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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8월17일) 오후 8시50분 하얼빈에서 출발한 기차는 이튿날(18일) 오전 9시 국경도시 단둥(丹東)에 도착했다. 12시간 넘게 걸렸지만, 지루하기보다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오후에 심양(선양)으로 이동해서 이튿날 오전 귀국하기 때문이었다.

 

단둥 날씨는 무척 쾌청했고 시원한 산들바람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한 도시여서 일제 침략의 잔재와 뼈아픈 분단의 역사 현장을 한눈에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단둥역은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산뜻했다. 박영희 시인이 최근에 지은 건물이라고 귀띔해주었다. 밖으로 나오니까 거리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우뚝우뚝 서 있고, 거리를 오가는 고급 승용차와 사람들의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오전이어서 그런지 대합실과 기차역 광장이 한산했다. 공원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모택동(마오쩌둥) 동상이 눈길을 끌었는데, 살아 있는 사람이 천하를 호령하듯, 13억 중국 인민을 경애하듯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고 있었다.  

 

모택동 동상을 보는 순간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입가에 지어졌다. 말로만 '애국!'을 부르대는 몇몇 위정자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중공군을 앞세우고 쳐들어와 김일성만큼이나 무섭고 나쁜 오랑캐로 각인되었던 모택동, 하지만, 그는 한국전쟁터로 보낸 큰아들이 전사함으로써 중국식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기도 하다.  

 

배는 고픈데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가이드가 보이지 않았다. 안내해줄 사람이 없으니 식당에는 가지 못하고 가이드를 기다리는 동안 우유와 빵으로 아침을 대신하면서 박영희 시인에게 단둥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압록강 철교로 북한과 이어진 단둥에는 한국인이 많습니다. 조선족보다 많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 북한 사람들이지요. 다른 도시에 비해 유동인구가 많은 단둥은 자그마한 무역도시이며 대련, 칭따오(靑島), 하얼빈 등으로 연결되는 열차 노선이 아주 좋습니다."

 

박 시인이 설명을 마치면서 "저는 다수의 소수민족이 모여사는 단둥을 짬뽕 도시라고 해요. 이곳에서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왜냐, 유흥가를 번창시켜 놓은 나라도 한국이거든요"라고 해서 잠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단둥에는 29개 소수 민족이 살고 있습네다... 제기차기가 인기 있고요"

 

30분쯤 지났을까, 20대로 보이는 여성이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가이드였다. 그는 서툰 북한말로 "처음 뵈옵는데 이런 모습 보여 드려서 정말 죄송합네다. 너무너무 미안합네다. 용서해주세요"를 반복하며 버스에 올랐다.

 

"저는 조선족이고 이름은 '송근화'라고 합네다. 우리가 현재 있는 곳은 단둥시 '개발구'입네다. 중국에는 시 정부가 투자하는 개발구가 도시마다 하나씩 있습네다. 단둥에 처음으로 오시죠? 단둥은 1965년까지 '안동'으로 불렀고, 전체 인구는 240만, 시내 인구는 74만 정도예요. 특별한 것은 조선족, 북한사람, 화교(북한에서 생활하다 건너온 '중국 사람'), 한족, 만주족, 후이족 등 29개 소수 민족이 살고 있습네다.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운동은 '제기차기'고요, 저녁을 먹으면 광장에 모여 함께 즐깁네다."

 

 

가이드는 앳되고 초보로 보였는데, 애교 섞인 목소리로 우리의 전통 놀이 제기차기를 앞·뒤, 옆으로 기술을 발휘하면서 차는 사람이 많다고 자랑했다. 이어 압록강 다리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여기가 압록강입네다. 맞은편은 신의주이고요. 북한하고 가깝죠? 저기 보이는 다리는 '압록강다리'입네다. 하나는 6·25전쟁 때 끊어진 다리이고, 하나는 기차가 하루에 한 번씩 신의주와 평양으로 들어가는 다리입네다. 모든 화물과 북한사람, 관광하시는 분들, 시 정부 사람들이 이용합네다. 몇 달 전 북한의 높으신 분이 중국에 오셨을 적에, 여러분도 아시지요? 그분도 이 다리를 건너가셨습네다. 그래서 이 다리는 참 중요한 다리입네다."

 

다리를 이용한 높으신 분이 지난 5월 중국을 방문했던 김정일 위원장 같은데 가이드는 밝히지 않았다. 또 걸어가다 길에서 북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면서 "북한 사람 특색은 옷에 마크를 차고 있거든요. 그거 보면 아 북한 사람이구나! 그렇게 생각하시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조심하라는 것인지, 반갑게 대하라는 것인지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이드 설명이 끝나자 인솔자가 마이크를 넘겨받아 "어린이 돌발퀴즈입니다. 저기 보이는 압록강 다리와 연결된 북한의 철도 이름을 아시는 분?"이라고 묻자, 초등학교 4학년 나영이가 "경의선이에요!"라고 대답해서 일행에게 칭찬과 박수를 받기도.

 

분단의 아픔이 돈벌이로 이용되는 건 아닌지... 수치심이 느껴진다

 

 

버스에서 내려 푸른빛으로 흐르는 압록강을 보니 옛날 교과서에서 배웠던 수풍댐이 생각났다. 일제강점기에 압록강 상류에 세워진 수풍발전소는 한때 아시아에서 가장 컸던 수력발전소로 70만KW에 이르는 전기를 국내에서 사용하고 남아 만주에도 보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압록강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중국·만주의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러일 전쟁 때는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한국 전쟁 때는 미군, 영국군, 터키군, 그리스군 등 연합군과 소련군, 중공군, 북한군이 전투를 벌였으며 중국인민군의 병참 전선이 되었던 곳이었단다.

 

 

압록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철교를 돌아 가까이 다가가 보는 북녘땅은 검고 칙칙했다. 놀이기구도 설치만 되어 있지, 정지된 상태였다. 물놀이하는 사람들도 우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후줄근한 차림의 북한 병사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오갔는데, 3월에 일어난 '천안함 사건' 후유증 때문인지 분위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형제들이 바로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아렸다. 언제나 통일이 되어 환하게 웃으며 손을 잡을 수 있을지, 직접 와서 보니까 반갑고 신기하면서도 가슴이 짠하고, 답답했다. 오만 잡념들이 뒤얽히면서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유람선에서 '조중우의교'를 바라보니까 중국 단둥에서 북한 신의주 방향으로 가는 빨간색 트럭 십여 대가 눈에 들어왔다. 짐을 가득 실은 차량들이 쉴 사이 없이 오갔는데, 북한과 중국의 무역량을 보여주는 막대그래프를 보는 것 같았다. 

 

갑자기 푸른 강물 위로 돌아가신 아버지 모습이 비쳤다. 언제쯤 아버지 고향 황해도 해주를 방문해서 돌아가셨을 고모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회한이 밀려왔다. 북한을 너무 밀어붙이면 결국 중국만 좋아진다는 생각과 함께 중국이 북한까지 포함해서 '동북 4성'이라고 떠들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우려심이 들기도 했다.

 

남한 정부의 대북강경책이 강화될수록 남북 교역은 단절되고 북한의 대중국 의존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휴전선에 긴장의 골이 깊어질수록 주변 강대국들에게 이익만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한미일 공조만 앞세우면서 북한을 압박하는 이명박 대통령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 중에도 적에게 타협안을 내놓아 대화로 휴전을 성사시키는데.

 

이번 만주기행에서 조·중·러 국경지대 두만강 변에서는 가시철망 하나로 국경을 표시하고 지내는 중국-북한 관계를 부러워했다. 그런데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끊긴 압록강 단교를 찾는 관광객이 많은 걸 보면서는 분단의 아픔이 중국의 돈벌이에 이용되는 것 같아 수치심과 모멸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태그:#단둥, 신의주, #압록강, #조중우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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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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