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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행복스러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유년 시대여 !어찌 그 추억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찌 그 추억에 즐겨 잠기지 않을 수 있으랴. 유년 시대의 추억은 나의 영혼에 청신한 기운을 불어넣어,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린다.
<유년시대> 중-'톨스토이'

요즘은 아들보다 확실히 딸을 선호하는 시대. 그래서일까. 엄마에게 딸은 노후에 좋은 길벗이 된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그러나 나의 돌아가신 어머니는 옛날 분. 확실히 딸인 나보다는 아들들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어머니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도 부모가 되어 생각해 보니, 정말 우리의 속담처럼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는 것이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따라 이 고장 저 고장 옮겨 다니며 살아야 했다. 이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직장에서 발령이 갑자기 떨어지면, 어머니는 부랴부랴 이삿짐을 싸서 아버지가 계시는 고장으로 우리 남매를 데리고 이사를 다니셨던 탓이다. 손을 꼽아 헤어보면 어머니, 이삿짐을 서른번도 더 싸야 했었다.

어떨 경우는 외할머니에게 우리 남매를 맡기고 어머니 혼자만 아버지가 계시는 곳과 집을 왕래하며 두 집 살림을 돌보기도 하셨다. 그러나 큰 오빠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머니는 아버지 혼자 외지에 살게 하고, 어머니는 우리 남매들과 함께 아버지를 기다리며, 평생 직장따라 객지로 떠도는 아버지로 인해, 혼자 외로운 삶을 살다가셨던 분이다. 

지금처럼 이삿짐 센터나 아파트가 많던 시절이 아니라서, 급하게 이사를 해서 집을 쉽게 얻지 못해, 허름한 여관에서 머물면서 집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셨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그 마을 사람들의 소개로 한번은 폐가가 다름 없는 초가를 얻어서 어머니가 직접 초가 지붕을 고치고 허술한 담도 고쳐 쌓은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처음으로 살게 된 초가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었다. 그러나 도회지의 냄새나는 연탄아궁이가 아닌, 솔가비 따위의 땔감으로 밥을 짓는 아궁이라서, 겨울방학이 되면 땔감을 얻기 위해 야산을 헤매던 힘든 기억이 인상 깊게 뇌리에 남아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의 이름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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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아버지는 바깥일만 아셨고, 어머니는 가계가 넉넉치 못한 탓에 정말 억척스러울 정도로 절약과 검소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런 저런 힘든 일이 많아도 아버지에게 일체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으셨다. 그 당시 철부지였던 당신의 자식들은 어머니의 힘든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항상 부지런한 어머니 덕분에 이런 가을 무렵이면 말끔하게 손질한 초가 지붕 위에 하얀 박이 주렁 주렁 열려,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이 되곤 했다. 내 희미한 기억에 손바닥만한 뜰엔 어머니와 할머니가 가꾸신 아름다운 꽃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작약 맨드라미, 채송화, 봉선화, 백일홍, 붓꽃들이 피고 지곤 해 마당에는 항상 꽃이 피어 있었다. 집 앞 개울가에는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물결이 되어 흔들리곤 했다. 집 뒤 빈터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많이 자랐는데, 어머니와 할머니는 이 빈터의 한 구석에 채마밭을 가꾸셨다.

그리고 나와 동생에게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고 돌보게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일찍부터 흙을 파고 가꾸어 씨를 뿌리면 싹이 되어 나오는 생명의 신비함을 배우며 꽃과 채소를 가꾸는 보람을 알게 된 것도 같다.

나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누우시던 날
쓰린 괴로움을 말로 차마 못하시고
매었던 옷고름 풀고 가슴 내어 뵈이더라

까만 젖꼭지는 옛날과 같으오이다
나와 나의 동기 어리던 팔구 남매
따뜻한 품에 안겨 이 젖 물고 크더이다.
<가람문선> 중-'이병기'

아버지께 바가지 한번 안 긁으셨던 어머니의 속마음 오죽했을까

우리 가족이 잠시 살았던 그 고장에는 제법 깊고 폭이 넓은 강이 흘렀는데, 대청마루 끝에서 저녁노을이 물든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금빛 비단띠가 흐르는 것 같았다. 이따금 강둑으로 그 동네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지나가곤 했는데, 나는 그런 친구들의 손짓에 쪼르르 달려나가, 말도 없이 해저물어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어머니 그럴 때마다 별 말씀 없이 "넌 하는 짓이 어찌 그리 선머슴애같냐 ?" 핀잔만 주셨던 것이다.

햇살이 뜨거운 여름날이면 그 강가에 나가 오빠랑 동생이랑 재첩 조개 캐는 내기도 했다. 언제나 재첩을 많이 캐는 오빠한테 샘이 나서 일부러 재첩 바구니를 쏟아 오빠에게 꿀밤도 많이 얻어 맞곤 했었다.

이제는 어머니도 그리고 아버지도, 재첩 조개를 같이 줍던 남동생도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정말 꿈결처럼 사라져버린 유년 시절의 얘기지만 문득 문득 우리 남매들을 돌보며 힘든 생계를 위해 돈벌이를 마다하지 않으셨던 어머니의 은혜에 눈물이 마구 솟구치는 것이다.

바슐라르의 '넘쳐나는 유년시절은 시의 씨이다.' 말처럼,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은 언제나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 없는 희생과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버린 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뭉게구름처럼 피어나곤 한다.

수 없이 이삿짐을 혼자 싸셔도, 나의 어머니는 단 한번도 아버지한테 직업을 바꾸라는 소리라던지 힘들다는 소리를 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문득 이제와 곰곰히 생각하니, 나의 어머니는 내가 알고 있는 분보다 훨씬 훌륭한 어머니셨던 것이다….

언제나 말보다 묵묵하게 행동으로 자식을 사랑하고 지아비를 사랑하던 그 어머니의 사랑, 그 사랑의 무게에 세월이 흐를수록 가슴이 무겁다. 내게 있어 항상 따뜻하고 행복했던 유년 시절에의 시간을 떠올리면, 그 자리에 환한 어머니의 미소가 있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어머니는 '어머니는 아픈 전기. 아프고 뜨겁고 견딜 수 없는 전기이다….' 그리고 예까지 나를 이끌고 오신 내 영혼의 길벗이었음을 안다.

그리운 초가집 생각
 그리운 초가집 생각
ⓒ 영화, 서울이 보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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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길벗, #모정, #유년시대, #어머니,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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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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