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자갈길을 밟으며 어찌 살까 하루를
울면서 헤메이던 지난날도
입술을 깨물면서 뱃고동의 반평생
부산의 자갈치 아지매
싱싱한 아침햇살 저무는 저녁노을
이제는 자랑스런 자갈치 아지매
어서어서 오이소~웃음으로 반기는
부산의 자갈치 아지매
- <자갈치 아지매> 노래 나훈아
 
대한민국 사람이면 부산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부산하면 자갈치가 제일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부산의 대표적인 재래시장 자갈치. 이 이름은 그리 멀지 않은 옛날 부산의 충무동 로터리까지 뻗어 있던 자갈밭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자갈치란 물고기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여러 설이 나오고 있어 그 어느 설도 확실치는 않다 하겠다. 지난 2001년 1월 26일자 <국제신문>에 소개된 '자갈치시장의 유래'를 아래와 같이 옮겨 본다.
 
자갈치시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수산물종합시장으로 지난 46년 결성된 자갈치 생어업조합이 모태. 지난 69년 수산청으로부터 사단법인 부산어패류처리조합으로 인가를 받아 이듬해 3층 건물로 자리 잡았다. 
 
자갈치 시장의 유래는 1910년대 일제 강점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옛 시청자리가 어항 겸 수산물 수출입장으로 개발되어 어시장이 형성되었는데 당시 시청 자리와 충무동, 완월동 일대에 자갈이 많아 '자갈처'로 불리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하기 쉬운 자갈치로 이름이 바뀌게 됐다는 것.
 
그러나 자갈이 많은 곳에 멸치 갈치 꽁치 등 온갖 고기가 많다고 해 '자갈'과 '치'가 합해져 자갈치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 후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귀국한 동포들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란민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자갈치에 노점상을 이뤄 자갈치 시장이 됐다.
 
김인순 자갈치 할매, 피난 내려와 고래고기 행상의 오십오년 세월 
 

자갈치 시장은 다양한 생선을 사고 파는 어물시장이지만 싱싱한 생선만 팔고 사는 시장이 아니다. 생필품, 옷가게 등 다양한 먹거리 문화가 있고, 이로 인해 자갈치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자갈치 아지매'의 수도 엄청나다.
 
그 많고 많은 자갈치 아지매들이 운영하는 가게 중에 부산 자갈치시장 영도도선장 입구에서 고래고기를 파는 '이북·하단 할매집(이하 두 할매집)'이 있다. 하여 나는 칼바람을 무릅쓰고 지난 14일에 자갈치 시장을 찾았다. 
 
오랜만에 찾은 자갈치시장 분위기는 무척 달랐다. 자갈치 시장 건물 주변 등이 리모델링으로 놀라울 정도로 현대식으로 변해 있었다. 영도도선장 입구 고래고기와 곰장어 파는 포장마차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두 할매집은 방금 배에서 내린 듯 보이는 장년 몇몇이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고, 두 분 할머니는 손님맞이와 고래고기를 썰어 파신다고 무척 바쁘신 모습이셨다. 두 할매 집은 자갈치 시장에서는 명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고래고기가 귀하지만, 고래고기가 쇠고기보다 흔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오십 년 넘게 두 분 할머니가 한자리에서 장사를 하셨기 때문이다.
 
두 할머니 이야기를 빌리면, 전국에서 두 할매 집을 찾는 분이 많으시단다. 그러니까 약도도 없이, 그냥 자갈치 시장에 와서 상인들에게 두 할매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바로 안내해 줄 정도로 유명하시단다. 
 
필자가 두 할매집을 특별히 찾은 이유는 따로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고향이 함경도이기 때문이다. 이북 할매(김인순씨)의 고향이 같은 함경도라는 이유만으로도, 내가 애써 찾을 이유는 충분하지 않는가.
 
돌아가신 어머니는 누가 고향이 이북이라면 눈물부터 펑펑 쏟으셨다. 고래 고기를 썰어파신다고 무척 바쁘신 이북 출신 자갈치 할매에게 내 어머니 고향도 함경북도라도 이야기하니 반갑다고 말씀하시며 빙그레 웃으셨다. 내가 인터뷰하고 싶다니 대답은 않고 웃으시기만 하셨다. 그래도 나는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는 할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이것저것 물어 본 것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문득 두 분 할머니가 함께 일하시는 모습이며, 살아오신 이야기들이 이정국 감독의 영화 <두 여자 이야기>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처럼 무척 정겹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자갈치 시장에 뿌리 내린 지 55년이 넘었어. 피난 내려와서 첫아기를 업고 먹고 살기 위해 난전 장사 시작했지. (사이) 그 후 아이들이 생기고 아이들을 맡길 데가 있나 아이들 데리고 나와 장사했어... 그러고 보니 저희들끼리 어울려 놀다가 자갈치 바다에 빠진 적도 있고 늘 노심초사했지. 고래고기를 특별히 팔게 된 것은 어린 아이들 데리고 수월하게 장사할 수 있어서였지. 옛날 자갈치 시장에는 고래고기를 삶는 큰 가마솥도 있고 고래잡이 배도 들락거렸지. 기억을 더듬으면 영도와 옛날 시청 앞에도 고래고기 삶는 공장이 있었어. 그때가 고래고기 장사는 경기가 참 좋았지..."

 
자갈치 시장에서 '이북 할매'로 불리우는 김인순(84) 할머니께서는 피난 시절 이야기 들려 달라니 젊은 사람들은 상상도 못한다고, 그 이야기를 하려면 장편소설 몇 권이라고 말씀하신다. 김인순 할머니는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 처녀 시절에는 물에 손을 안 묻힐 정도로 친정 가계가 넉넉했다고 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고 1.4 후퇴 때 남편과 시부모를 모시고 첫 아기를 등에 업고 피난 내려 오면서부터 고생이 시작됐다. 시부모님을 알뜰히 공양해야 하는 그 시대, 김인순 할머니는 가만히 앉아 놀 수 없어 아기를 업고 닥치는 대로 행상을 하다가 자갈치 시장에서 고래고기를 판 지 어느새 5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된 것이다.
 
"그래도 고생이 되었지만 그 당시 고래고기는 지금 쇠고기 못지 않게 인기 있고 가격이 싸고 해서 고래고기는 없어서 못 팔았어... 돈을 버는 욕심에 아기를 업고 아이들을 걸리고 그렇게 열심히 장사를 했지...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억척스럽게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내가 생각해도 장해... 고래 고기 덕분에 아이들 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보내고 정말 감사하지."
 
이북 할매의 고래고기 써는 솜씨는 정말 달인의 경지였다. 잠시도 손을 놀리지 않고 고래고기를 써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 놓으셨다. 할머니는 난생 처음 난전 장사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 부끄러움보다는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아기를 등에 이고 생선을 팔러다니다가, 고래고기만 전문적으로 팔게 되었다고 한다.
 
덧붙여 고래고기는 삶아 먹기도 하고, 국과 찌개도 끓여 먹기도 하는데 고래의 싱싱한 맛을 즐기려면 육회가 좋단다. 육회는 삶아 먹는 것보다는 영양가가 높다며, 가능한 질 좋은 밍크 고래 등을 받아와서 파신다고 강조한다.
 
당시 피난민 시절에는 가족들 각자 입벌이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당시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대가족의 생계비는 턱없이 부족해, 갓난아이는 등에 업고 큰 아이는 걸리면서 자갈치 노점 시장에 행상으로 오늘날까지 자갈치 아지매로 살아온 것. 
 
누구나 힘들었던 그때 그 시절, 그 힘든 피난민 시절과 보릿고개 시절에는 지금보다 사람 사는 냄새가 자갈치 시장에 흥건히 배어 있었다고 한다. 60~70년대 자갈치 시장은 가만히 서 있어도 그냥 시장에 모여드는 인파에 싸여 밀려갈 정도로 장사는 잘 되었다고, 김인순 할머니는 그 시절이 자갈치 시장의 황금시대였다고 회상한다.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건 내 어머니 레파토리
그 중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남은 인생남았으면 얼마나 남았겠니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어머니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 <라구요> 강산에 노래
 
고향에도 못가고... 자갈치 할매로 늙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김인순 할머니는 그동안 난전 행상을 하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생을 했지만, 지금은 어렵게 키워낸 성장한 자식들의 손자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보람으로 사신다. 이북에 계신 가족과 친구들이 그립지 않나고 묻자, 눈가는 어느새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정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 생각으로 눈물 많이 흘렸지. 피난 내려오면서는 금방 고향으로 돌아갈 줄 알았지. 이렇게 자갈치 할매로 늙은 줄은 꿈에도 몰랐지..."
 
김인순 할머니는 고향 함경도 사투리도 부산 사투리도 쓰지 않으셨다. 두 사투리가 적당히 섞여 표현하기 힘든 구수한 말씨를 구사하셨다. 두 할매집의 동업자 하단 할매(조분래씨)와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하단 할매가 남편을 여의고 난 후부터라고 한다. 
 

남편 일찍 여의고 두 아들 뒷바라지에 혼신을 바쳐온 자갈치 아지매 조분래씨
 
이북 출신의 김인순 할머니와 하단 할매 조분래 할머니(78세)의 만남은 우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힘들게 혼자 장사를 하는데 인척 한 분이 조분래 할머니의 사연을 들려주며 서로 의지하며 장사를 해보면 어떻냐고 묻자, 그 자리에서 흔쾌히 승낙해 조분래 할머니와의 동업은 시작되었다.
 
그후 40년 동안 형님, 아우 부르며 함께 동업을 해왔다. 조분래 할머니는 할머니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건강해 보이시고 그 옛날의 아리따운 용모를 짐작케 할 만큼 젊은 모습을 지니고 계셨다. 
 
"할머니, 무슨 이야기든 상관 없어요. 그냥 살아오시면서 꼭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다는 이야기 하시면 됩니다."
"(한참 침묵 후) 난 자갈치 시장에서 노점 행상 못하게 하는 거 절대 반대야. 없는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지. 시장은 노점 행상이 있어야 북적북적하고 시장 다워... 이렇게 장사 안 되는 게 내 생각에는 노점 행상 없애서 그런 거 같아... 난 절대 노점 행상 없애는 일을 반대해.."
 

현재 두 할매집은 모 건설 공사관계(노점상 철거)로 인해, 임시 계약으로 가게 형태를 가진 건물에 세를 얻어 있으나, 노점상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니 이북 할매는 고래고기를 썰고 하단 할매는 뒷설거지 등을 맡아 하시는데 정말 손발이 척척 맞으셨다. 동업으로 어려움은 없었느냐고 묻자 이렇게 두 분이 똑같이 입을 맞춘 듯이 대답하셨다.

 
"각자 맡은 일 각자 알아서 하는데 뭐가 어려워?"
 
'이북, 하단 두 할매'의 모정의 세월과 뿌리 깊은 우애에 대하여
 
조분래 할머니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슬하에 어린 자식 둘을 데리고 살 길이 막막했다고 하신다. 지금도 김인순 할머니를 안 만났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앞이 캄캄했다고 지난날을 술회하신다. 남편과 함께 했던 짧은 결혼 생활을 생각하면서 눈물지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동안 혹시 재혼 생각은 해 보지 않으셨냐고 물었더니, 화가 나는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신다.
 
"...재혼? 남편 죽으면 자식을 보고 살아야지 재혼? 난 그럴 생각 눈꼽만큼도 없었어. 어린 자식들을 어떻게든 잘 먹이고 공부 시켜 훌륭하게 키울 생각뿐이었으니까..."
 
끝으로 하단 할매에게 그동안 사시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가 언제였느냐고 묻자, 아이들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렸을 때였고, 등록금을 일수로 빌렸는데 그걸 갚느라고 힘들었던 때라고 말씀하시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그러면서 그래도 그 때가 가장 장사도 잘되고 행복했다고 말씀하시면서, 자갈치 시장 경기가 예전만 못하다고 걱정하셨다. 
 
"두 분 할머니 이제 고생 그만 하시고 편안하게 집에서 지내시지 그래요?"
"... 놀면 뭐해. 자갈치 나오면 돈도 벌고 몸이 아프지 않아. 놀면 늙은 몸이 더 아파..."
 
두 분 할머니께서는 미리 입을 맞춘 듯 동시에 말씀하셨다. 두세 시간 동안 바깥이나 마찬가지인 천막(고래고기 진열대)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찬 바람이 살속을 파고 들 듯이 춥고 너무 힘들었다.
 
이런 비바람 속에서 50년 넘은 세월을 버티셨다니, 두 분의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과 평생 희생과 헌신하고 살아온 부처님의 넓은 마음 같은 두 어머니의 모정에 새삼 눈시울이 뜨거웠다. 정말 누군가의 '여자는 갈대처럼 약해도 어머니는 쇠보다 강하다.'는 말이 실감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입가에서 <모정의 세월>이 절로 흥얼흥얼 흘러나왔다.
 

동지 섣달 긴긴 밤이 짧기만 한 것은

근심으로 지새우는 어머님 마음

흰 머리 잔주름이 늘어만 가시는데

한없이 이어지는 모정의 세월

아~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이 일 듯

어머니 가슴에는 물결만 높네

<모정의 세월>-김용임


태그:#고래고기, #자갈치 사람들, #자갈치 아지매, #우정, #동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