제였다. 사실 커피 마시는데 1인당 5천 원, 밥값이 그나마 싼 게 5천 원, 영화관은 1인당 1만 원꼴이니, 데이트 한 번 하면 2만 원 이상씩 둘이 합쳐서 4만 원 이상 써야 한다. 그나마 싼 DVD방도 자주 가기엔 부담스럽다.

그래서 큰맘 먹은 날은 1500원을 내고 DVD를 대여하고, 작은 마음 먹으면 500원에 영화를 다운받을 수 있는 집을 최적의 데이트 장소로 꼽는다. 집에서 밥 해먹으면 0원이 드는 자취방, 답답하다 싶으면 학교 안으로 가 얼마든지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자취방이야말로 최적의 데이트 장소인 셈.

특히 추운 겨울이 오면, 집 외에는 모두 돈을 써야 하는 장소뿐이다. 그런데 무려 3명이 모여 사는 집을 데이트 장소로 이용하기에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가끔 어색함을 감수하고 지주의 여자친구가 집에 놀러 오는 날이면, 난 묵묵히 투명인간이 된다. 컴퓨터 앞에 앉아 웹툰을 보거나 아무렇지 않다는 듯,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수밖에 없다.

봄, 가을에야 밖으로 나가면 되지만 겨울에는 나도 추워서 꼼짝없이 집에 있어야 한다. 어떤 후배는 서울대 앞에서 자취할 때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여러 사람과 함께 사는 형태의 집에서 자취하던 후배인데, 자신의 앞으로 온 택배 위에 옆방 자취생의 쪽지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섹스는 여관에서'

경제학자 우석훈씨가 <88만원 세대> 중 1장 "첫섹스의 경제학: 동거를 상상하지 못하는 한국의 10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남자의 자격? '고양이를 부탁해'

고양이 사료와 화장실 고양이의 초상권을 생각하여 사료와 화장실, 하지만 쌀은 부족했던 시절 고양이가 부럽기도 하다.
▲ 고양이 사료와 화장실 고양이의 초상권을 생각하여 사료와 화장실, 하지만 쌀은 부족했던 시절 고양이가 부럽기도 하다.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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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이 살다 보니,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조금씩 참고 살아간다. 그런데 '지주'는 유독 고양이를 좋아해서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했다. 물론 두 세입자는 결사반대. 그런데 집주인이 사정이 생겨서 딱 3주 동안 고양이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단다.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미 3명이 그다지 깨끗하게 살고 있지 않은 터였다.

그러나 원래 집주인인 '지주'가 안 하던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기 시작했다. (고양이) 똥도 자기가 다 치우겠다고 한다. 청소도 열심히 하겠다 한다. 눈물겨운 노력을 보고 외면할 수 없었던 두 세입자도 고양이 키우는 것을 허락했다. 무려 두 마리의 고양이가 들어왔다. 한 놈이 첫날 너무 긴장했는지 똥을 질펀하게 싸버렸다.

"빨리 목욕부터 시켜~!"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고, 화장실은 고양이털로 막혔다. 그 이후 방바닥에는 고양이 사료가, 이불에는 고양이의 털이 범벅이다. 혹자는 이것을 보고 이제 짐승 5마리가 산다고 한다. 새벽이면 울어대고, 내 배 위에 올라오고 하면서 잠을 설치기도 했다.

1주일이 지나니깐 이제 저희 집처럼 느꼈는지, 이불을 툭툭 치면서 들어와서 같이 자려 한다. 아침이면 얼굴을 들이대며 깨우는 통에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점점 정이 들어가는 중이다. 곧 헤어져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더러운 집안에 고양이는 사치다. 우리가 먹는 쌀은 떨어지는데, 고양이 사료는 넘쳐 흐르는 모습을 볼 때의 심정은 참으로 고약하다.

청춘이라기엔 너무 맛없는 인생이다

대부분의 20대 자취생들은 나와 비슷한 고약한 심정을 세상에 대해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그나마 고려대 앞은 전셋값이 좀 나은 편이다. 외대 앞 이문동은 언제 개발될지 모른다고 하고 중앙대 앞 흑석동은 이미 개발에 들어갔다. 갈 곳 없는 대학생만 늘어나고 있다.

손낙구씨가 쓴 <부동산 계급사회>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집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은  1084채를 보유하고 있단다. 그야말로 우리 같은 대학생이 살 집은 사라지는데 일부 가진 자들이 갖고 있는 집은 넘쳐흐르는 실정이다.

그나마 우리의 주거공간을 보장해야 할 대학은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으리으리한 기숙사를 짓고 학생들에게 제공하겠다고 한다. 방값이 주변원룸 시세와 비슷하니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그야말로 갈 곳 없는 청춘이다. 어찌 보면 그런 청춘들이 쪽방, 지하방, 자취방에 모여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쨌든 살아야 하니깐.

최근 엄기호씨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 속의 한 학생은 대자보를 쓰고 자퇴를 선언한 김예슬씨를 바라보며, '자기소개서 잘 쓰겠네'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자퇴를, 그것도 명문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명문대생이라는 거다. 그럴 기회조차 없는 지역의 대학생들에겐 김예슬씨마저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런 의문은 남는다. 이런 삶이 왜 청춘이어야 하는가?

우리들 서로에 대한 이해가 침묵이 되지 않기 위해서, 참여하지 않는 것이 트렌디 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래도 누군가는 움직여야 한다고 소리쳐야 하지 않을까? 쿨 하게 집 내놓으라고. 자취방에서 끓이는 라면은 그나마 맛있다. 그러나 사랑도, 생각도 자유롭게 못 하는 인생을 청춘이라 포장하며 속으로 끓인다면, 이건 너무 맛없지 않겠는가?


#20대#주거권#청춘#자취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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