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초 노환이 깊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왕회장'의 퇴진은 경영권 분쟁으로 이어지며 '생존 장남'격인 둘째 아들 정몽구 회장과 다섯째 정몽헌 전 현대아산회장의 투톱 체제가 가동된다. 그러나 권력은 부자간에도 둘로 나눌 수 없다고 했던가. '몽구-몽헌' 공동회장체제는 매우 불안해 보였다.
현대가(家) '왕자의 난'은 이랬다2000년 3월 14일 형제의 반목이 표면화된다. 몽구 회장이 몽헌 회장의 최측근 심복이었던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전보시키는 보복성 인사를 단행하자 몽헌 회장이 크게 반발한다. 구조조정회의를 열어 몽구 회장의 면직 발표를 하는 등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자 그달 27일 현대그룹 사장단 모임인 현대경영자협의회에서 몽헌 회장을 단독회장으로 추대하지만 형제의 싸움은 이쯤에서 본격화된다.
입원 중인 정주영 '왕회장' 앞에 언론기자들 불러 놓고 누가 공개적인 후계자냐, 누가 먼저 낙점을 받았느냐며 형제는 추태를 부렸다. 그해 5월 25일 보다 못한 '왕회장'은 계열사 지분정리 등을 단행한다. 현대의 주가는 폭락을 거듭하고 정부와 채권은행들이 나서서 지배구조개선과 경영진 문책을 요구하게 된다.
결국 왕회장과 몽구, 몽헌 두 아들 등 삼부자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왕자의 난'의 엔딩은 아직 멀어 보였다. '왕회장'이 사망하자 몽구 회장은 현대와 기아자동차, 현대차서비스 등 자동차 관련 회사를 그룹에서 분리해 나갔고, 몽헌 회장은 현대아산, 현대상선, 현대증권, 현대건설 등이 주축인 현대그룹을 손에 쥐게 된다.
몽헌 회장 자살, 현대가(家) 다섯 번째 며느리 알맹이 없는 현대그룹 수장돼뜻밖의 일이 터진다. 2003년 8월 4일 몽헌 회장이 계동 현대사옥 12층 회장실에서 투신 자살을 한다. 5억불 불법송금 사건이 터지면서 '왕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야심차게 추진하던 대북사업이 좌초 위기를 맞는다. 2002년 고 몽헌 회장은 대북송금과 비자금 150억 원 조성과 관련하여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른다.
당시 몽헌 회장의 현대그룹 사정도 좋지 않았다. 현대그룹의 상징적 기업인 현대건설이 IMF를 거치며 누적된 유동성 위기로 인해 채권단의 손에 넘어가 그룹에서 분리된 상태였다. 현대상선은 대북사업 지급보증으로 인해 일부 사업을 매각해야 하는 상태였고, 현대아산 역시 금강산 관광으로 인한 누적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왕회장'의 숙원이었던 대북사업이 흔들리는데다가 현대그룹 사정도 좋지 않은 등 악재가 겹치자 이에 따른 중압감으로 인해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왕자의 난', 불씨가 다 수그러든 게 아니었다 현대건설 인수를 두고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과 남편이 타계한 후 현대그룹을 물려받은 현정은 회장이 진검 승부에 나섰다. 시아주버니와 제수씨의 싸움이 점입가경이다. 사실상 또 다른 '왕자의 난'이 시작된 거다.
지난달 16일 채권단의 대표격인 외환은행이 현대건설의 최종인수자로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을 선택했다. 현대건설 인수금액으로 현대그룹이 제시한 인수금액은 5조5천억 원, 예상보다 4~5천억이나 높은 수준이었다. 현대 종가(宗家)의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서 일단 현대그룹이 승리한 셈이다.
그러나 경합을 벌였던 현대차그룹이 반격에 나섰다. 현대차그룹은 지난달 22일 매각 주간사와 채권단에 현대그룹 자금조달 증빙 내역에 대한 재검토를 요청하면서 자산 33억에 불과한 현대상선 프랑스법인이 1조2천억의 예금을 갖게 된 경위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또 자금난에 허덕이는 동양종합금융증권이 과연 8000억이라는 거액을 현대그룹에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란도 불거졌다.
현대건설 두고 시아주버니와 제수씨 한판 '진검 승부'이에 대해 채권단은 지난 23일 현대그룹 측에 1조2천억 원의 나티시스 은행 예치금이 어떻게 조달됐는지, 동양종합금융증권과 맺은 컨소시엄 계약에 풋옵션 조항이 있는지 등에 대해 소명을 요청했다. 현대그룹은 소명서를 통해 "동양종금 자금 8000억 원은 순수하게 자기자본으로 재무적투자를 결정한 것이며, 프랑스 나티시스 은행 1조2000억 원 역시 담보 없이 순수하게 대출받은 것"이라고 밝혔지만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국회 정무위도 현대그룹 관계자를 불러 인수자금 출처에 대해 질의를 벌인 바 있다.
현대건설 매각주간사는 "소명 요청 등 이번 조치가 선정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추후 허위나 위법 사실이 발견되면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는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이면 담보제공이나 풋옵션이 걸려있는지가 관건이다. 1조2000억 원의 예치금이 현대상선 주식이나 다른 그 룹내 자산을 담보로 제공하지 않고 정말 나티시스 은행으로부터 빌린 단순 대출금이 맞는지, 동양종금이 제공하기로 돼 있다는 8000억 원의 자금에 풋옵션이나 담보에 준하는 다른 조건이 걸려 있지는 않은지에 최종 결과가 달려있다.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주주가 1% 이상의 지분을 금융기관 등에 담보로 제공했다면 관련 내용을 반드시 공시해야 한다. 만일 주식 등을 담보로 자금을 동원한 것이라면 현대그룹은 공시의무를 어긴 위법행위를 저지른 것이 된다.
제수씨가 시아주버니 고소, 시아주버니는 제수씨 향해 인수결정 무효 주장마침내 현대그룹이 거짓 정보를 흘리는 등 입찰을 방해했다며 현대차그룹을 상대로 고소를 했다. 제수씨가 시아주버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셈이다. 그러자 현대차그룹도 현대그룹을 최종인수자로 결정한 것은 무효라며 맞서고 있다. 현대건설 노조도 채권단에게 인수 우선협상대상자 선정기준과 나티시스은행 예치금의 실체를 밝히라고 요구하며 매각 무효투쟁을 벌이고 있다. 현대증권 노조와 현대상선 소액주주들도 나티시스은행 예치금의 출처에 의혹을 제기한 바 있어 상황이 현정은 회장에게 녹녹하지 않게 전개되고 있다.
시아주버니와 제수씨의 대결은 어떻게 결말이 날까? 필자도 수년 전 중소기업을 맡아 운영하던 중 시아주버니와 형수 간에 벌어진 경영권 싸움을 경험한 바 있다. 오너의 갑작스런 죽음과 회사 주식을 차명보유하고 있던 오너 동생간에 벌어진 피 튀기는 경영권 분쟁이었다. 필자는 당시 회사의 CEO로서 생생하게 그 현장을 목도했다. 결과는 양쪽의 패배였다. 법적으로는 누가 승소를 했는지를 떠나 집안은 그야말로 '콩가루'가 되고 말았다.
남편명예와 宗家權 회복(현정은) VS 현대 재건 꿈꾸는 '생존장남'(정몽구)남편이 살아있을 때야 시집도 있고 시아주버니도 있고, 올케도 있는 법이다. 남편 죽고 나면 시댁과의 인연은 순식간에 끊어진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으나 주변의 사례를 보면 거의 다 그렇다.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자연스럽게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 근처로 옮겨 친정식구들을 의지하면 산다. 출가외인(出嫁外人)에서 몸도 마음도 본가내인(本家內人)으로 변신하게 된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던 남편 몽헌 회장을 위해서도 현대가(家)의 상징인 현대건설을 꼭 손에 넣고 싶은 게 현 회장의 심정일 게다. 현대건설을 놓친다면 현대그룹은 존립 위기를 맞게 될 가능성이 높다. 현 회장에게 현대건설은 목숨처럼 절박할 것이다.
시아주버니와 제수씨 모두 꼭 필요한 현대건설, 그러나 '현대'는 '공인(公人)'국민과 국가이익 침해하면 안돼, 난장판 싸움 되기전에 해법 찾아야현대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에게도 현대건설이 꼭 필요하다. 죽은 동생의 부인이며 더 이상 정씨 집안사람이 아닐 수 있는 현 회장에게 현대가의 상징인 현대건설을 넘겨준다는 것은 현대가(家)의 '생존 장남'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생존 장남'이기에 현대가(家)의 재건을 무겁게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시아주버니와 제수씨가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현대그룹을 재건해 죽은 남편의 명예를 되찾느냐, 현대건설 인수로 현대家를 재건하느냐를 두고 진검승부를 펼치고 있다. 어떤 쪽으로 결론이 나든 모쪼록 현대 구성원들과 국민들에게 추태를 보이지 않기 바란다. 현대, 국민이 키워준 기업이다. 사랑을 받은 만큼 '공인'으로서 성숙한 행동과 판단을 해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