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가을 문턱으로 들어서나 했는데, 벌써 가을이 저물고 있다니. 가을을 제대로 느껴보기에도 앞서 찬바람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구멍 송송 뚫린 가을이 너무 짧다. 저만치 사람들 발길에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있는 바싹 마른 갈빛 낙엽을 오래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시인들 이름과 그 시인들이 앞서가니 뒤서거니 펴낸 시집들이 스친다.
시인 박몽구가 가을 문턱에 펴낸 <수종사 무료찻집>과 시인 양문규가 9월 끝자락에 펴낸 <식량주의자>, 부산과 김해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인 박언지가 초가을 들머리에 펴낸 <갯벌에도 집이 있다>가 그 시집들이다. 글쓴이가 이 시집 세 권을 한꺼번에 소개하는 것은 이들 시인들 시세계가 비슷하다거나 같은 고향이라서가 아니다.
그저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게으름을 피운 탓에 이 세 시집을 받아놓고도 한동안 제대로 읽지 못하다가 저무는 가을이 되어서야 마치 밀린 숙제를 하는 것처럼 읽은 탓이다. 그렇다고 대충대충 읽었다는 말은 아니다. 글쓴이는 서로 찬 손을 가락지 끼고 뒹구는 낙엽을 밟으며 깊은 사색에 빠져드는 연인처럼 그렇게 지난 주 내내 이 세 시인들이 쓴 시에 포옥 빠져 있었다.
이들 시인들이 태어난 곳은 모두 다르다. 박몽구 시인은 광주이고, 양문규 시인은 충북 영동이다. 박언지 시인은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이들 시인들 시세계도 조금씩 다르다. 박몽구는 기교와 주제가 둘이 아니라 한몸인 시를 쓴다. 양문규는 아버지를 통해 지난날과 나아갈 길을 묻고 있으며, 박언지는 일상생활을 통해 시란 옷을 새롭게 깁는다.
'말의 비수'는 내뱉은 자에게로 되돌아간다
"시는 언제나 늪의 시간을 함께 견뎌주고, 산 넘어 먼 데를 보여준다. 시단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의 설레임을 되새긴다.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날들을 기억하며, 새롭게 시 앞에 앉는다. 기교와 주제가 둘이 아니라 한몸을 이룬 시를 위해 오늘도 부단하게 정을 들이댄다"-'시인의 말' 몇 토막
박몽구 시인이 2008년 3월 끝자락에 펴낸 12번째 시집 <봉긋하게 부푼 빵>에 이어 2년 만에 13번째 시집 <수종사 무료찻집>(시와문화)을 펴냈다. 이 시집에는 문학평론가 한명환이 콕 집어 말한 것처럼 콘크리트 믹서기 소리로부터 거리 행렬들 외침소리, 확성기 소리, 풀꽃과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 가난한 음악가 선율이 새록새록 숨 쉬고 있다.
제1부 '오이도에는 섬이 없다'에 따개비처럼 붙어 있는 '빈 들' '펭귄은 울지 않는다' '수채를 뚫으며' '과녘' 등 13편, 제2부 '몽상가들'에 쪼그리고 앉은 '청계산 가는 길' '귀가 뭉개진 관음보살' '마른 비' 등 16편, 제3부 '영혼의 칼 한 자루'에 촛불을 지피고 있는 '수종사 약사전' '꼬막네' '라면 박스 아파트' 등 15편, 제4부 '옛집 꽃담 사이로'에 드러누운 '나의 행방불명' '붕어찜' '장항선 옛 기차길' '춘천 가는 길' 등 15편을 더한 59편이 그것.
낮고 어두운 데 숨은 것들아 다 엎드려라
한번도 제 길을 비켜간 적 없는 칼 하나
소문의 벽을 향해 날아가지만
남의 말이라곤 귀담아듣지 않아
과녘이 되어줄 사람들 모두 사라질 때
부메랑이 되어 제 목숨을 노리며 되돌아오는
철칙을 아는가 - '과녘' 모두
시인 박몽구는 '과녘'이란 시에서 요즈음 사람들이 그야말로 뜬금없이 내뱉는 '말의 비수'에 눈길을 멈춘다. 사람들이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없는 말 있는 말' 섞어가며 마구 씹어 돌리는 '말의 비수'는 처음에는 그저 내뱉어지는 그대로 날아가지만 언젠가는 그 '말의 비수'를 내뱉은 자에게로 다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이치는 뿌린대로 거두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시인은 "마이크를 독점한 채 외계로 실려 보낸 말들 / 부메랑 되어 돌아올 때 / 쓰디쓴 독배를 피할 수 없는..."(복화술사) 세상에 서서, "어두운 골목을 돌아나오는 메아리처럼 / 출구가 막힌 말들만이 떠도는"(오답을 찾아서) 그런 세상에 서서 "내 안에 숨은 지팡이를 꺼내 / 어두워진 하산길 더듬"(마른 비)고 있는 것이다.
시인 박몽구는 1956년 광주 송정에서 태어나 1977년 월간 <대화>에 시 '영산강'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묻는다> <거기 너 있었는가> <십자가의 꿈> <끝내 물러서지 않고> <어느날 극장을 나오며> <서울에서 쌓은 산> <자끄린느 뒤프레와 함께> <개리 카를 들으며> <마음의 귀> <봉긋하게 부푼 빵> 등이 있다. 시론집으로는 <김현승론> <고은 초․중기 시의 단절과 극복> 등이 있으며, 2005년 <한국출판평론상>을 받았다.
그때 아버지 나이 되어 아버지에게 바치는 시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지 10여 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동안 부모님 집을 비롯하여 고향의 농막, 중화사, 영국사를 거쳐 여여산방에 이르게 되었다. 어느 한곳 가족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어느덧 지천명, 어제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음에도 나는 아버지로서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 -'시인의 말' 몇 토막
고향인 충북 영동 천태산 영국사에 있는 천 년 묵은 은행나무(천연기념물 223호)를 지독히도 사랑하고 있는 시인 양문규가 네 번째 시집 <식량주의자>(시와에세이)를 펴냈다. 지금 그때 아버지 나이가 된 시인이 그때 아버지와 밥을 그리고 있는 이번 시집은 지난 2005년 가을에 펴낸 세 번째 시집 <집으로 가는 길>을 펴낸 지 5년 만이다.
모두 4부에 실려 있는 '홍시' '시래깃국' '아버지의 감나무' '아버지의 연장' '아버지의 아침' '밥주머니' '오래된 밥상' '도둑고양이' '들길' '천태산에는 영국사가 없다' '늙은 탱자나무' '거기, 봄 있다' '망초꽃' '오래된 집' '쥐똥나무' '핫, 수상한 시절' '바퀴벌레는 바퀴를 먹는다' 등 59편이 그것.
햇살도 터져 내린 늦가을 저녁
찬 서리마저 핥아 빨아먹고
그렁저렁 한 주먹 살이 된
아, 늙은 아버지
아스라이 감나무에 매달려 있다 -'홍시' 모두
시인 양문규가 이번에 펴낸 새 시집은 아버지에게 바치는 시집이라 잘라 말해도 결코 빗나간 말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 나이가 되어 그때 아버지 삶과 지금 아버지 삶을 시란 실타래로 엮으며 스스로와 이 세상살이를 비춘다. 어쩌면 시인이 지금으로부터 10년 앞 까닭도 없이 무조건 고향 앞으로 내려간 것도 아버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 60% 속에 아버지란 세 글자가 빠지지 않는다. '아버지는 다랑이논을 갈고 있었다'(곡우),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시래깃국), '아버지의 손과 발이 되어주던 연장들'(아버지의 연장), '아버지는 저 매미소리와 함께 담장을 넘어왔다'(능소화 시절), '아버지는 낡은 타이탄 트럭 몰고'(어정칠월) 등이 그런 시들이다.
시인 양문규는 1960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1989년 <한국문학>에 시 '꽃들에 대하여' 외 1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이 있으며, 평론집으로는 <풍요로운 언어의 내력>을 펴냈다. 지금은 계간 <시에>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생활이 곧 시이며 시가 곧 생활이자 희망이다
"詩(시)를 쓴다는 것은 / 일상의 생활 속에서 / 보고 듣고 느끼는 감정에 / 옷을 입히는 일이라 생각되어진다. 詩란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는 / 끈질긴 몸짓으로만이 /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이제는 멀리만 느껴지는 / 詩의 강을 건너가고 싶은 심정이다."-'책머리에' 모두
고향 이웃사촌인 부산과 고향인 김해에서 활발하게 있는 시인 박언지가 두 번째 시집 <갯벌에도 집이 있다>(도서출판 일광)를 펴냈다. "생활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감정"으로 시를 쓴다는 시인이 펴낸 두 번째 시집은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주춧돌로 삼아 이 세상살이를 새롭게 들추고 있다.
모두 4부에 실려 있는 '속눈썹 사이로' '생선회를 먹으며' '디지털 파마' '거울 앞에서' '가지산이 내려오다' '마무들은 물결을 어루만지며' '들국화' '하늘에는 별이 없었다' '길 떠나는 바람에게' '태종대 자갈마당' '가나다라 마바사' '창밖 이야기' '이천동 석불 앞에서' '사물놀이' 등 69편이 그것.
자갈치에 가면
생굴 까는
아낙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굴을 까다 말고
굴 하나
바닷물에 흔들흔들 흔들어
"요즘 굴이 제철이라 예"
나그네 입에다 쏙 넣어준다 -'생굴' 몇 토막
박언지 시인은 몇 해 앞 글쓴이와 사이버공간에서 만나 가끔 안부게시판에 글을 올려 안부를 묻고 나누는 시인이다. 그렇다고 박 시인이 사이버 시를 쓴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가 쓰는 시는 그와는 반대로 오프라인 세상에서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이웃과 살가운 정을 나눈다.
'갯벌에는 / 희망을 짓는 집이 있다'(갯벌에도 집이 있다)라거나 '산다는 것은 / 파닥거리며 사는 맛'(생선회를 먹으며), '거죽만 화려한 / 세상에 물들지 않는 / 갯가 여인'(갯가 사람들), '그리움을 담은 음성으로 / 부딪혀야만 / 살아가는 노래'(산사의 풍경) 등은 생활이 곧 시이며 시가 곧 생활이자 희망이라는 것을 넌지시 알려준다.
시인 박언지는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문예시대> 신인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푸성귀에 대한 명상>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강변의 추억>을 펴냈다. 부산문인협회, 샘과가람문학회, 동서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부산시인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한국가람문학상과 시마당낭송 대상 받음.
2010 가을이 저만치 긴 그림자를 끌며 아스라이 사라지고 있다. 가는 가을을 사람 힘으로는 끝내 붙잡을 수 없어 마음이 씁쓸하다. 이런 날 저녁에는 시인 박몽구, 양문규, 박언지가 펴낸 시집을 차분하게 들춰보자. 박몽구 시집에서는 물질문명이 낳은 모순을, 양문규 시집에서는 옛 기억을 통한 현재와 미래를, 박언지 시집에서는 갯벌에도 있다는 그 희망을 꼬옥 품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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