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 나로도 보건지소에 근무하던 어느 날, 아침 7시쯤 묵은 잠을 떨치고 2층 마당으로 나왔다. 기지개를 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뭔가 분주한 모습들이 비친다. 100미터쯤 떨어져 있는 공터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물건을 팔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 나로도에서는 매 2, 7일마다 장이 열리는데 부지런한 시골 분들의 특성상 새벽 대여섯시부터 시작해서 아침 아홉시, 열시 정도면 파한다고 했다.
그 날 우연찮게 본 장터에 호기심이 일어 발걸음을 옮긴 이후로 나는 가끔씩 장날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망건 쓰다 장 파하기 싫어, 안 감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운동복 차림으로 슬렁슬렁 장에 나간다. 인구 2천명의 작은 면이라 장이 열리는 공간이 그닥 크지는 않다. 마을 농협 '하나로 마트'와 미용실 건물 사이로 길게 골목이 나 있는데 여기에서 좌우로 수십 명의 어르신이 쭉 늘어서서 좌판을 벌인다. 골목 안으로 좀 더 들어가면 넓은 공터에 벽 없이 지붕만 얹은 가건물이 나오는데 거기엔 읍내에서 온 뻥튀기 장수가 열심히 기계에 불을 지피고 있다.
애기주먹만한 눈깔 사탕과 유과맛, 커피맛, 콜라맛, 박하맛 등등 다양한 맛이 들어있는 종합캔디세트 같은 걸 보다 보면 어릴 때 동네 구멍가게에서 보던 것들이 생각나 아련한 추억에 잠긴다. 한참 둘러보다 자취생 아니랄까봐 반찬거리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간다.
"어머님, 부추 한 단에 얼마에요?""이천완. 근데 누구요?"수염 때문에 인상도 강렬한 젊은이가 야채를 산다고 쪼그려 앉아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영 신기하신 모양이다. 두건을 살짝 벗으면서 장난스레 "보건소"라고 짧게 말씀드린다. "아, 보건소 한방 선상님이구만"하면서 반색하시는 어머님들. 두건만 써도 잘못 알아보셔서 이런 확인절차를 거쳐야 한다. 가끔씩 "보건소 춤쟁이구만"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럴 때는 "춤쟁이가 아니라 한의사예요. 한의사"라면서 정정해 드린다.
이렇게 인사를 하면 반갑다면서 덤으로 이것저것 얹어 주시는, 인정넘치는 어르신들이 제법 있다. 제 값 주고 사더라도 오히려 죄송할 정도로 가격이 다들 착하다. 언젠가 반찬을 만들 요량으로 오이, 콩나물, 부추, 깻잎 등을 산 적이 있었다. 가슴에 한아름 가득 찰 정도로 샀는데도 5500원 밖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가 데쳐 먹으라며 그냥 건네주신 '고구마대'는 시골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인정의 맛이었다.
이렇게 1000원, 2000원씩 번 돈으로 차비도 하고 손주들 아이스크림도 사 준다. 어떤 분은 남편 분이 마실 약주를 사 가기도 하고, 또 다른 분은 보건지소 와서 침을 맞고 가시기도 한다. 진료비가 1100원이니 내가 드린 오이값이 다시 돌고 돌아 진료소 수납함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내가 쓴 돈이 돌고 도는 게 눈에 보이는 건 경이로운 일이다. 비록 많은 돈은 아니나 이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된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시장을 보고 들어가면 도시의 마트에서는 느끼지 못할 뿌듯함을 느끼는 것이다.
박경철씨 책에서 본 구절이 생각난다.
"부자들 주머니로 돈 들어가봐야 결코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다. 1억을 부자에 주면 1000만원 정도만 소비하지만, 가난한 사람 100명에게 주면 1억을 다 소비한다."시장에서 내가 쓴 5000원은 오이 파시는 분, 부추 파시는 분, 북어 파시는 분들에게로 골고루 뿌려져 나로도 안에서 돌고 또 돌면서 다양한 소비로 이어진다. 한 명이 돈을 몽땅 벌어서 나로도 바깥으로 가져가지 않는다. 그 사람은 좋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팔리지 않아 썩어가는 채소를 보면서 한숨을 쉬어야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대형마트가 딱 버티고 서 있는 도시에서 악전고투 해야 하는 시장 상인들의 얼굴에서 고단함이 느껴진다면 유통업체가 들어오지 않는 이 곳 나로도 아침 장날에는 미소를 머금은 어르신들이 많다. 그 웃음을 보기 위해 오늘 장날에도 1000원짜리 몇 장을 들고 산책을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