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갤러리(대표 이현숙)에서는 올해 팔순을 맞은 고 백남준, 이우환 등과 함께 한국의 대표작가인 박서보(1931~)전을 연다. 시대별로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40여 년간 '정신의 순결성'에서 '치유의 예술'까지 총 50여 점의 작품을 신관과 본관 두 곳에서 볼 수 있다.
작가는 작년 11월 말 뇌경색으로 쓰러져 건강에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다시 회복되어 요즘도 새벽 2~3시까지 작업을 할 정도로 건강이 나아진 편이라고 근황을 전한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12월 10일부터 내년 2월 20일까지 박서보전이 열리고, 조현갤러리(부산해운대구)에서도 12월 11일부터 내년 1월 30일까지 그의 회고전이 열린다.
밭갈이하듯 마음 비우는 미학
그의 첫 마디는 "그림이란 생각을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비워내는 마당"이었다. 그것을 밭갈이하듯 수신의 한 과정으로 본다. 불자가 아닌 그가 담는 것보다 비워내는 게 충만하다는 생각을 하게된 데는 어렸을 때 본 불공을 드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영감을 줬다고 말한다.
서양이 채우기를 중시하는 '더하기의 미학'이라면 동양은 비우기를 중시하는 '빼기의 미학'이다. 박서보화백은 이런 면에서 매우 동양적이다. 그의 그림은 세월에 갈수록 더욱 단순해진다. 그의 그림이 40여년 꾸준히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밑바탕에 끊임없이 새롭게 비우는 정신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림 이전의 그림'으로 돌아가기
그의 추상화는 '그림 이전의 그림'이라고 할까. 쓰고 지우고, 바르고 굵어내고, 채우고 비우고, 쌓고 덜어냄으로 기존의 관념과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이리라. 무심의 경지로 돌아가 사물을 보고 인간을 생각하는 그림을 최고로 친다. 그리고 1989년 이후부터는 손맛 나는 한지를 그의 작업에 본격적으로 도입한다.
그렇다고 그가 고리타분한 작가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가 바로 '반국전'을 선언한 장본이다. 그는 60년대 당시 유럽에서 일고 있는 앵포르멜(비구상)을 추상단색화로 재해석하여 한국미술의 현대화에 힘쓴 전위작가이기도 하다.
모든 걸 흡입하고 포용하는 한지의 매력
그는 자신의 몸을 드럼세탁기에 비유한다. 그가 이 세상에 본 것, 느낀 것, 생각한 것, 경험한 것, 맛본 것 등 모든 것을 숙성하는 술처럼 드럼세탁기에 담아두었다가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한꺼번에 쏟아내고 비워낸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한지도 드럼세탁기와 비슷한 원리다. 숨을 쉬는 한지는 이 세상의 모든 걸 흡인지처럼 빨아들인다. 약간 과장하면 사계절은 물론 시대의 정신과 인간의 마음까지도 빨아들이지 않을까 싶다. 그가 그렇게 한지에 애착을 가지는 이유이리라.
단순화의 극치는 '그리기'가 아니라 '쓰기'
그는 모든 작품에 '묘법(Ecriture 에크리튀르)'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묘법이란 그리기가 아니고 쓰기라는 프랑스어이다. 이 개념은 '쓰기(글씨)'가 어느 순간에 '그리기(그림)'가 된다는 추사의 예술혼과 통한다. 10월의 김창열전에서도 그랬다. 대가들은 역시 잘 통한다.
모 주간지에서 묘법을 박 화백은 "초등학교 2학년인 형의 국어노트를 가지고 격자마다 글자를 써 넣다가 글자가 칸 밖으로 튀어 나가니까 고무로 막 지우는 거예요, 그런데 지우는 기술이 없어서 잘 못 지워 종이에 빗금으로 막 그어 대는 거예요, 그리는 것을 체념한 것이죠, 그때 깨달았어요, 바로 저거다"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따뜻한 정감이 흐르는 행복한 색채
추상화 작가로서 색채를 중시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2000년에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2000년 칠순을 맞아 일본 도쿄화랑에 초대전을 받으면서부터다. 평생 노는 것과는 거리가 먼 그가 일본화랑에 단풍철에 맞춰 전시를 열면 어떻겠냐고 요청해 성사된다.
이렇게 해 전시기간 중 일본단풍의 절정을 보게 된 박서보화백은 자연이 내는 색의 아름다움이 이 정도인지 몰랐다며 자신의 편협함을 고백하고 색채를 그의 작업에 적극 도입한다. 세상에서 검은색을 가장 아름답게 그린다는 자부심을 이번에는 색채에 적용하여 그만의 독창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의 색채는 위에서 보듯 너무 차거나 뜨거운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고 편안한 수없이 만지고 쓰다듬어 만들어낸 색이다. 그래서 정감이 물씬 풍긴다.
그의 작업은 축제보다 더 즐거운 놀이
그는 거의 반세기가 넘도록 일요일도 없이 불철주야 하루에 13~14시간 고된 작업을 해왔다. 그렇게 하나에 몰입하는 작업이 가능한 것은 작업이 그에게 있어 축제보다 더 즐거운 놀이이자 손끝에서 일어나는 신나는 여행이리라. 이런 무심한 행위의 반복을 통해 평면회화의 차원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
보기에 따라서는 정말 따분하게 사는가 싶지만 그는 사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천재의 특징은 바로 그런 인내심에 있지 않은가. 일과 놀이, 삶과 예술이 이렇게 완벽하게 일치하는 작가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한지를 인격으로 보는 물아일체 현대화
생존 작가로서 박서보 화백은 이우환과 함께 세계적으로 주목받는다. 그는 구걸하는 성격이 아니라 외국에 잘 안 나가는 편인데 일단 외국에 나가면 반응이 뜨겁다. 그는 작업에 대한 의욕만큼 그의 작품양도 엄청나다. 여러 곳에서 동시에 전시가 열려도 그의 수장고는 일부가 빌 뿐이다.
'무념(무상)의 미술'이 서구의 '개념미술'의 대안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말한다. 이론과 말장난으로 그치는 서양미술은 쉽게 막혀버려 그리 오래 못 간단다. 그의 작품과 서구작품을 같이 걸면 서구미술이 죽는 이유란다. 개념조차 비우는 동양미술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서양미술을 구해낼 수 있다고 믿는가 보다.
그의 이런 자신감은 바로 남다른 철학에서 온다. 그는 서양과 다르게 물성의 주체성을 인정한다. 한지를 호흡하는 인격체와 생명체로 받아들여 물아일체의 정신을 현대화한다. 그는 여기에서 새로운 예술이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의 차별성이다.
정신병동 같은 21세기 문명 치유하기
그는 "21세기 사람들은 다 정신병동에 가야 할 판이다"라며 시대의 예언자처럼 말한다. 디지털이 사회를 하도 빠르게 변화시켜 이젠 정년도 30~40대로 당겨졌단다. 거기에서 낙오자가 생기게 마련인데 이건 그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줘 일본처럼 '묻지마 살인'이나 '방화'가 발생하는데, 미래미술은 이들을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작가생각만 화폭에 잔뜩 쏟아내면 관객도 덩달아 불편해지는데 작가가 마음을 비우고 작업하면 관객도 마음이 편해진단다. 개인의 창작도 시대의 산물인 만큼 미술도 이제는 어머니의 약손처럼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제 화가에서 문명비평가로 더 나아가 사회적 의사(social doctor)로 그 몫을 다하고 있다.
에스키스드로잉(1996-현재) I 초벌(에스키스)드로잉은 같은 시기에 제작된 박서보회화의 다층적 구조를 더욱 잘 살펴볼 수 있다. 일종의 건축적 밑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여러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먼저 작은 단위의 메모를 제작한 뒤 이를 바탕으로 다시 석판으로 만들어 놓은 방안지 위에 연필과 수정 펜으로 부분적 첨삭을 가해 공간의 깊이와 넓이를 조정한다. 치밀하고 정교한 그의 드로잉은 내적 완결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국제갤러리]
덧붙이는 글 | 박서보화백 홈페이지 www.parkseobo.com
국제갤러리 종로구 소격동 59-1번지 02)735-8449 www.kukjegalle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