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L과 나는 60년대 초반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났다. 동시대를 살아가다 보니 비슷한 경험도 많다. 어릴 적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고개를 끄덕일 만큼 공감하는 부분들이 많다.
공교롭게도 그 친구와 내가 어릴 적 지겹도록 많이 먹은 음식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밀가루'로 만든 음식이었다. 그것이 수제비든 칼국수든 국수든 원재료가 '밀가루'였던 것이다.
차이라면 나의 경우엔 먹을 것이 없어서(쌀을 살 돈이 없어서) 밀가루를 먹었다면, 그 친구는 건강에 좋다고 해서 반강제로 밀가루 음식을 먹었다는 것이다.
어떤 정보가 쌀밥을 충분히 먹을 수 있었던 환경에 살았던 그 친구에게까지 밀가루 음식을 먹게 한 것일까?
송기호 변호사의 <맛있는 식품법 혁명>에 그 답이 나와있다. 나의 친구 L의 부모는 이런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국민영양개선령'과 '영양 지도 사업'의 뿌리는?박정희 정부는 1969년 '국민영양개선령'을 만들어, '영양 지도 사업'이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중략)……. 1970년 이 학회지(한국영양학회지)에는 "쌀은 3세 이전의 어린이에게는 단일한 단백급원으로는 부족한 식품이며, 쌀을 주식으로 섭취하는 나라에는 성장장해, 'kwashiokor', 'marasmus', 비타민A 결핍증이 영양장해로 되고 있다"는 내용의 논문이 실렸다(PP. 21-22).쾨시오커와 마라스무스는 성장발달 지체, 발육지연 등의 장애를 생각하면 된다. 아무튼 쌀을 주식으로 살아오던 이들에게 쌀을 주식으로 하면 정신운동기능 장애가 발생하고 발육이 극심하게 지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박정희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1962년에 법적 운명을 다한 일제강점기의 '총독부 식품법'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우리 식품법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데라우치 식품법에 지배를 당해 이 땅의 자연과 지역에 뿌리내린 식품법을 만들지 못한 약점을 미국의 식품법이 치고 들어온 현실을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식품체제는 철저하게 세계무역기구(WTO)와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 체제에 노출되어 있다. 2008년 식품안전기본법에는 아예 '세계무역기구와 국제식품규격위원회의 국제적 기준에 맞게' 제정 또는 개정하고 시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4조 4항).
안전한 식품을 먹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바른 식품법'<맛있는 식품법 혁명>의 저자 송기호는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저자의 말에서 이렇게 소개한다.
'이 책은 학교급식 식기세척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2005년 1월에 발암 가능물질이 학교급식 식기세척제 원료 목록에 있는 것을 알았다……. (중략)……. 2006년 11월, 보건복지부는 호흡기 화상 유발물질을 급식 식기세척제 원료에서 빼는 순간에서도 발암 가능물질은 제외하지 않았다.'(P.5)이 책에서는 상식을 배반한 식품법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다. 과연 '먹을 권리'가 남아있기나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맛있는 식품법 혁명>에 소개된 사례들은 불편한 진실인 것이다. 저자가 추구하는 것은 '상식적인 식품체계'이다.
'안전한 식품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필요하다. 좋은 밥을 먹을 권리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며 인권이다. 좋은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안전한 먹을거리를 지속적으로 공급해야 한다. 그러려면 지역의 자연과 사람들에게 터 잡은 식품체계가 필요하다. 그것을 복돋는 것이 바른 식품법이다.'(P.6)이 책에서 다루는 불편한 진실의 단편들데라우치 식품법은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합리화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총독부는 조선의 식품체계는 비위생적이고 저급하며, 조선의 식품산업은 영세하고 졸렬하므로 이를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제가 조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인 비위생론에 집착한 것이다. 조선인의 위생상태가 유치해서 그들의 불결함에 총독부가 간여한 것인데 조선인들은 이에 반감을 가지고 3·1운동을 일으켰다고 주장할 정도였던 것이다(P.50 요약).
현재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운 밥상에는 근본적인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미국산 밀과 유전자 옥수수, 석유, 원자력이 우리의 밥상을 떠받치는 기본동력인데 이중 어느 하나라도 조달하지 못하면 풍요로운 밥상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예로 미국에서 밀과 옥수수를 수입할 수 없으면 1억 3천만 마리(2008년 기준)의 가축이 굶주릴 것이며, 가축의 굶주림은 곧 사람의 굶주림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된 것이다.
더군다나 풍요로운 밥상이라는 것도 유전자조작식품(GMO)를 위시하여 각종 화학물질과 발암물질로 범벅이 된, 안정성이 검증되지 않은 식품들이 식품법이라는 합법적인(?) 옷을 입고 우리의 식탁을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먹는 식품에 어떤 성분이 들어 있는지 알 길은 소비자에게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고,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들은 교묘하게 식품법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농업을 하나로 묶는 환경식품안전'이라는 기본개념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정의로운 식품법은 식품체계의 흐름을 관료들을 위해 분리하지 않는다. 식품은 환경과 농업이 낳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식품을 먹을 때 결국 환경을 먹는다. 환경이 오염되면 농업이 오염되고 밥상도 오염된다. 환경과 식품과 농업은 하나다. 환경과 식품과 농업을 통합적으로 관리해야 한다'(P.148).식품법 100년의 무게는 무겁다. 기득권과 관료주의가 득세하면서 식품법은 의약품과 가공식품의 이익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우리는 풍요로운 밥상을 맞이하는 현실 같다. 그러나 풍요로운 식탁 속에 들어 있는 불편한 진실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거대한 식품체계 속 개인이 무기력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가? 저자는 '식품체계를 바로 세울 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소비자에게서 나온다'며 다음 세 개의 보물 주머니를 우리에게 화두로 던진다.
첫째, 소비자가 자신의 판단으로 식품을 선택하고 결정한 공간은 존재한다. 둘째, 소비자는 작지만 귀한 자치의 공간을 직접 만들 수 있다.셋째, 선택하고 자치하고 연대하는 소비자의 연대.의심했지만 외면했던 불편한 진실을 이 책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대로 둘 것인가? 바꿀 것인가? 그것은 소비자인 당신 손에 달렸다. '맛있는 식품법 혁명', 그것을 꿈으로만 존재하게 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