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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400여 명은 지난 15일부터 현대차 제1공장을 점거한 채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400여 명은 지난 15일부터 현대차 제1공장을 점거한 채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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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남 남해에는 네 손가락의 목수가 있었다

그의 부모님은 장애인이면서 빈농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기어 다니다 방안에 있던 화로에 두 손을 담그고 말았다. 열 손가락 중 6개가 화상으로 눌어붙었다. 양 손 중 검지 두 개와 엄지 두 개만 움직일 수 있었다.

손이 불편한 아버지는,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엄마를 만나 결혼했다. 경남 남해에서 장윤석, 장윤철 두 아들을 낳았다. 두 아들에게 아버지는 "인간 승리의 전형"이었다. 장애가 있었지만 손가락 네 개로 목수 일도 거뜬히 해냈다. 옆 동네 사람들이 일을 맡길 정도였다. 두 아들은 아버지를 보며 생각했다.

"아버지처럼만 살면 되겠구나. 그러면 못할 게 없구나."

형 장윤석이 6학년일(1990) 때 아버지는 혈액암에 걸렸다. 솜씨 좋았던 그 눌어붙은 손가락부터 잘라내야 했다. 다음에는 손목을, 그 다음에는 팔을 절단했다. 더 이상 잘라 낼 팔이 없을 때, 아버지는 목숨을 내놔야 했다.

손이 불편했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다리가 불편한 엄마는 두 아들을 이끌고 남해를 떠나 울산으로 왔다.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이사를 10번 했다. 전쟁 같은 세월이었고, 피난민 같은 삶이었다.

[#2] 형 장윤석의 인생 - "약장사, 배달, 530시간 노동...그래도 가난했다"

형제 장윤석과 장윤철은 2년 차이가 난다. 장윤석이 고교 3학년 때 취업을 나갔다. 엄마와 동생을 책임져야 했다. 첫 직장은 울산 현대중공업 내 하청기업에서 일했다. 시급이 2400원이었다. 하루 10시간을 일해도 월급이 70만원을 겨우 넘었다.

가진 건 없었고 '가방끈'은 짧았다. 동생과 엄마를 벌어서 먹여야 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별 일을 다 했다. 피자와 자장면을 배달했다. 전국을 돌며 약장사도 했다. 노인들을 모아 놓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별 효과도 없는 약을 팔았다. 죄책감이 없지 않았지만, 당장 자기 배가 고팠다.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난 15일부터 현대차 제1공장을 점거한 채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난 15일부터 현대차 제1공장을 점거한 채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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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벌어도 현대공고를 졸업해 대학에 간 동생 한 학기 등록금을 댈 수 없었다. 동생이 대학을 자퇴한 날 형은 혼자 울었다. 동생은 군대에 갔다. 살아 계실 때, 아버지는 늘 말했다. 남자는 군대에 가야 한다고. 손 장애 때문에 친구들처럼 군대에 가지 못한 일종의 콤플렉스였다. 아버지의 꿈을 동생이 이뤘다.

사실 형도 군대에 가려 지원했었다. 신체검사도 1등급이었다. 공장에서, 그리고 약장사로 전국을 뛰며 다져진 체력이 아닌가. 하지만 병무청 관계자는 형 장윤석에게 훈계하듯 말했다.

"엄마는 장애인, 동생은 학생, 집은 기초생활수급권자... 이렇게 가난한데 어떻게 군대에 오려고 해? 돈이나 벌어! 열심히 일해서 엄마랑 동생 먹여 살려!"

장윤석은 그 때 처음 알았다. 너무 가난하면 군대도 못 간다는 것을. 그렇게 아버지 꿈을 대신 이뤄줄 수도 없었다. 2000년 23살 나이에 장윤석은 울산으로 돌아왔다. 광고지에서 울산 현대차 노동자를 뽑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간단한 면접을 보고 다음날 바로 생산라인에 투입됐다. 비정규직이었다. 하지만 장윤석은 비정규직이란 개념도 몰랐다. 현대차가 비정규직을 처음 채용하던 시기였다. 네 손락으로 목수 일을 해냈던 아버지를 닮아 손 기술이 좋았다. 차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 일하면 지긋한 가난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23살이었으니 체력도 좋았다. 월 380시간을 일했다. 월급이 80만원 조금 넘게 나왔다. 그 때 낮 근무 시급이 2100원이었다. 생활이 어려웠다. 작심하고 '풀 코스' 노동을 했다. 잔업, 철야, 주말 특근 등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한 달 동안 총 530시간 넘게 일했다. 월급이 나왔다. 160여 만원이 전부였다.  

그 때 같은 생산라인에서 똑같이 일한 정규직의 월급은 400만원이 훨씬 넘었다. 장윤석은 개념을 알 수 없었던 비정규직이 뭔지 온몸으로 깨달았다. 세상의 차별도 알아갔다. 노동조합에서 활동을 했다. '노조'의 '노'자도 몰랐던 그는 동료들을 설득해 노조에 많이 가입시켰다. 어느날부터 이상한 문자가 날아왔다.

"너 죽고 싶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으니 밤길 조심해라."

사실 처음엔 무서웠다. 세상이 약자 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공장 화장실에서 남몰래 울기도 했다. 대학 등록금 못 내준 동생, 몸이 불편한 엄마, 노조 가입해 고생하는 동료들이 생각나 펑펑 울었다.

[#3] 동생 장윤철의 인생 - "노가다, 대학중퇴, 사회 차별...어쩌란 말인가"

손 장애가 있던 아버지가 팔을 조금씩 절단하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다리를 저는 엄마와 함께 처음 울산에 도착한 날도 선명히 기억한다. 엄마와 형의 고단한 삶도 지켜봤다.

현대공고에 다니던 시절부터 주말이면 공사장에서 '알바'를 했다. 힘들었지만 건축과인 자기 경력을 쌓는 것이라 자위했다. 고교 3학년인 1999년 가을 울산 현대차 공장으로 취업을 나왔다. 장윤철은 건축과였기에 일종의 '위장취업'이었다. 현대차 제1공장 도장부에서 바닥 청소 등 시키는 건 다 했다.

대학에 들어갔다. 가난한 이에게 대학은 사치였다. 1학기도 채우지 않고 그만두고 군대에 갔다. 2002년 8월 제대하자마자 형 소개로 현대차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이었다.

열심히 일했다. 일하다가 종종 실수를 했다. 정규직 형님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장윤철이 볼트를 제대로 끼우지 못하자 한 형님이 내 뱉었다.

"넌 그렇게 일을 못하니까, 비정규직이야! 그것도 못하면서 무슨 차를 만든다고..."

장윤철은 "형님이 한 번 해보라"고 공구를 건냈다. 형님도 똑같은 실수를 했다. 굳이 그날 일이 아니어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기술, 능력 차이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의 차별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울산 태화강 보다 넓은 간극이 있다는 걸 각인시켰다.

몇몇 정규직 형님들은 장윤철에게 말을 함부로 하며 하대를 했다. 얼마 뒤 장윤철보다 어리고 경력도 없는 정규직이 입사했다. 형님들은 신입 정규직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경우가 없다. 궂은 일, 험한 일 그리고 지저분한 일은 장윤철 몫이었다.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400여 명이 지난 15일부터 현대차 제1공장을 점거한 채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400여 명이 지난 15일부터 현대차 제1공장을 점거한 채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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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결혼을 했다. 얼마 뒤 돈이 필요했다. 은행 대출 창구를 찾았다. 은행 직원은 "근속 연수가 1년이 안 된다"며 대출 불가를 말했다. 경력이 5년인데 무슨 소린가. 문득, 자신이 소속된 파견업체가 폐업하고 사장이 바뀐 몇 개월 전의 일이 생각났다.

5년을 일해도 8년을 일해도 경력 인정이 안 되는 현실이 서러웠다. 갓 들어온 정규직이 똑같이 일하고도 5년 일한 자신이 결코 받아낼 수 없는 월급을 받았을 땐 억울했다. 서럽고 억울하고 답답해 눈물도 났다. 울다보니 예전 22살 여대학생과 소개팅 하던 날이 생각났다. 여대생은 카페에 앉아 마자 물었다.

"현대차 정규직이에요? 비정규직이에요?"

비정규직이라고 답했다. 이게 대화의 전부였다. 답을 듣자마자 여대생은 자리를 떴다. 비정규직이라 생산라인에서는 차별받고, 월급봉투는 차이가 나며, 사회에서는 무시를 당했다.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라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열심히 일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 싫었다. 때마침 대법원에서도 "2년 이상 사내 하청업체에서 근무한 비정규직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형과 함께 비정규직 노동조합에서 활동했다.

세월이 흘렀다. 고3이던 1999년 현대차 제1공장으로 처음 취업 나와 바닥 청소할 땐 미처 몰랐다. 11년 뒤인 2010년, 바로 그곳에서 점거 농성을 하게 될 줄은.

[#4] 형제 현대차 제1공장 점거 - "사원증 없이는 죽어도 못 나간다"

지난 11월 15일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제1공장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 형 장윤석은 동생에게 "같이 들어가자"고 말했다. 동생은 형의 제안이 아니어도 이미 그렇게 결심하고 있었다. 형제는 함께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 같이 굶고, 함께 추위에 떨며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고 있다.

장윤석의 경력은 10년이고, 동생은 8년이다. 장윤석은 10년 전 처음 공장에 들어왔을 때 열심히 일하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8년 전 동생과 함께 일을 시작했을 땐 둘이 같이 벌면 좋은 미래가 다가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형제를 믿음을 져버렸다. 아무리 일해도 가난과 차별은 달라지지 않았다.

형제와 24일 오후 캄캄한 현대차 제1공장에서 마주 앉았다. 사측은 이미 전기를 끊었다. 형제에게 "왜 둘이 함께 올라왔냐"고 물었다. 형이 답했다.

"10년을 일했습니다. 월 500시간을 넘게도 일해 봤습니다. 그래도 가난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습니다. 뭔가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갓 들어온 정규직은 10년 일해 온 내가 도저히 받아낼 수 없는 월급을 받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하고 차별을 받습니다. 기자님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습니까?"

장윤석은 울컥했다. 눈을 훔치며 잠시 자리를 떠났다. 동생 장윤철은 "형은 자기 때문에 동생인 나까지 고생하고, 엄마도 마음 아파한다며 미안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윤철은 "처음 농성을 시작할 때 동료가 '형이 들어가니 넌 빠지라'고 제안했었다"며 "하지만 이건 형 일이자, 내 일이기 때문에 같이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장윤철에게는 3살 딸과 8개월 된 아들이 있다. 장윤철의 아내는 '현대차 비정규직 가족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한다. 엄마와 아내가 전화를 해 안부를 물으면 "잘 지낸다"고만 답한다. 눈물을 수습한 장윤석은 돌아와 "나 때문에 동생은 이산가족이 됐고, 몸이 불편한 엄마는 마음 고생을 하고 있다"며 자책했다. 동생 장윤철은 "내 일이고, 내가 선택한 농성"이라고 형의 말을 막았다.

장윤석은 "죽어도 그냥은 안 나간다"고 말했다. 동생 장윤철이 웃으며 "공권력이 밀고 들어오면 어쩔 건데?"라고 물었다. 형은 "쇠사슬로 몸 칭칭 감고 천장에 매달릴 것"이라며 "사원증 주지 않으면 날 죽여야만 이 공장 밖으로 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동생이 분위기를 전화하려는 듯 "우리 형 차 진짜 잘 만든다"고 말했다. 형은 "회사가 비정규직이라고 나를 이리 저리 돌리는 바람에 이제 차 한 대는 나 혼자서도 만들 수 있다"며 손을 펼쳐 보였다.

울산 현대차 제1공장을 점거한 채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장윤석(가명. 33)의 손.
 울산 현대차 제1공장을 점거한 채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장윤석(가명. 33)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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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을 보며 상상해봤다. 옆 동네 사람들의 물건까지 뚝딱 만들어 두 아들의 가슴 속에 "아버지처럼만 살면 되겠다"는 생각을 심어준 어떤 남자의 눌어붙은 손을 말이다.

각각 33년, 31년을 살아온 형제는 단 하루도 정규직이었던 적이 없었다.

[#5] 울산 현대차 공장 밖 - 엄마와 아내는 거리로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58세 여인은 요즘 저녁이면 울산 현대차 공장 앞으로 나와 촛불집회에 참석한다. 비정규직 두 아들은 정문에 쌓인 컨테이너 박스 일명 '몽구산성' 너머에서 점거 농성을 하고 있다. 두 아들을 돕는 일이 촛불을 들고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는 것밖에 없어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3살 딸과 8개월 된 아들을 둔 30대 초반의 한 여인은 요즘 아침 7시면 현대차 공장 정문 앞으로 온다. 출근하는 노동자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며 "비정규직 철폐하자"고 말한다. 그녀의 남편은 '몽구산성' 너머에서 형과 함께 공장점거 농성을 하고 있다.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가족들이 공장앞에서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가족들이 공장앞에서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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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현대차,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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