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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항 전경
 사천항 전경
ⓒ 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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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에 가면 사천항(강릉)이 있다. 묵호항과 주문진항처럼 크고 소란스럽지 않은,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정이 살아있는 곳이다. 겨울철에는 양미리와 도루묵이 많이 잡혀 넉넉한 인심을 나누게 한다.

만선을 이룬 어부의 환한 얼굴 뒤로 갈매기가 날고, 그물의 고기를 벗겨내는 아낙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올해는 양미리 대신 도루묵이 풍년이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이다. 냉수대 가 형성되지 않아 양미리는 묵호 근처에서 북상하지 못했다.

인근에서 고기를 잡던 배들은 어쩔 수 없이 먼 길을 나서 고기잡이를 해야 하고, 기름값이 부족한 어선은 출어를 포기한다. 그나마 많이 잡힌 도루묵은 값이 없다. 150마리에 만 원. 그마저도 끝물이다.

최근에는 양미리를 두고 명칭 논란이 일고 있다. 어류도감으로 보면 양미리가 까나리고 까나리가 양미리라는 것. 하지만 어민 누구도 이름을 신경쓰지 않는다.

머구리 떠난 바다, 이젠 양미리도 드물어

예전에는 머구리들이 바닷속에 들어가서 양미리를 몰았다.
▲ 머구리 상징물 예전에는 머구리들이 바닷속에 들어가서 양미리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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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항에 처음오는 이들은 벌겋게 녹이 슨 상징물을 아무렇게나 쳐다 본다. 저것이 왜 저기에 서 있을까하는 의구심마저 없다. 입을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상어, 그 위에 올라타서 작살을 든 머구리. 주변에 딩구는 빈 상자처럼 이제는 옛 기억속으로 사라진 어부의 이야기를 형상화 한 것이다. 어민들에 따르면 예전에 양미리를 잡기 위해서는 산소를 공급하는 호수와 잡수복을 입은 '머구리'가 바닷속을 들어가야 했다.

모래 위에 펼쳐진 그물 위를 두 발로 굴러주어야만 모래속에 숨어 있던 양미리들이 놀라 솟구치다 그물에 걸렸다. 그 당시에 바닷속에서 이런 일을 하던 이가 15~16명, 이제는 한 분만 남고 모두 고인이 되었다. 혼자 남은 이도 잠수병에 걸려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다. 지금은 물속을 들여다 보는 카메라가 그 일을 대신하고 있다.

생계를 위해 무거운 잠수 장비를 쓰고 물속을 거닐던 전사들의 모습. 그것이 붉게 녹슨 동상이 담고있는 이야기다. 지금도 차디찬 해풍을 맞으며 그물에 걸린 양미리를 세수대야 하나를 따야 200~300원을 번다.

사천에는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전설이 살아 있다. 사천항에서 주문진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가에는 한 무더기의 바위가 있고 그 바위의 이름이 교문암이다. 허균은 자신의 외가가 있던 사천의 마을 산 이름을 따서 '교산'이라 호를 지었다. 교문암은 아득한 옛날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면서 바위를 두 쪽으로 갈랐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교산'은 용이 되지못한 구렁이인 이무기가 기어가듯 구불 구불한 산에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혀균의 외가인 '애일당'이 있던 자리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지만 그 뒷산 언덕에는 1983년 8월 허균을 추억하고 기리는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가 건립한 '교산시비'가 있다.
허균은 1569년에 강릉 초당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살다가 24세에 임진왜란이 나자 함경도로 피난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이곳 사천의 애일당에서 2년간 살았다.

신분제 사회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사회"의 혁명을 부르짓던 이. 소설 속의 주인공 홍길동을 통해 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사내 대장부 허균의 삶이 묻어있는 곳, 그곳이 사천이기도 하다.

올해는 도루묵이 풍년이다.
▲ 도루묵 올해는 도루묵이 풍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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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항에는 또 하나의 볼거리가 생겼다. 주문진에서 출발해 경포에서 돌아가는 유람선이 그것이다. 잔잔한 바다위에 떠가는 커다란 배, 그 뒤를 따르는 갈매기들. 사천바닷가나 바다가 보이는 폔션에서 맛볼 수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사천을 지나 주문진이 가까운 영진은 해안선이 아름답다. 영진항 바로 옆에서 주문진을 바라다 보면 '이국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해안선이 나타난다. 날씨가 맑고 파도가 치는 날이면 더욱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 낸다. 해안도로를 따라 늘어선 횟집과 조개구이집들은 발길을 붙잡고, 주문진 어시장은 눈을 만족시키다 못해 두 손을 무겁게 한다. 원가가 얼마인지 몰라도 가격은 손님에 따라 오르내리고 금방 삶아낸 대게와 문어는 별미중의 으뜸이다.

밀고 당기는 흥정으로 횟감을 사서는 식당에 가서 야채와 초장값만 내고 먹으면 되고, 담장을 따라 늘어선 구이집에서는 오징어, 새우, 가리비, 꽁치가 노릇노릇 익어간다. 먹는사람들 얼굴도 발그스레 익었다.

해당화 지고 없어도 겨울바다는 더없이 푸르네

최근에 들어선 유람선은 각양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을 태우고 항구를 떠나 푸르른 동해 바다를 가르며 바다에서 육지를 보는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겨울바다는 그 푸르름과 하얀 파도 차가운 바람, 함께 길 떠난 이의 마음이 어우러져야 제멋이다.

이곳에서 자식갖기를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 아들바위 이곳에서 자식갖기를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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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하면서 바위가 갈라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 교문암 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하면서 바위가 갈라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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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에서 북으로 향하면 우암진, 소돌항이 나온다. 마을의 형상이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이라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곳에서 볼거리는 아들바위와 해당화 성황당이다.

아들바위는 1억5000만년 전 쥬라기 시대에 바다 속에서 지각변동으로 솟아 오른 바위다. 옛날 노부부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로 아들을 얻은 후로 자식이 없는 부부들이 기도를 하면 소원을 이룬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외래 관광객은 물론 신혼부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주위에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에 동자상, 부부기도상, 파도 노래비 등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코끼리바위, 해일방조제 등이 맑고 푸른 동해 바다와 잘 어우러진 모습이다.

우암진 성황당은 소의 머리부분이다. 주민들이 즐거움이나 어려움이 생기면 찾아가는 '정신적 귀의처'다. 1년에 두 번, 음력 정월 초사흘, 시월 초하루 제사를 올리고 있으며, 성황당 내 바위틈에 강릉시에 고목으로 등록된 200여 년이 넘는 해당화 10여 그루가 여름이면 꽃이 만발하여 새삼 생명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성황당에서의 일출과 월출 또한 장관이다. 이곳에는 못다 이룬 처녀 총각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풍랑으로 조난당한 총각이 노부부의 보살핌을 받다가 이 집 딸과 눈이 맞아 서로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온 마을에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근본이 확실치 않은 외지 사람과는 절대 혼인을 할 수 없던 시절이라 부부와 마을 사람들의 반대가 심하였다.

해당화 성황당, 해당화가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 모셔져 있다.
▲ 우암당 해당화 성황당, 해당화가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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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젊은 청년과 고명딸은 고민 끝에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이루기로 결심하고 백사장 끝 바위 절벽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 두 사람의 사랑을 표현하였다.

이후 어찌된 일인지 농사는 흉년이 거듭되고 고기잡이도 영 신통치 않는데다 마을엔 재앙만 계속 되어, 마을 주민이 의논 해 두 사람의 영혼을 결합하여 주는 원혼제를 올려 주자 농사는 풍년에 고기잡이도 잘 되고 마을의 재앙도 없어 졌으며 두 사람이 바다에 뛰어 내린 그 자리에 해당화 두 그루가 생겨 나왔다.

제물도 육류는 일체 쓰지 않고 학과 같이 날짐승인 수탉으로 준비한다. 소돌 성황당은 성황신, 용왕시, 토지신 3신이며 성황당은 물론 해당화신이다.

왼쪽이 우암진해변이다.
▲ 우암진 성황당에서 바라본 북쪽 해안선 왼쪽이 우암진해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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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사천항, #우암진, #주문진, #아들바위, #허균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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