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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연 중국문화기행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
 이욱연 중국문화기행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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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넓고 깊었다. 그들은 손을 뻗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짐작으로 더듬으며 발을 내딛을라치면 허방다리가 일쑤였다. 중국에 머문 스무날은 넓고 깊은 중국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느끼기에는 너무 짧았다. 어렵게 얻은 기회를, 알토란 같은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한 노력이 응당 뒤따라야 했다.

산해진미 호텔음식을 마다하고 뒷골목을 헤집었다. 일부러 그곳 보통사람들이 먹고사는 허술한 '불량식품'을 찾아 다녔다. 여행자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최적의 장소를 찾아 감성의 더듬이를 작동시켰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 삶의 이면을 진지하게 탐색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과연 뒷골목에서는 사람냄새가 났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소박하고 친절했다. 궁금한 것이 생길 때마다 수첩을 들이대며 단어를 써달라고 했다. 병음까지 달아서. 무례한 이방인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마음을 열어 주었다. 감동이었다. 휴일 오후에 가족끼리 연인끼리 잔디밭에 모여앉아 삼삼오오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 푸른 하늘아래 펼쳐진 쒸엔우후(玄武湖) 공원 정경은 더 없이 평화로웠다. 여기가 정말 사회주의 국가 중국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난징 시가지 빌딩의 휘황한 네온사인. 밤마다 사람 물결을 이루는 신지에커우(新街口) 밤거리는 차라리 자본주의의 첨단이라야 옳았다.

중국어 발음교정을 위해 개인교습을 받으러 간 카페에서 만난 젊은이들. 그들은 남의 눈을 의식하는 법이 없었다. 여자친구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농도 짙은 키스신을 펼쳤다. 에두르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구현했다. 캠퍼스에서든 길거리에서든 키스는 일상다반사였다. 그동안 생각하고 있던 중국이 아니었다. 중국산이라는 편협한 단어로는 절대 담을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해답 대신 의문을 품고 왔다. 도대체 중국은 어떤 나라인가.

도서관에 들렀다. 중국 관련 서적이 의외로 많았다. 지금까지 중국어만 배우려 했지 중국이라는 나라를 알기 위한 노력이 없었다. 순서가 틀렸구나. 언어를 배우려면 그 나라를 알고 그 사람들을 느껴야 그들의 언어가 제대로 다가 올 텐데. 지인에게 소개받았던 '아큐를 위한 변명'은 대출 중이었다. 중국 관련 서적 코너를 둘러보다가 일단 몇 권을 골랐다. 그 중에서 최종 선택한 책이 이욱연의 중국문화기행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창비 펴냄)였다.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는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문화 에세이 겸 여행기다. 오늘날 중국의 민감한 쟁점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16편의 영화를 해석하고 그 배경이 된 중국도시와 지역을 여행하면서 쓴 글들을 엮었다. 영화와 여행이라는 두 가지 서사방식으로 픽션과 현실을 절묘하게 넘나들며 중국이라는 넓고도 깊은 대륙을 맛깔나게 요리해냈다. 중국에 다녀오고 나서 중국에 목말라 있던 내 궁금증을 풀기에 더없이 좋은 책이었다.

영화 <패왕별희>의 한장면
 영화 <패왕별희>의 한장면
책의 첫 장은 베이징과 <패왕별희>를 엮었다. 소도구로 훠꿔(火鍋)와 얼꿔터(二鍋頭)가 등장한다. 베이징은 사나운 날씨로 유명하단다. 겨울에는 칼바람, 봄에는 황사와 꽃가루, 여름에는 불볕더위, 여기에 사시사철 시야를 가리는 대기오염까지. 왜 이렇게 열악한 곳에 수도를 정했는지 모르겠다는 외국인의 불평이 터질 만하다. 훠꿔와 얼꿔터는 베이징 사람들이 사나운 날씨를 견디는 의식이란다. 단순히 음식을 먹는게 아니라 열악한 환경과 싸우는 제의란다.

훠꿔는 겨울에 주로 먹지만 겨울은 겨울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별미다. 먹다보면 한겨울인데도 땀이 솟아 에어컨을 켜기도 하고 한여름엔 땀으로 목욕을 하면서 먹는 맛이 또 다르다. 뻬이징에서 훠꿔을 먹을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뻬이징을 상징하는 술이 얼꿔터다. 우리나라 중국집에서 이과두주라고 부르는 술이다. 삼합을 먹어야 전라도를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꿔터에 훠꿔를 먹어야 비로소 뻬이징을 체험했다고 할 수 있다. 뜨거운 육수에 살짝데친 부드러운 양고기를 특유의 소스에 찍어 입에 넣은 뒤 깐뻬이!乾杯를 외치며 얼꿔터 한잔을 톡 털어넣는 순간 불줄기가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온몸에 불을 지른다. 순식간에 얼었던 몸과 마음이 스르르 풀리면서 한순간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중략-- 중국인들은 술을 품평할 때 술이 맵다거나 힘이 있다고 말한다. 술을 입에 털어 넣었을 때 입안이 얼얼한 것을 맵다고 하고 술이 불덩이가 되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뜨거운 불기운이 용틀임하면서 코까지 치솟아 올라오는 것을 두고 술이 힘이 있다고 말한다. 훠꿔와 얼꿔터를 먹는 일은 뻬이징 사람들이 겨울을 이기는 제의에 동참하는 일종의 문화체험이자 뻬이징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첫 번째 즐거움, 뻬이징 일락一樂이다. (17~18쪽)

경극은 훠꿔와 얼꿔터와 더불어 베이징의 문화적 상징이다. 경극은 베이징 인근에서 유행하던 전통 지방극이었지만 이제는 베이징의 상징 차원을 넘어서 중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아이콘이 됐다. 경극 감상이 베이징을 찾는 외국인들의 필수코스가 된 것은 천카이거 감독의 대표작 <패왕별희>의 덕이다. 영화의 유명세가 경극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패왕별희>에는 초패왕 항우와 그의 애첩 우희가 등장한다. 항우는 한나라 왕 유방에게 포위당해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되자 한밤중에 일어나 술을 마신다. 산을 뽑을 힘도 세상을 덮을 기개도 이제 쓸모가 없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 사랑하는 우희와 이별하는 씬이다.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 한데 (力拔山 氣蓋世)
때가 불리하여 추가 나아가지 않는 구나 (時不利兮 騅不逝)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쩔거나 (騅不逝兮 可奈何)
우여, 우여, 어쩔거나 (虞兮 虞兮 可奈何)

승부는 기울었다. 천하의 항우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제 사랑하는 여인 우희를 어쩔건가. 항우는 우희에게 유방에게 건너가서 목숨을 보전하라고 권한다. 유방이 한때 우희를 맘에 둔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였다. 적에게 보내서라도 사랑하는 여인을 살리려는 갸륵한 뜻이다. 우희는 '어찌 한 여인이 두 지아비를 섬기며, 천하통일을 꿈꾸는 황제께서 일개 계집의 안위를 맘에 두느냐'며 칼로 자결을 한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역발산 기개세의 능력을 가졌지만 천명과 천시가 따라주지 않아서 좌절하는 영웅의 비애와 한탄. 

항우의 마지막은 그의 외모답지 않게 대단히 시적이었다. 항우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오강을 건너가서 그곳의 왕이 되어 후일을 도모하라는 주위의 권고를 물리친다. '내가 강동의 젊은이 8천명을 싸움터에서 죽게 했는데 무슨 낯으로 그곳 사람들을 보겠느냐'면서 강 건너기를 거부한다. 그러고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뒤 사랑하는 여인 우희를 따라 자결한다.

이 순간 항우는 정치적 패배자를 넘어서고 그의 최후는 우희와 추의 이야기가 곁들여지면서 한편의 시가 된다. 정치적으로 패배자이지만 어차피 인간으로 천명을 거스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천명에 순응하여 자신의 최후를 시적으로 마감한 문화적 영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항우도 항우지만 한때는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더없이 초라한 항우를 끝까지 지켜주고 함께 삶을 마감하는 우희, 그녀는 모든 남성이 갈망하는 여성상의 상징이리라 그래서 중국인들은 양귀비보다 우희에게 더 매력을 느끼는 것이리라. 항우와 우희가 동아시아에서 전통적인 남성상과 여성상의 상징이 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 아닐까 (24쪽)

만남은 운명이다. 빌리러 간 책이 없어서 대신 빌려 온 이욱연의 책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 대타는 탁월했다.

현직 중국문화 관련 교수답게 사려깊고 해박한 이욱연은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던 1992년 겨울부터 2년간 베이징 사범대에 유학한 경력이 있다. 현재 서강대에서 중국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중국 현대문학과 문화를 가르치고 있으며, 중국을 오가면서 중국문학과 문화의 동향을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루쉰의 소설, 중국문화대혁명, 한류와 중국 대중문화를 연구했고 루쉰 산문선 <아침꽃 저녁에 줍다> 등을 번역했다.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 - 이욱연의 중국 문화기행

이욱연 지음, 창비(2008)


태그:#이욱연,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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