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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피크에서 바라본 홍콩섬
 빅토리아피크에서 바라본 홍콩섬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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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으로부터 함께 홍콩에 다녀오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화려한 홍콩의 쇼핑거리였다. 루이비통, 샤넬, 프라다, 페라가모, 구찌… 여자라면 누구나 (물론 남자라고 예외가 아닌) 선망하는 최고급 브랜드의 매장이 한 블록 건너 하나씩 들어서 있는 쇼핑거리. 세일 시기를 잘 골라 가면 꿈도 꾸지 못하는 가격에 꿈에 그리던 명품 백을 구입하고 비행기 값을 세이브해서 돌아올 수 있다는 전설이 난무하는 곳. 쇼퍼 홀릭의 천국이 바로 내가 생각한 홍콩이었다.

10일 인천 공항을 떠나 3시간 30분. 홍콩의 첵랍콕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이 있는 란타우섬에서 구룡반도로 넘어가는 다리에 이르니 세계물류의 허브라는 홍콩항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인천이나 부산의 컨테이너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항만시설과 일대를 꽉 채운 엄청난 수의 컨테이너들은 보는 사람의 기를 질리게 하기 충분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컨테이너선들이야 말로 홍콩이라는 도시에 피와 산소를 공급하는 허파와 심장이 아닐 수 없다. 

동행한 지인이 '홍콩 간다'라는 말이 예전부터 홍콩항 인근에 발달했던 홍등가를 드나들던 선원들의 입에서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며 은밀하게 속삭인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상상할 수 있는 내용이라 버스 구석 얼굴을 마주보며 킥킥거렸다.

어느새 버스는 구룡 반도에서 홍콩섬을 잇는 총길이 2km의 해저터널을 지나 홍콩섬의 중심격인 센트럴에 다가간다. 뉴욕의 노란 택시만큼이나 유명하다는 홍콩의 빨간 택시와 2층 버스들이 지나는 걸 보니 이제 홍콩의 속살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다. 
홍콩섬으로 들어가는 2km거리의 해저터널
 홍콩섬으로 들어가는 2km거리의 해저터널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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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냄새 물씬 나는 홍콩의 재래시장

코즈웨이베이의 한 호텔에 짐을 푼 우리는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앉아서 먹어도 늘 서서먹은 것처럼 2% 부족한 무엇이 있는 기내식. 그런 핑계로 우리가 생각한 점심은 말 그대로 점심인 딤섬이었다. 꽃게 모양 딤섬, 꽃 모양 딤섬, 고기 딤섬, 새우 딤섬… 백가지도 넘는 종류의 딤섬 중에서 우리가 고른 건 안전한(이미 먹어 본) 몇 종류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만큼은 왠지 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 두렵다.         

딤섬으로 마음에 살짝(?) 점을 찍은 후 홍콩 바이어를 만나기 위해 노스포인트로 향했다. 재래시장 거리에 위치한 바이어의 로드샵을 방문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그건 남편의 비즈니스일 뿐 나는 남편이 일을 하는 동안 시장 골목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세계 어디든 재래시장은 늘 활기가 넘친다. 백화점처럼 말쑥하게 빼입은 사람들도 없고, 화려한 포장에 싸인 물건도 없고, 번쩍거리는 조명도,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도 없지만 사람의 숨소리와 땀 냄새가 그 어느 곳보다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곳. 홍콩의 재래시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름을 줄줄 흘리며 익어가고 있는 오리들과 싱싱한 채소들. 갓 구워 낸 빵들과 우유보다 더 잘 팔린다는 두유. 싱싱한 생선과 고기를 파는 가게엔 놀랍게도 어른 주먹만한 개구리들이 가득한 철장이 보인다. 좀 징그럽긴 하지만 돼지고기나 생선만큼이나 홍콩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재료란다. 
거리나 시장에서 점을 보고 복을 비는 사람들
 거리나 시장에서 점을 보고 복을 비는 사람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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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한쪽엔 행색이 초라한 할머니들이 지나는 행인들의 점을 치고 복을 빌어주는 모습도 보인다. 부처나 약사여래, 신장이나 관우의 모습을 한 작은 불상 앞에 향을 피우고 점을 보는 사람의 운에 따라 지전을 태우기도 하고 향을 살라주기도 하는 모양인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것일까? 두세 명의 젊은 여성들이 진지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값비싼 명품 즐비한 오션시티... 상상을 초월하는 홍콩의 빈부격차

명품백을 구입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인증샷으로 달래고
 명품백을 구입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인증샷으로 달래고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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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구경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조금씩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이제는 그 어느 곳보다 화려하다는 홍콩의 야경을 보기 위해 구룡반도의 침사츄이로 향할 시간이다. 매일 오후 8시, 빅토리아 항 인근 44개 고층빌딩에서 음악과 함께 선보이는 화려한 레이져 쇼,  '심포니오브라이트'가 펼쳐진다. 조금 일찍 도착한 우리는 쇼를 보기 전에 세계적인 명품점들이 즐비한 오션시티거리를 걷기로 했다.

아무리 면세라도 보통 200만 원에서 300만 원 정도는 줘야 구입할 수 있는 명품 신상 핸드백들이 거만한 자세로 관광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여자인지라 갖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가방하나 사고 1년 넘게 할부금을 내며 쪼들릴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런 명품을 누가 다 사는 걸까? 남편의 사업 파트너에게 물으니 홍콩 사람들이 생각보다 부자라서 명품소비도 잘 된단다. 그런 이유로 명품브랜드들의 홍콩 매장 크기나 개수가 아시아에서는 최고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고.

1인당 GDP가 4만 달러에 육박하는 홍콩은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소득(PPP)역시 4만 5천여 달러로 세계 5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소득과 구매력이 모두 높은 나라(혹은 도시)이니 명품 소비가 아시아 다른 나라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은 당연해 보인다.

낮에 시장에서 만났던 허름한 차림의 홍콩 시민들이 떠올랐다. 국민소득 4만 달러의 당사자라고 보기엔 뭔가 아쉬움이 많아 보이는 그들. 그들은 홍콩시민이 아니라는 것일까? 사실 화려한 도시 홍콩은 선진경제를 갖춘 도시 중 빈부격차가 가장 심한 곳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기도 하다.

홍콩의 빈부격차는 상상을 초월한다. 유엔 개발프로그램(UNDP)이 2009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상위 10%의 소득이 하위 10% 소득의 18배에 달한다. 상위 10%의 소득은 국가(도시)전체 소득의 3분의 1을 점유하고 있는 반면 하위 10%의 점유율은 고작 2%에 그치고 있으며 홍콩은 지니계수 43.4로 빈부격차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홍콩의 철저한 자유시장경제가 낳은 부작용이 아닐 수 없다. 

홍콩의 밤하늘을 수놓은 심포니오브라이트는 화려했지만 기대했던 만큼 판타스틱하지는 못했다. 13분여의 쇼를 위해 홍콩 관광청이 4400만 홍콩 달러를 쏟아 부었다고 하는데 들인 비용만큼의 감동을 받지는 못해 미안한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빅토리아 하버가 내려다보이는 고층빌딩에서의 저녁은 달콤했지만 뭔지 모를 쓸쓸함을 안겨주었다. 식당을 내려온 우리는 홍콩섬으로 돌아가기 위해 스타패리에 승선했다. 홍콩섬과 침사츄이 해안을 따라 늘어선 고층빌딩들의 화려한 광고판과 조명들이 검은 바다에 비추어 잘게 부서졌다.

아파트 한 채 가격의 요트... 그리고 낡고 허름한 선상 가옥
코즈웨이베이에 정박해 있는 개인요트
 코즈웨이베이에 정박해 있는 개인요트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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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뜬 우린 호텔 근처 빅토리아파크로 산책을 나갔다. 이른 아침부터 운동을 하러 나온 노인들이 적지 않다. 누군가의 구령에 맞추어 태극권 동작을 따라하는 노인들의 무리를 지나 잘 가꾸어진 아열대정원을 가로 지르니 마침내 바다가 보인다.

바다 건너 구룡반도의 높은 빌딩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빛을 내고 있다. 고개를 돌려보니 왼편 완차이 페리선착장 쪽으로 홍콩부자들 소유의 요트들이 즐비하다. 소형아파트 한 채 가격이라는 요트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왼쪽과는 정반대의 장면이 펼쳐진다.

낡고 허름한 소형 목선에 비닐로 천막을 쳐서 지붕을 만든 선상가옥들이 마치 구획이라도 해 놓은 듯 요트 정박장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반대편에 밀집해 있는 것이다. 아침이라 그런지 배안에 사람의 기척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멀리서도 한눈에 그들의 어려운 삶을 바라 볼 수 있었다.

삼판(sampan)이라고도 불리는 이 작은 배는 홍콩의 오래된 주거 형태로 영국이 홍콩을 점령했을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수가 바다에 떠 있었다고 한다. 한때 15만 명 가까이 늘어났던 수상생활자들은 최근은 그 수가 많이 줄어서 홍콩섬 남부 에버딘이라는 곳에 집단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홍콩북부에 해당하는 코즈웨이베이에도 수십척의 삼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홍콩 바다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구경나온 관광객을 향해 호객을 하는 삼판. 배안에 아주머니가 타고 계신다
 구경나온 관광객을 향해 호객을 하는 삼판. 배안에 아주머니가 타고 계신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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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의 작은 집 삼판은 어제 본 홍콩의 재래시장만큼이나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조금 더 가까이 보기 위해 배를 대는 선착장까지 내려가니 언제 보았는지 작은 삼판 하나가 물 위를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오며 타겠느냐고 물어본다.

듣기로는 30~40분 삼판투어를 하는데 50~100 홍콩달러라는데 낯모르는 홍콩아주머니 배에 올랐다가 혹시라도 좋지 않은 일을 당하면 어쩌나 불안한 마음에 손사래로 배를 보내버렸다. 

삼판 아줌마의 호객을 뒤로하고 또 다른 삼판들이 모여 있는 연안을 따라 걷다보니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삼판에서 햇살에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눈길을 잡는다. 할머니의 백발과 할머니가 들고 계신 찌그러진 스테인리스 그릇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아침을 드셨는지 바닷물에 그릇을 헹구시는 할머니. 아마도 배안에 누워 계신 할아버지와 함께 수상생활로 평생을 보내신 분들이 아닐까 싶다.

홍콩정부에서는 수상생활자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위생, 안전, 환경과도 같은 문제들이 발생하자 이들에게 육지에 소형아파트를 임대해주며 이주를 독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자라온 수상생활자들의 육지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침 식사후 설거지를 하고 계신 수상생활자 할머니
 아침 식사후 설거지를 하고 계신 수상생활자 할머니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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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서 먹고 살거리를 마련하지 못해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거나 도시빈민을 전전하다 다시 고향인 바다로 나와 수상생활로 돌아가는 수가 적지 않다고 한다. 하기 좋은 말로 육지멀미가 고통스러워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육지의 가난이 아닐까 싶다.

홍콩의 빈부격차가 세계 1위가 된 이유 중 하나가 홍콩의 원주민이나 다름없는 수상생활자나 탈수상생활자을 위한 생활보호가 잘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하게 되는 대목이다. 

남편의 비즈니스에 동행했던 2박 3일의 짧은 홍콩일정 동안 부지런히 홍콩의 빛과 어둠을 보러 다녔다. 명품거리의 화려함과 재래시장 사람들의 땀 냄새, 수상생활자들의 고단한 삶과 홍콩 부자들의 명품놀이.

어쩌면 우린 '홍콩 간다'라는 말이 주는 속된 이미지에 속아 홍콩이라는 도시에 너무나 많은 환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화려한 앞모습만큼이나 어두운 뒷모습을 가지고 있는 홍콩. 매일 밤 레이져 쇼를 펼치는 마천루 아래 빈곤한 수상생활자의 삼판이 떠다니는 곳. 어쩌면 이것이 홍콩의 진짜 얼굴이 아닐까싶다.

나도 모르게 영화 <영웅본색>의 주제가 당연정의 애잔한 멜로디가 흥얼거려진다.
침사츄이에서 바라본 홍콩섬의 야경
 침사츄이에서 바라본 홍콩섬의 야경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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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홍콩, #코즈웨이베이, #침사츄이, #완차이, #수상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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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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