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읽기란 삶읽기
남들이 무어라 하거나 남 눈치가 어떻게 보이든 구태여 아랑곳할 까닭이 있을까 생각합니다. 남들이 헌책방 책일을 낮잡아본다 해서 헌책방 책일을 나 스스로 깎아내리며 주눅들 까닭이 없고, 남들이 헌책방 책일을 우러러본다 해서 헌책방 책일을 나 스스로 우쭐거리며 콧대 높일 까닭이 없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면서 보람을 느끼면 좋은 것입니다. 헌책방 일손을 잡는 사람이 더 거룩하다거나 더 모자라다거나 생각할 까닭이 없습니다. 숱한 책마을 가운데 한 갈래인 헌책방이고, 헌책방은 헌책방으로서 맡은 몫이 있음을 즐거이 누리면 좋습니다.
어느 일이나 매한가지 일텐데, 돈을 더 벌 생각으로 헌책방 일에 뛰어들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더 안 벌 생각으로 헌책방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내 살림을 아기자기 꾸리면서 남한테 손벌리지 않을 뿐더러, 내 몸과 마음을 곱게 쓸 수 있다는 믿음을 살뜰히 건사하면 즐겁습니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짧으면 열 해, 으레 스무 해, 길면 서른 해나 마흔 해 남짓 헌책방 책일을 이어가는 헌책방 일꾼은 이 사회에서 갖은 푸대접과 막대접을 받았습니다. 책을 몰라보는 이는 책을 몰라보면서 책을 함부로 다루며 헌책방 일꾼을 고달프게 하고, 책을 알아보는 이는 책을 알아보면서 헌책방 일꾼을 힘들게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막대접이나 푸대접은 헌책방 둘레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 둘레 아픈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며 함부로 내뱉는 말이란 대단히 많고, 내 둘레 가난하거나 고단한 사람들 어려운 삶을 헤아리지 않으며 아무렇게나 지내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제대로 알아보며 사랑하는 이가 드물다 하더라도, 책을 좋아하거나 책 사랑하는 이는 언제나 드나드는 헌책방입니다. 새책방에서 사라지고 도서관에서 안 갖추는 책이 워낙 많은 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퍽 많은 사람들이 책을 함부로 버리거나 마구 다루는데, 어쩌면 이 나라 사람들이 이토록 책을 함부로 버리거나 마구 다루기 때문에 한국땅 헌책방은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는 새삼스러운 문화를 일구는지 모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새책방하고 헌책방하고 도서관이 알뜰히 엮이면서 서로 제구실을 잘하는데, 이 나라에서만큼은 새책방은 참고서 장사와 깎아팔기에 옭매이고, 도서관은 맞춤법이 다르거나 대여율 떨어지는 책은 쉬 버릴 뿐더러 장서를 제대로 넉넉히 갖출 틀을 마련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 헌책방 또한 참고서 장사를 함께 해야 밥벌이를 어느 만큼 할 수 있는 가운데, 도서관에서 버리고 학교에서 버리며 사람들이 버리는 책을 꾸준히 캐내야 합니다. 사람들 스스로 헌책방에 책을 맡기어 새 임자를 찾도록 도와주지 않아요. 책마다 어떠한 빛이 있고 값이 있는가를 사람들 스스로 깨닫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사람들 스스로 내 몸과 마음을 곱게 돌보는 멋을 보듬기 힘든 탓이라고 느낍니다. 사람들 스스로 내 몸을 곱게 돌보거나 마음을 착하게 추스른다면, 책짐 나르기 만만하지 않다지만 내 살림살이에서 책을 덜 때에 가까운 헌책방에 맡겨 버릇하기 마련입니다. 또는 도서관에 맡기든 동무한테 맡기든 하겠지요.
오늘날 한국땅에서는 책은 책이 아니라 지식조각이거나 물건입니다. 책을 읽어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힘쓰는 사람은 드뭅니다. 책을 읽어 지식을 쌓거나 뽐내려는 사람만 많습니다. 더욱이, 지식조각을 쌓는 데에 쓰던 책이 한물 지나가고 나면 인터넷에 목록을 띄워 책장사에 나섭니다. 책장사가 나쁜 일이 아니라, 책으로 마음닦이를 해야 할 사람들이 하나같이 책장사에 뛰어듭니다. 그렇다고 책장사에 뛰어들며 온몸으로 책을 알려 하거나 책을 맞아들이려 하지는 않아요. 밑바닥부터 책하고 사귀지 않으면서 돈푼을 건지려고 책장사에 뛰어듭니다. 책을 안 읽는 사람도 돈에 매이고, 책을 읽는다는 사람마저 돈에 매입니다.
좋은 지식이란 없고, 갖춰야 할 지식 또한 없으며, 살아가며 얻거나 나누며 사랑과 믿음으로 섬기는 삶 한 가지만 있습니다. 좋은 책이란 좋은 삶입니다. 나 스스로 좋은 삶을 누린다면 내 삶이 곧바로 좋은 책입니다.
저는 내 어머니한테서 좋은 삶을 읽으며 좋은 책을 얻습니다. 내 아버지한테서도 똑같이 좋은 삶을 읽고, 옆지기 어머님과 아버님한테서도 좋은 삶을 읽습니다. 때때로 얄궂거나 짓궂은 삶을 읽기도 하겠지요. 좋다 싶은 삶을 읽을 때에는 기쁘게 좋은 삶을 얻습니다. 얄궂다 싶은 삶을 읽을 때에는 슬프게 좋은 삶을 얻습니다. 어떠한 삶이든, 이 삶을 읽는 저로서는 좋은 삶을 얻어 좋은 책이라는 느낌으로 내 가슴을 적십니다.
흔히 개구리 올챙이 적을 모른다고 하는데, 저는 이 옛말을 늘 곱씹으며 제 삶을 뉘우칩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다 사내이기 일쑤입니다. 아저씨들이요 할아버지들이며 젊은 사내들입니다. 뭐, 다른 사람을 굳이 들먹여야 하지는 않겠지요. 내 어리석음을 살피고 내 잘잘못을 돌아볼 노릇입니다. 나부터 내가 얼마나 개구리 올챙이 적을 모르는가를 돌이키면, 내가 책을 아주 많이 읽었다 할지라도 부끄럽고 창피하며 안쓰럽습니다. 종이책을 1만 권을 읽었거나 10만 권을 읽었거나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100만 권에 이르는 종이책을 읽었다지만, 이렇게 읽으며 얻은 앎조각을 착하며 참답고 예쁘게 나누지 않는다면 아직 올챙이에 머문 셈입니다. 100만 권에 이르는 종이책을 읽었으면 100만 권에 이르는 종이책에 담긴 훌륭한 고갱이를 내 몸과 마음으로 잘 삭여 대단히 훌륭한 사람으로 새로 태어난 채 살아야 옳습니다. 1만 권을 읽었든 1천 권을 읽었든 같아요. 더 많이 읽었으면 더 많이 읽은 아름다움을 즐거이 나누고, 더 적게 읽었으면 적게 읽은 그대로 가붓하게 내 마음그릇을 살가이 다스리면서 웃음꽃을 베풀 줄 알면 돼요.
(2) 아름다운 문학 읽기
아이 엄마하고 아이하고 제주마실을 와서 여러 날 지냅니다. 산골마을에서 남쪽땅 마을로 마실을 하면 한결 따스할까 싶었으나, 날은 춥지 않아도 바람이 잦으니 아이 엄마가 몹시 추워 합니다. 산골집에서는 늘 밥을 해 먹지만, 제주섬으로 마실을 왔다지만 밥은 언제나 사서 먹어야 하니까, 밥먹기도 아이 엄마한테는 좋지 않습니다. 돌아다니며 느긋하게 쉴 데가 따로 없으니, 이 또한 아이 엄마한테는 고달픕니다. 먼 마실을 왔다면 아이 아빠가 제대로 살피며 자리를 잡고 돌아다녀야 할 텐데, 이번에도 또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맙니다. 아빠로서 어째 이 모양인가 하고 뒷통수를 긁적인다고 뭐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졸립고 고단해서 잠들 듯 말듯 하는 아이를 안고 삼도1동에서 이도1동 쪽으로 걷다가 '방에 따뜻하게 불을 넣어 줄까' 싶어 보이는 잠집으로 찾아듭니다. 그런데 잠집 값을 치르고 들어가 보았더니 덩그러니 넓은 방에 침대만 있고 바닥에는 불이 안 들어온답니다. 마땅한 잠집 찾기부터 퍽 힘들다고 다시금 느낍니다. 잠집 값 걱정보다 바닥에 불을 넣는 잠집이냐 아니냐를 알아봐야겠구나 싶습니다. 그래도 아이가 다시 기운을 차리며 널따란 잠집 방을 신나게 뛰고 달리며 놀아 주니 한숨을 돌립니다. 아이가 노상 아비 모자란 짓을 잘 견디어 주고 받아들여 줍니다. 한 가득 있는 빨래를 하고, 아이를 따순 물에 씻깁니다. 이럭저럭 짐을 추스릅니다.
11월 13일부터 나흘째 머물었는데, 이제 이듬날에는 산골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이 엄마가 침대 이불을 뒤집어쓰면서 이제 좀 괜찮아졌으니 얼른 볼일 보라 얘기합니다. 제주섬 헌책방 일꾼하고 책밭 이야기를 더 나누어야 하고, 책도 더 골라야 하며, 사진도 더 찍어야 하기에, 미안한 마음으로 잠집에서 나옵니다. 어둑어둑한 제주섬 골목길을 걷습니다. 필름사진기랑 디지털사진기를 어깨에 나란히 걸고 뚜벅뚜벅 걷습니다. 인천에서 살던 때에도 동네 곳곳에 잠집이 참 많다고 느꼈는데, 제주섬이야 섬이 온통 관광지처럼 되었으니 잠집이 이렇게 안골목에도 많구나 싶습니다. 이 많은 잠집 가운데 애 아빠는 왜 그리 옳은 잠집 하나 못 고르나 싶습니다. 어쩌면 여느 사람들은 우리 애 엄마처럼 몸이 여리지 않으니, 침대방으로도 좋다고 여기는지 모릅니다.
오후 세 시 무렵에 문을 열어 오후 아홉 시까지 책손을 받는 <책밭서점>에 닿습니다. 헌책방 살림만 꾸리던 지난날에는 오전 여덟 시 반이면 문을 열고 오후 열 시 반까지 책방을 지키셨다고 합니다. 헌책방 살림만 꾸려서는 안 되겠다 싶어 밭일을 함께 하던 2007년부터는 오후 세 시 무렵에 문을 엽니다. 아침부터 낮까지는 밭에서 농사를 짓고, 낮부터는 시내로 나와 책방 문을 열어요. 어느새 오후 일곱 시가 훌쩍 넘었으니 문닫을 때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밤골목을 느긋하게 걸어 보겠다는 꿈은 접습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흐트러졌던 마음을 가다듬으며 잰걸음으로 책방으로 찾아갑니다.
어제 그제 들러서 고른 책을 사들일 값만 해도 45만 원이 나오지만, 어제 그제는 찬찬히 살피지 못한 책시렁이 있습니다. 어제 그제 한갓지게 돌아보았다 하더라도 새삼스레 돌아보면 새롭게 눈에 뜨이는 책이 있기 마련입니다. <책밭> 사장님한테 인사를 하고 책시렁을 하나하나 아로새기듯 돌아봅니다. 산골집으로 돌아갈 때에 아쉬워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책을 고릅니다. 나온 지 벌써 스무 해나 된 <막심 고리끼/이강은 옮김-이탈리아 이야기>(이성과현실,1991)를 살핍니다. 지난해에 사서 읽은 책이지만 다시 고릅니다. 우리하고 이웃한 이오덕자유학교 선생님하고 아이들한테 읽히면 좋을 책이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 하나를 교재처럼 삼으며 삶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요.
.. "언제까지 그럴 순 없겠지요. 그래 봐야 어쩔 수 없을 테니 ……." "그래, 하지만 ……." "아니, 그럴 힘도 없을 거예요! 이 세상의 젊은 가슴을 죽일 수 있는 힘이 어디 있겠어요." .. (218쪽)
그나저나 막심 고리끼 님 전집 가운데 한국말로 옮겨진 책은 몇 가지나 될까요. <어머니> 한 가지는 여러 출판사에서 겹치기로 자꾸 나오기는 하지만, 정작 숱한 고리끼 님 문학 가운데 골고루 옮겨지는 작품은 드뭅니다. 문학 출판사임을 내세우는 곳에서 고리끼 님 책을 바라기는 어렵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책 가운데 하나로 차근차근 옮겨지기를 기다릴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고리끼 문학을 읽었다'고 말하기 참 어렵습니다. 러시아말을 익혀 러시아 책을 사서 읽는다면 고리끼 문학을 다 읽을는지 모릅니다. 영어나 일본말로는 고리끼 문학이 다 옮겨졌을까요. 미국이나 일본에서 나왔을는지 모를 고리끼 전집을 읽어야 할까요.
.. "난 그런 이야기는 별로 마음에 안 드네요." 군인이 조용하게 말했다. "그 까를로네는 너무 야만인이야, 너무 어리석고 ……." "백 년 뒤에 보면 네 인생도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게다." 노인은 자욱한 담배연기를 뭉게뭉게 어둠 속으로 뿜어내며 감명 깊게 말을 던지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누구든지 네가 이 세상을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라도 한다면 말이다." .. (214쪽)
<론 오그라디/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편역-제3세계의 관광공해>(민중사,1985)를 만납니다. 고작 114쪽짜리 작은 판이라 책꽂이에 얌전히 꽂혔어도 쉬 찾아보기 어려운 책이지만 제 눈에는 확 뜨입니다. 저는 이 책을 두 번 사서 두 번 읽었으나, 두 번 샀던 책을 두 사람한테 빌려 주었는데 두 사람 모두 '책을 잃어버렸다'면서 돌려주지 않았어요. 잃어버렸다니 할 말이 없고, 잃어버렸으니 빌려준 사람이 다시 장만해야 합니다. 몇 해 만에 겨우 되찾습니다.
반가운 책을 살살 어루만지며 책장을 넘깁니다. 안쪽에 볼펜으로 '濟州道 44年 7/23'이라 적혀 있습니다. 아마 '분단 44년'이라는 뜻으로 이렇게 적었겠지요. 그러니까 제주섬에서 제주대학교나 제주교대를 다녔을 어느 분이 1989년 7월 23일에 제주섬에 있는 책방에서 이 책을 사서 읽었다는 소리입니다.
.. 빈민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관광객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여행이라는 것은 도보나 만원버스로 가까운 이웃 마을에 가는 정도를 의미한다. 그들은 결혼식, 장례식, 종교행사 정도의 여행은 할지 모르지만, 쾌락을 위한 여행은 할 수가 없다. 가계수입은 생계유지에도 불충분할 정도이기 때문에 사치성 여행을 할 여유가 없다. 사실 그들에게 사치라는 것은 가벼운 음료수 한 잔이나 괜찮은 식사 정도이다. 유급휴가나 레저여행 외국방문 등의 개념은 그들의 사고틀에는 없다. 이러한 빈곤한 나라에 관광객이 오는 것이다 .. (9∼10쪽)
여러 해 만에 다시 책장을 넘기면서도 뭉클뭉클합니다. 글월 하나하나 또박또박 가슴에 박힙니다. 1985년에는 편역으로 나온 <제3세계의 관광공해>인데, 편역이 아닌 완역으로 언제쯤 다시 나올 수 있을까 손꼽아 봅니다. 공정여행이나 착한여행이라는 말이 떠돌곤 하는데, 공정여행도 착한여행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여행책을 선뜻 내놓을 만한 출판사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똘스또이/박형규 옮김-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이성과현실,1990)를 봅니다. 톨스토이 문학책 가운데 이 번역판은 안 갖고 있어서 고릅니다.
.. 벙어리 처녀는 무엇이라고 외쳐대더니 도깨비를 식탁에서 끌어냈다. 그러자 이반의 아내가 도깨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무라지 마세요. 우리 시누이는 손에 못이 박히지 않은 사람은 식탁에 앉히지 않으니까요. 자, 잠깐 기다리세요. 곧 다들 자실 테니까, 그 다음에 남은 것을 잡수세요." .. (173쪽)
아름다운 문학을 읽을 때면 저 또한 아름답구나 하고 느낄 만한 글을 쓰고픕니다. 아름다운 예술을 마주할 때면 저 또한 아름다고 느낄 만한 사진을 찍고픕니다. 아름다움이란 말 그대로 참 아름다운 삶이라고 느낍니다. 좋은 책 하나는 사람들한테 좋은 손길과 좋은 마음길과 좋은 눈길과 좋은 사랑길을 북돋운다고 느낍니다.
멋진 문학도 나쁘지 않고, 재미난 문학도 나쁘지 않으며, 놀라운 문학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아름다운 문학이 가장 좋고 반가우며 기쁩니다.
<히로세 다카시/김원식 옮김-누가 존 웨인을 죽였는가>(푸른산,1991)를 봅니다. 이 책은 지지난달에 서울 혜화동에 자리한 헌책방에서 장만했으나, 그만 어디에선가 잃어버렸습니다. 누구한테 빌려주지 않았는데 잃고 말아 한동안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프로메테우스출판사에서 <제1권력>을 다시 내주었기에 이 책 또한 다시 내줄는지 모르지만, 언제 다시 나올는지 모르는 책입니다. 판 끊어진 책을 어렵게 장만했으면 잘 간수해야 하는데 늘 책상맡이고 가방이고 어디에고 굴리다가 잃는 책이 꽤 있습니다. 길에서 잃거나 전철이나 버스에 놓고 내리거나 한 책들을 누군가 알뜰히 건사해서 사랑해 준다면 고마운 노릇이지요. 저처럼 못난 책손 품에서 떠난 책이 좋은 책손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아무튼, 두 달 만에 고맙게 다시 만난 <누가 존 웨인을 죽였는가>를 애틋하게 쓰다듬습니다. 책은 비닐로 싸여 있고, 비닐 안쪽에는 '경희대 삼거리 인문사회과학 서점 地平'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작은 딱지가 붙어 있습니다. 오호, <地平>이라니, 이 인문사회과학 책방이 아직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오늘날 나라안에 남은 인문사회과학 책방은 꼭 세 곳인 줄 아니, 틀림없이 문을 닫았지 싶은데, <地平>이라는 책방을 떠올리거나 되새기거나 생각해 줄 만한 분은 몇 사람쯤 되려나요.
<황선미-동화 창작의 즐거움>(사계절,2006)을 들춥니다. 어린이문학을 쓰는 분이 쓴 '어린이문학 쓰기' 책이라 반갑습니다. 그런데 책을 펼치고 넘기면서 도무지 읽어내기가 힘듭니다. 이를테면, "'일기'에 대한 사회적 의미는 사전적 의미와 조금 다르다. 일기로 인한 우리 사회의 경험이 덧씌워진 현실적인 인식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의미에서 더 나아가 특수한 경험을 들추다 보면 '일기'는 학교 숙제 가운데 하나이고(38쪽)" 하는 글월이라든지, "삶의 미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는 작가일수록 인간미를 다룰 줄 아는 따스한 감성의 소유자로, 거대담론에 집착하는 작가보다 소중할 수 있다(35쪽)" 같은 글월을 읽으며 그지없이 슬픕니다. 어린이문학을 하는 분 글이 이와 같아야 하니 더없이 괴롭습니다. 아무리 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쓴 글이라 하지만, 대학생들한테 이런 글월로 어린이문학 쓰기를 가르친들 무슨 뜻이나 보람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좋은 줄거리를 담은 글월이라 할지라도 글월 짜임새나 매무새가 아름답지 못하다면 어떤 기쁨이나 참맛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3) 헌책방에 남는 책
<김종훈-어린이말 硏究>(개문사,1975)라는 책을 골라듭니다. 스물여덟 달로 접어든 아이를 하나 키우는 몸이요, 제가 하는 일은 우리 말글을 다루는 일이다 보니 선뜻 골라듭니다. 책방에 선 채 책을 한참 읽습니다. 사진도 더 찍어야 하고, 다른 책도 더 살펴야 하지만, 책 하나에 꽂히면 그만 이 일 저 일 다 잊습니다. 한참 읽는데, 41쪽에서 글쓴이가 어느 한 분 책에 나온 대목을 따오며 어깨번호를 매기는데, 아래에 적힌 풀이글을 읽으니, "白○雲, 朝鮮社會經濟史"라 되어 있습니다. 이게 뭐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피식 웃음이 납니다. 아, 그렇구나, 이 책은 1975년 책이지! 1975년이면 북녘에서 경제학자로 일하는 사람 이름을 섣불리 밝힐 수 없잖아? <조선사회경제사>가 1933년에 나온 책이라 하더라도 1975년이 어떠한 때인데. <어린이말 硏究>가 제아무리 '어린이말을 살피는 학문책'이라 하지만, 또 대학교재로 쓰는 책이라지만, 이 어둡고 무시무시한 1975년에 자칫 '백남운'이라고 다 밝혀 놓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지 않겠나. 월북작가라 하는 사람 시집을 갖고 있었다면서 남영동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책을 덮고 가늘게 숨을 내쉽니다. 북녘 작가나 학자 책이 어느 만큼 풀렸다고는 하나, 남녘은 북녘 책을 마음껏 살필 수 없습니다. 북녘책 가운데 남녘땅에서 새롭게 나오는 책은 몇 가지 안 됩니다. 북녘에서 이룬 학문 열매를 남녘에서 골고루 맛보지 못합니다. 이는 북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북녘에서도 남녘이 이룬 학문 열매를 마음껏 누리지 못합니다. 서로서로 꼭 막혔습니다. 더 멀리 본다면, 일본땅 한겨레 학문 열매이든 러시아땅 한겨레 학문 열매이든 중국땅 한겨레 학문 열매이든 서로서로 널리 나누지 못합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가 막히기만 하지 않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도 꽁꽁 틀어 싸쥡니다. 온누리에 빛난다는 한글이라고 하지만, 정작 이 한글을 알차게 가꾸거나 돌보았다는 북녘 학문 열매를 남녘에서 얼마나 알아보거나 찾아보거나 살펴볼 수 있나요. 북녘 국어사전 하나, 북녘 논문 하나 마음껏 들여다볼 수 있는가요. 북녘 국어사전이며 논문이며 잡지이며 책이며 언제가 되어야 비로소 남녘 학자나 여느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마주할 길이 열리려나요.
<제주대학교 박물관 엮음-濟州語辭典>(제주도,1995)을 고릅니다. 이 사전을 골라 책값을 셈하려니 <책밭서점> 사장님이 말립니다. "이 책 꼭 사셔야 하겠습니까? 필요하지 않으면 안 사도 되는데." "제주말을 다룬 책이라서 그냥 놓아야 하는가요?" "그건 아니고, 이 책은 좀 비싸서." "아, 그러면 저도 괜찮아요. 비싸다고 해 봐야 얼마나 비싸겠어요."
함께 고른 <지헌영-鄕歌麗謠新釋>(정음사,1947)이 비싸면 비싼 값이라 할 테지, <제주어사전>쯤은 아무 값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기는, <향가여요신석>이든 <제주어사전>이든 쉽사리 만나기 어려운 책입니다. <향가여요신석>은 오래된 책이요, 전쟁통과 난리통을 이겨내고 오늘날까지 곱게 살아남은 고마운 책입니다. <제주어사전>은 제주섬에서도 찾아볼 사람이 많지 않은 전문사전이고, 더욱이 비매품으로 나왔습니다. 아마 몇 부 안 찍었을 테지요. 쪽수는 628쪽이지만 종이가 퍽 두껍고 양장판입니다. 비매품으로 하더라도, 또 제주도에서 지자체 살림돈으로 내놓은 책이니만큼, 편집을 더 알차게 여미고 종이와 제본에 마음을 쏟아 가볍고 작은 판으로 묶었다면 한결 보기에 좋으면서, 제주사람이거나 뭍사람이거나 곁에 놓고 제주말을 돌아보는 좋은 낱말책으로 삼을 만하지 않았겠느냐 봅니다. 무척 땀을 들이고 마음을 들여 엮은 <제주어사전>인데, 비매품으로 조용히 나와 몇몇 사람들 책꽂이에만 얌전히 꽂히도록 하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섬읫절] 바닷가 가까이에서 이는 물결
[말베삽다] 말이 재고 거볍다
[벨진밭] 별이 떨어진 밭이란 뜻으로, 넓고 기름진 밭
[에비딸] 아버지와 딸
[찰리] 자루. 헝겊 따위로 기다랗게 만든 큰 주머니
<공진석-옛책, 그 언저리에서>(학민사,1991)를 만납니다. 이 책은 1994년에 서울 신촌 <공씨책방>에서 <공씨> 사장님이 선물로 한 권 주셔서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을 헌책방에서 이렇게 또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누군가 한 권 이 책을 사서 읽어 주었구나 하고 생각하며 책값을 치르는데, <책밭> 사장님이 한 말씀 합니다. "이 책 어디에서 찾았어요? 나도 예전에 읽었는데 한참 찾아 보아도 안 보이던데." "어, 저기 잘 보이는 자리에 얌전히 꽂혀 있던데요."
책방 임자이건 책손이건, 눈에 잘 보이는 책은 언제나 눈에 잘 보이지만, 눈에 안 보이는 책은 노상 안 보입니다. 바로 코앞에 꽂혔어도 못 보고 지나치기 일쑤입니다. 그나저나, <옛책, 그 언저리에서>를 사서 읽은 분은 바로 <책밭> 사장님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사장님이 갖고 있어야 할 책은 아닌가요?" "됐수다, 난 다 읽었어요."
열여섯 해 앞서 이 책을 선물받고 여러 차례 되읽고 또 읽으며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참 좋다고 생각하니 자꾸자꾸 되읽겠지요. 1991년에는 학민사에서 고맙게 '헌책방 일꾼 목소리'를 책으로 내주었는데, 앞으로 또 어느 출판사에서 헌책방 일꾼 목소리를 고스란히 책으로 내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 그 흔한 고졸 학력도 못 되는 나에게는 분명히 팔자에 없는 선생님이라는 소리도 간지럽게 듣게 될 것이고, 여태껏 막노동이나 진배없는 수입에 비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또 몰라 혹시 인기가 좋으면, 조그마한 도매상이 왕성한 문어발 모양으로 여기저기 분점을 내다가 도매상으로 대형화하듯, 그룹제 몇 개 만들어 놓고 분주히 싸돌아 다니다가 그런대로 마땅한 학원도 차리던 사람도 있더라마는, 우선은 외견상으로 남보기에도 그렇고, 글도 써 볼 차분한 시간도 생길 것이고, 잘하면 비교적 오래 머물 수 있는 안정된 것이기도 하여 식성도 좋게 두 군데를 전부 맡기로 하였다. 그런데 막상 해 보니깐 처음부터 깜깜 절벽이었다. "선생님, 스위트 피이가 어느 달에 피나요?" 스위트 피이? 일찌기 그런 꽃구경을 했는지 안 했는지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가 없지만 이름은 분명히 처음 들어 본 것이니 어느 달에 피는 것이야 더더구나 모를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이런 판국이니 시쳇말로 아닌게 아니라 처음부터 스타일이 팍 구긴 것이었다 .. (106쪽)
<공씨책방>을 처음 연 공진석 님은 <옛책, 그 언저리에서>라는 책에서 당신 삶과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놓습니다. 어느 샛장수 이야기를 하면서 "어쩌다 근사한 책을 무더기로 사면 (청계) 6가 인도 위로 몇 차례나 오토바이로 오르락내리락 내달리며 그곳 고서적상들의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다. 이송의 전성시대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러기를 4년, 드디어 헌책방을 그럴사하니 차렸다. 이송은 목에 깁스를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목에 힘을 줄 만도 했다. 그런데 말이다. 한 달 남짓만에 그의 말대로 요절나고 말았다. 세 번째로 다가온 무재수는 자신의 죽음이었다. 장가도 가야겠다고 하더니 뇌졸증이라나. 참으로 박복한 친구(182쪽)"라고 읊조리는데, 아닌게 아니라 공진석 님 또한 '좋은 책을 잔뜩 장만해서 시내버스를 타고 당신 일터로 돌아가는 길'에 그만 억 하고 쓰러져서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공진석 님은 '목에 힘을 줄 만'도 한 가운데 당신 헌책방을 알뜰살뜰 북돋울 수 있었으나 1990년 7월 26일에 '샛장수 이송' 님 뒤를 잇습니다.
저승나라에서 당신 글이 책으로 묶여 나온 줄을 아시기나 할까요. 그날 그곳에서 그 무거운 책짐을 쉰 줄 나이에 낑낑대며 들고 돌아가지 말고, 택시라도 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홍제동에서 광화문까지 얼마나 멀다고, 아니 얼마나 가까운데 무슨 택시를 타겠느냐 여기며, 늘 그러하듯이 으레 버스를 탈 뿐이고, 그때 그곳에서 심장이 억 하고 멈출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책 끝자락에는 시인 정호승 님이 붙인 '기림글'이 있습니다. 이 기림글 이야기는 오래도록 두루 퍼졌습니다만, 이 기림글에 적힌 이야기를 잘 헤아리거나 삭이는 사람은 아직 얼마 없습니다.
.. 공 선생이 나에게 준 가르침을 하나 든다면 "책을 내어도 헌책방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책을 내어야 한다"는 그 말씀을 먼저 들지 않을 수 없다. "좋은 책이라야만 헌책방에 꽂힐 수 있다. 헌책방에 꽂혀 있을 정도의 책이 아니면 아예 내지를 말라"는 공 선생의 그 말씀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가르침이다. "저는 생명이 긴 책이라야 헌책방에 꽂힌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헌책방 서가에 꽂힐 수 있는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 인생도 헌책의 생에처럼 헌책방 서가에 마지막까지 꽂힐 수 있는 그런 부끄럼없는 인생이 되고 싶습니다." .. (286쪽)
다시금 이 책을 읽으며 곱씹습니다. 그동안 <공씨책방>을 드나들며 찍은 사진을 그러모아 마땅한 출판사를 알아보고는 이 책을 되살려 줄 수 있겠느냐고 문을 똑똑 두들겨야 하지 않을까 하고.
(4) 좋은 책은 고맙게 읽습니다
제주섬 헌책방 <책밭서점> 사장님은 이야기합니다. "(성읍) 민속마을은 마음에 안 들어. 다 먹을거리판이잖아. 먹을거리판은 마을 변두리로 좀 보내고, 마을은 진짜 민속마을답게 해 놓아야 하는데. 마을에서 문화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는데." 제주섬 조그마한 마을 한켠에 많이도 아니고 꼭 세 군데쯤 헌책방이 문을 열 수 있다면, 이 조그마한 마을을 '헌책방마을'로 삼아 조촐하게 책삶과 책문화를 나눌 만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보탭니다.
그래요, 꼭 세 군데 헌책방만 있어도 얼마든지 헌책방마을입니다. 헌책방거리이든 헌책방골목이든 헌책방이 수십 수백 군데가 있어야 하지 않아요.
헌책방이든 새책방이든 도서관이든 제대로 깊이 즐긴 분이라면 누구나 알 테지요. 책방이든 도서관이든, 이곳에 깃든 책을 알뜰히 맛보거나 즐기거나 껴안자면 하루를 꼬박 새워도 모자랍니다. 아니, 하루 만에 이 책방에 깃든 책을 맛보려 한다면 우스꽝스럽지요. 터무니없습니다. 몇 날 며칠 눌러앉아 살피고 읽으며 넘기더라도 '조그마한 헌책방 한 곳'이 품은 책을 샅샅이 읽어낼 수 없어요.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세 군데 헌책방쯤 되면 두어 주쯤 넉넉히 '다른 데는 아예 가지도 않는 가운데' 찾아와서 책을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책을 조금 훑었다'고 말할 만합니다.
문화란 다른 무엇이 아니요, 책 또한 어떤 무엇이 아닙니다. 문화를 사랑하거나 아끼는 길은 큰돈을 들여 때려짓는 건물로 이룰 수 없습니다. 삶을 밝히거나 북돋우는 길은 으리으리한 공연장이라든지 거룩하거나 높은 이름값에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소노 아야코(曾野綾子)/홍윤숙 옮김-속·누구를 위해 사랑하는가>(가톨릭출판사,1973)를 집어듭니다. <누구를 위해 사랑하는가>는 두 번 사서 두 번 읽었는데, 이 책이 속편으로 하나 더 나온 줄은 까맣게 몰랐습니다. 간기를 보니 속편 첫판은 1973년 9월에 나왔습니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 <누구를 위해 사랑하는가> 간기를 뒤적입니다. 첫 권은 1973년 6월에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 속편은 고작 석 달 뒤에 나왔군요. 그렇지만 저는 이제껏 속편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이런 책이 있었음을 이제야 압니다. 소노 아야코 님 책을 꽤 많이 찾아내어 읽었다고 생각했으나,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새삼 뉘우칩니다. '그래, 나야 한글판만 찾아 읽지만, 한글판으로 나오지 못한 당신 책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읽었다는 말은 섣불리 꺼낼 수 없어. 얼핏 보았다고만 말해야지. 아니, 이름은 안다고 말해야 옳으려나.'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만들어 내는 힘이며, 무능력한 것은 사랑을 만드는 능력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 것은 에리히 프롬의 말이지만, 사랑을 만드는 능력을 갖는 일은 괴롭고, 때로는 꼬르베 신부님처럼 그것을 위해 죽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역시 사랑이 없다면, 인간은 이 세상을 살았다고 할 수 없으며, 죽음을 대상으로 할 만큼의 쾌감-정당하게 말하자면 기쁨-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 (머리말)
좋은 책은 고맙게 읽어야겠습니다. 좋은 책방은 고맙게 찾아들어야겠습니다. 좋은 말씀은 고맙게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좋은 이웃은 고맙게 사귀어야겠습니다. 좋은 만남은 고맙게 아로새겨야겠습니다. 좋은 넋은 고맙게 건사해야겠습니다. 좋은 글은 고맙게 적바림해야겠습니다.
<책밭서점> 사장님한테서 사진쟁이 김영갑 님 옛날이야기를 듣습니다. 사장님이 겪거나 마주한 김영갑 님 이야기를 글로 옮겨적어도 될까 하고 여쭈었더니 '그냥 가슴에만 담아' 주었으면 하고 말씀합니다. 입은 무거울는지 모르나 손이 가벼운 제가 이 이야기를 글로 안 옮겨적을 수 있을까 모를 노릇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수첩에만 살짝 적바림해 놓고 잊기로 합니다. 사진을 사랑하고 아끼는 매무새로 살아가며 온몸을 사진에 바치고 말아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사진을 오히려 더는 못 찍고 만 발자국을 곰곰이 되새깁니다. <책밭> 사장님은 '책을 안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 책이든 책 좀 읽어 주었으면 싶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하더라도 책 좀 덜 읽어 주었으면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온누리에는 좋은 책이 참 많고, 좋다는 책은 나날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아니, 새로 태어나는 책치고 안 좋을 만한 책이란 따로 없겠지요. 우리가 읽은 책도 많고, 읽을 책도 많으며, 읽지 못한 책이나 읽지 못할 책도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한테 주어진 삶도 많다(길다) 할 만합니다. 기껏 한 해를 더 살고 숨을 거둔다고 하는 짧은 삶일지라도 이 한 해란 짧지 않습니다. 긴 삶입니다. 앞으로 스무 해나 마흔 해나 예순 해를 더 살아간달지라도 이 스무 해나 예순 해는 길지 않습니다. 아주 짧습니다. 한결같이 고마우며 좋은 하루요 내 삶입니다. 이 내 삶을 고맙게 받아안으며 즐거이 누릴 수 있는 책읽기라 한다면, 이 책읽기는 시나브로 삶읽기로 녹아들겠지요. 이러는 동안 삶읽기는 저절로 책읽기로 옮아갈 테고요. <책밭> 사장님은 아침에는 밭 갈고 저녁에는 책방 문을 여는데, 도시에서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이 <책밭> 사장님처럼 살아가기는 힘들 터이지만, 돈을 더 많이 버는 일을 좀 줄여 손수 땅을 일굴 겨를을 내는 한편, 내 살붙이랑 동무랑 이웃이랑 오순도순 어울릴 짬을 늘린다면 이 나라는 천천히 알맞춤한 크기와 모양새로 아름답게 다시 태어나지 않겠느냐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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