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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박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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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파당이 갈라지기 전에는 사탕수수밭에서 웃음도 같이 나눴다.
 파당이 갈라지기 전에는 사탕수수밭에서 웃음도 같이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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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자기의 사제가 되라고 했지. 맹목적이 되라고 했어.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지. 선생님, 제가 어디든지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따를 순 없습니다."

찰스 정의 증언이다. 로베르타 장이 만든 비디오테이프에 나오는 육성이다. 로베르타 장은 하와이 이민 1세의 증언을 기록에 남기기 위해 노력한 사람. 1993년부터 15년간 1백여 명의 생존자들을 인터뷰해서 테이프에 담았다. 그들은 이승만을 직접 보고 겪었던 사람들이다. 찰스 정도 그 사람들 중 하나다. 

그러나 찰스 정과는 달리 이승만을 맹목적으로 따른 사람들이 있었다. 안현경과 홍한식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불법적으로 국민회를 장악한 이승만파는 1916년도 회장에 홍한식, 1917년과 1918년도 회장에 안현경을 앉혔다.

국민회가 1913년 5월 7일 구입한 학교 용지를 이승만이 자기 명의로 옮겨 달라는 것을 박용만파는 공공기관의 재산을 개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홍한식이 회장이 된 후 1915년 7월 27일 그것을 허가했다.

1913년 2월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그 해 6월말에서 7월초까지 하와이 군도의 다른 섬들에 살고 있는 동포들을 순방했다. 그때 동행했던 사람이 당시 국민회 총무로 있던 안현경이었다. 그때서부터 그는 이승만의 오른팔과 같은 심복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홍한식과 함께 세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된 건 월간잡지 <한인교회보>를 발간하던 때였다. 1914년 4월서부터 발간된 그 잡지의 사장은 이승만, 편집 홍한식, 발행 안현경이었다.

이승만을 후원하기 위해 기존의 국민회에서 탈퇴한 '동지회'가 조직된 게 1921년 7월. 그 정강에 이승만을 종신 총재로 임명하고 총재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고 명문화했다. 맹목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무리가 없었다면 어찌 가능했을까.

안현경은 1903년 노동이민으로 하와이에 왔다. 그의 이름이 기록에 등장하는 건 1911년 12월 19일자 신한국보의 급보기사에서다. 그 전 달 27일에 국민회 대의회가 열렸다. 하와이 콜노아 대의원 안현경이 벌떡 일어났다.

"오하우 누안누 대의원 전병찬씨의 전언에 의하면 국민회 총회장 정칠래 씨와 '신한국보' 주필 이항우씨가 멕시코 사건의 재판을 주선할 때 변호사에게서 커미션(구문)을 받아먹으려고 했다는 겁니다. 철저히 조사해서 엄정한 처리를 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날 밤 이항우는 육혈포를 입에 물고 자살했다. 탄환은 오른편 뒤통수를 관통했다. 이씨는 "한 마리 나쁜 고기가 맑은물로 들어간다"라는 영어로 쓴 유서를 남겼다. 멕시코 사건이란 멕시코로부터 4명의 동포가 하와이로 불법입국하려다 제지된 사건. 현지 동포들이 모금해서 그 구제방법을 주선 중이었다.

안현경은 이승만의 수족처럼 움직였다. 동지회는 물론 이승만이 주로 미국을 대상으로 외교활동을 벌이던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에서도 일했다. 

구미위원부가 있던 워싱턴의 건물. 1921년.
 구미위원부가 있던 워싱턴의 건물. 19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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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1월 그는 상해에 나가 있었다. 상해에서 발간되던 <독립신문> 11월 4일자에 의하면 안현경은 당일 있었던 국무총리 이동휘의 취임식에 참석했다.

이승만은 그 해 9월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상해로 건너 온 것은 1년이 넘은 1920년 12월 8일. 그 기간 동안 안현경은 임시정부의 동정을 하와이에 있는 이승만에게 낱낱이 보고했다. 좋게 말해 통신원 노릇을 한 것이다. 다음 해 6월 말 그는 하와이로 귀환한다. 비슷한 시기 홍한식은 목사가 돼 정치활동과는 무관하게 됐는지 이승만으로부터 멀어진다.

홍한식이 기록에 나오는 건 1915년 6월 10일자 <신한민보>에서다.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에서 분규가 일어나자 박용만파 대의원 몇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국민회 중앙총회에 공첩(공적 서한)을 보낸다.

그 공첩은 "금번 임시의회의 총회장 후보 홍한식씨는 일년 의무금도 궐납한 자요 3년 전에 우리의 원수 일본영사를 간련하여 수백 원 더러운 금전을 농락하던 자로되 미이미교파(감리교회)의 강대한 세력으로 체면도 불구하고 헌장이나 자치규정도 불구하고 다만 한 개인의 지휘만 복종하는 자라"고 묘사했다. 여기서 한 개인이란 이승만을 가리킨다.

1915년 6월 17일자 '신한민보'는 '공리는 어찌 하려는가'와 '하와이 안돈방침에 대하여'라는 논설들을 게재.
 1915년 6월 17일자 '신한민보'는 '공리는 어찌 하려는가'와 '하와이 안돈방침에 대하여'라는 논설들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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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첩은 서두를 이렇게 시작했다.

"5천 동포에게 고함 - 동포 동포여 무슨 연고로 국민회가 비운을 당하였는가. 원인을 연구할진대 총 임원의 재정흠축도 원인이 아니요 2,3년 전부터 은연한 중에서 이러한 기회를 엿보고 있는지 오랜 지라. 그러므로 오늘날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국민회를 헐어 교회 안에 집어넣고 한 개인이 행호시령하니 뜻 있는 자가 통분치 않으리요. (중략) 우리는 생명을 버릴지라도 국민회는 결단코 한 개인의 사유물을 만들어 권세 있는 자의 이용거리가 되지 않게 하리니 일반 동포는 아래 기재한 중앙총회에 올리는 공소장을 보시면 자연 시비를 판단할 줄 아노이다."      

그 전 달 하와이 국민회 임시 대의회에서 박용만파인 총회장 김종학에 대한 이승만 파대의원들의 규탄이 있었다. 그들 중엔 홍한식과 안현경이 있었다. 규탄의 대상은 김종학과 임원들의 회비 유용 건이었다. 회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폭력이 난무했으며 이승만파는 박용만파를, 박용만파는 이승만파를 고소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그 사태의 전말을 하와이 현지의 영자신문도 기사화했다. 1915년 6월 24일 자 <신한민보>는 그 기사의 번역문을 실었다.

"하와이 현시 정형(19명 한인의 피착) - 이홍기(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 중앙총회에 공소장을 제출한 대의원 중의 한 사람)는 새로 선거된 임원에게 맞아 중상 당하였고, 영수 박용만을 죽이기로 의결. 3백50명이 의결할 때에 주필 두 사람이 도망했는데 한 사람은 미 본토로 갔음. 호놀룰루에 있는 '소한국'은 혁명 안에 혁명을 일으켰도다. 그 분란은 한 달 전 국민회장이 재정 흠축한 사건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극도에 달해 신-구 임원이 서로 싸우는 도다.

당지 비밀경찰은 말하되 호놀룰루 한인 3백 50명이 지난 예배 육일에 국민회관에서 의결하고 박용만을 추종하는 파당을 몰수히 죽이기로 작정하매 국민보 주필 겸 카할루 한인 병학교 교장 박용만은 폭동을 피해 시에라 선을 타고 호놀룰루를 떠났도다. 전 총회장 김종학이 재정 1천 3백 65원을 흠축낸 일로 한인 교회를 주장하는 이 박사의 패당이 항거해 지금 한인 정계에 큰 싸움이 되었도다. 지난밤에 한인 이홍기가 중상을 당하고 경무청에 와서 고발한 고로 그를 난타한 회원 19 명의 포착령을 발했는데 순검의 말을 들은 즉 이홍기는 타곡하는 기계로 짓이기는 것 같이 되었는데 그 범인들은 금일 오후에 잡을 모양이더라. (중략)

피착된 김종학의 장부를 다시 조사한 즉 그의 흠축된 재정이 1천 3백 65원이 아니요, 5백원인데 이는 빈한하여 할 수 없는 사람을 도와준 것이라. 지금 이승만의 선동으로 나온 새 파당은 그 목적이 한인 병학교(주-대조선국민군단), 교회, 학교, 신문사를 온전히 자기 수중에 넣고자 함이라. (중략)

경무총장 맥더피씨는 그 범인들을 잡을 일을 생각하고 밀러 가에 있는 국민회관에 가서 체포 대상들을 발표했는데 그 중엔 안현경, 홍한식이 들어있더라."

19명의 이승만파 장정들이 이홍기를 난타했는데 마치 타곡기로 짓이겨 놓은 것처럼 잔인했다고 한다. 그 폭력배들 중에 안현경과 홍한식이 들어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이야말로 훗날 이승만이 귀국해서 집권했을 때 땃벌떼(자유당 시절 동원된 정치깡패)며 반공청년단이 자행하던 정치테러의 최초 원형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을까. 

한 때 하와이왕국의 왕궁이었던 로래니궁은 현재 박물관이 됐다. 1914년 2월 한인들도 참가했던 '알로하 카니발' 때 야간조명을 한 모습
 한 때 하와이왕국의 왕궁이었던 로래니궁은 현재 박물관이 됐다. 1914년 2월 한인들도 참가했던 '알로하 카니발' 때 야간조명을 한 모습
ⓒ C.C. Coonley(저작권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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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식 옹은 이렇게 증언한다.

"이승만은 국민회와 동지회로 갈라놓았지. 나의 아버지는 박용만 지지자였지.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다른 섬으로 도망가야 했어."

머리가 완전 백발인 미니 유 여사의 증언은 또 이렇다.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어. 농장에서 일하는데 누군가가 곡괭이를 들고 와서 뒤에서 찍었거든. 그래서 병원에 실려 갔어. 이승만의 패들이 와서 그런 거지."

로베르타 장은 노동 이민 1세로 독립운동에 헌신적이었던 장금환씨의 딸. 2007년 한국에서 제3회 재외동포 영화제가 열렸을 때 자신이 감독한 영화 <국민회>를 출품했다. 영화는 초기 이민 역사와 국민회를 이룬 사람들의 얘기를 보여준다. 로베르타 장이 인터뷰한 생존자들 중 절반 이상이 이승만은 한인사회에 위험한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이승만이 우리 집에 찾아 왔었어. 우리 아버지를 설득하면서 조직의 대표 자리와 통제권을 넘기라고 했지. 당시 국민회가 안정적인 자금을 가지고 있었거든. 국민회 대표 자리를 둘러싸고 아주 큰 싸움이 벌어졌지. 이승만의 지지자들이 몰려왔고 총격까지 발생했어."

에드워드 김 옹의 회고담이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태그:#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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