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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무대를 캘리포니아에서 하와이로 다시 옮겨야겠다. 박용만과 행보를 같이 하던 노백린이 본토를 향해 하와이를 떠난 건 1919년 10월 1일. 그때부터 워싱턴으로, 캘리포니아로 그의 거취를 계속 쫓다 보니 한참 곁길로 진도가 나갔다. 얘기가 가끔 뒤죽박죽이 되는 건 편년체로 평전을 쓰면 자칫 지루해지기 때문이다. 시기도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겠다. 1918년 1월 15일의 시점으로 되돌아간다.   

 

다시 싸움이 벌어졌다. 국민회 제 10차 대의회가 열린 자리에서였다. 이번엔 안현경이 대상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승만도 대상이었다. 돈 때문이었다. 안현경은 총회장이었고 이승만은 재무였다.

 

국민회 회비를 유용했다고 해서 3년 전 박용만 파의 총회장 김종학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승만으로부터 고소를 당해 재판을 받았던 것이다. 억울함을 견딜 수 없어 권총을 입 속에 쏴 자살하려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3년 만에 이번에는 그 반대 현상이 벌어졌다. 군사운동 후원금 중 잔금 1035 달러와 '약소국동맹회의' 파송 경비 특별 모금 중 잔금 1157 달러가 장부에 올라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재무 이승만은 장부를 보여 달라는 박용만 파 회원들의 요구조차 묵살했다.

 

 

 

그는 신문에 "지금이라도 이 연조금 1천 1백 원이 있나 없나 의심하는 자 있으면 내게로 오라. 눈으로 보겠다하면 보여줄 것이요, 손으로 만지겠다하면 만지게 하여 주겠노라"고 기고 하면서도 장부 조사원을 대면하지 않았다. 보겠다는 사람에게 보여주면 끝날 것을 신문에까지 기고할 것은 뭐며 오라는 것은 또 뭐란 말인가. 재정장부를 조사하는데 장부에 오류가 많고 은행 적립금의 영수증이 없어 박용만 파 대의원들은 재무 이승만의 설명을 요구했던 것이다.

 

박용만은 동포들의 지식 발양을 위해 '국민보'의 주필이 되거나 무력 배양을 위해 '대조선 국민군단' 군단장이 되거나 바쁘게 활동했다. 그 때문에 '국민회' 총회장은  자기 밑에서 일하던 '국민보' 총무였던 김종학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승만은 달랐다. 자기 밑에 있는 안현경을 총회장으로 내세우고 그 밑에서 재무를 맡았다. 국민회는 항시적으로 동포들의 회비가 집중되는 유일한 기관이 아닌가. 권력은 돈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승만은 일찌감치 간파하지 않았을까.

 

분쟁은 1월 15일 대의회에서 불똥이 일기 시작했다. 안현경이 원인제공자였다. 총회장으로서 그는 그 해 1년간 한 번도 임원회를 열지 않았다. 또한 국민회 기관지 '국민보'의 재정에 흠축(공금유용)을 냈다. 총회관 사무실 임대료를 받고서 장부에 올리지 않았다. 하와이에 오는 여학생에게 전해달라는 2백 달러를 착복했다는 피해자의 지탄도 있었다.

 

박용만 파는 조목조목 따지며 총회장을 공박했다. 그 중에는 1909년 총회장이었으며 하와이에서 최초로 사진결혼한 이내수도 있었다.

 

안현경은 신문사 재정을 흠축냈어도 다시 물어넣으면 그만이요 또 총회관 방세를 받아먹었어도 다시 장부에 올리면 그만이라고 버텼다. 안현경이 동포사회의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은 1911년 11월. 당시 '신한국보' 주필 이항우가 멕시코에서 불법입국한 동포들을 위해 선임한 변호사에게 커미션을 요구했다며 엄정한 처리를 주장했다. 국민회 대의회 석상에서였다. 그날 밤 이항우는 육혈포를 입에 물고 자살했다. 그런 걸 보면 안현경은 남의 비리엔 주저 없이 칼을 뽑는 결기의 사나이다. 그러나 그 결기가 자기의 비리에는 잽싸게 배짱으로 변한다.   

  

또 남의 돈 2백 달러를 착복한 사건에 대해선 미국에 있는 송금인과 사사로이 거래하던 것이라고 맞섰다. 1916년 11월 13일 미국 본토에 살고 있던 서학빈은 총회장 안현경에게 2백불을 부치면서 조선에서 김일선이라는 여학생이 찾아오면 여비로 건네 달라고 부탁했다. 약 9개월 후 김일선이 하와이에 내려 안현경에게 돈 얘기를 하니까 그런 일이 없었다고 오리발을 내민 것이다.

 

오아후 섬은 하와이 군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호놀룰루도 오하우 섬에 있다. 그러나 외딴 섬들에서 온 대의원 수가 더 많았고 그들은 이승만 파였다. 그들은 안현경을 철통같이 옹호했다. 박용만 파 대의원이 일어나 발언하면 이승만 파 대의원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들은 일제히 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재정 흠축은 내여 놓으면 그만이요, 총회관 방세도 물어 놓으면 그만이요, 학생 돈은 개인적인 거래였다. 그런데 뭐가 불만이여?" 다수에 의한 일종의 필리버스터였다.

 

국민회 대의회는 1월 15일서부터 거의 한 달 동안 몇 차례 열리면서 두 파는 티격태격했다. 2백 달러 건에 대한 증거물(송금인의 편지와 전보)을 이승만파가 탈취하는 과정에서 박용만 파와 치고 박는 싸움이 벌여졌다. 안현경과 이승만은 박용만 파 사람들을 경무청에 고발해서 체포토록 했다.

 

이승만파는 그 이후 회의를 할 때 경찰관을 불러 보호를 의뢰했다. 1인당 한 번에 5불씩 지불하며 열 두 경찰관들을 총회관 안팎에 세웠다. 입장권을 발부 받은 회원들만 입장시킨 가운데 새 임원진의 취임식을 가졌다. 결국 오아후 섬 각 지방 대의원들은 장외투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2월 4일과 9일 두 번에 걸쳐 공고서(성명서)를 발표하고 총회장 안현경의 불신임을 선포했다.

 

재판은 2월 27일에 시작돼 3월 8일에 끝났다. 안현경과 이승만은 고발자로서 며칠 증언대에 섰다. 재판 첫날 이승만은 "저 자들이 나의 교육을 반대하며 또 무리를 지어 국민회를 전복하려 한다"고 증언했다.

 

약소국동맹회의는 1917년 11월 29일서부터 31일까지 뉴욕의 맥컬린 호텔에서 열렸다. 마땅한 사람이 없어 대표로 박용만이 선정됐다. 약소국동맹회의에는 스웨덴, 노르웨이, 아일랜드, 폴란드 등 24개국 대표들이 모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약소국들의 의사를 종합해 평화회의에 제출할 의안들을 작성하는 게 주목적이었다. 박용만의 여행경비에 필요한 5백 달러의 모금을 이승만은 비밀리에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이승만은 약소국동맹회의 재정에 대해 말하기를 이것은 원래 개인의 일이요 개인의 재정이라고 했다. 그러자 피고소인의 변호사가 물었다. 그 재정을 거둘 때 총회장의 이름이나 국민회의 인장을 쓴 일이 없었느냐고 질문했다.

 

 

그런 일은 전혀 없었고 다만 총회장의 소개 편지를 각 지방에 보낸 일이 있다고 이승만은 대답했다. 변호사가 그 소개 편지를 보겠다고 요청하자 이승만은 그 다음 날 제출했다. 그것은 원래 동포에게 청연한 원문이 아니고 다만 이승만, 안현경이 개인적으로 각 지방에 보낸 편지였다. 일부러 그런 것들만 들고 온 거였다.

 

변호사는 이것 밖에 다른 것은 없느냐고 물었다. 이승만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변호사는 종이 한 장을 내어놓으며 이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전 해 9월 28일 총회장 안현경이 동포에게 특별연조를 청한 문서였다. 상단에 국민회 인장이 찍혀 있고 하단에 총회장 직함이 적힌 것이었다. 이승만은 꼼짝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금 과정에서 약소국동맹회의 파송경비 5백 달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과도한 액수라는 점이 문제가 됐다. 게다가 그 잔금 1,157 달러가 장부에 올라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명목에 합당치 않은 모금이 어마어마하게 이뤄졌다는 얘기가 아닌가. 

 

변호사는 소리를 높였다. 거짓 증인을 서는 것은 사람을 속임이요 국민회를 소란케 하는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라고 이승만을 가리켰다. 한 배심관은 이 박사에게 당신이 닥터라고 하는 것은 병 고치는 의사냐 아니면 다른 닥터냐고 물었다. 어느 학교에서 졸업하고 왔느냐고 묻는 배심관도 있었다. 비록 자신이 자초한 일이지만 그것은 한인 전체에게 망신살이 뻗친 불상사였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태그:#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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