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방사성폐기물처리장(방폐장)에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방폐물)이 24일 사상 처음 반입됐다. 주민투표로 방폐장 유치가 결정된 후 5년 만에, 2007년 착공에 들어간 지 3년 만에 일이다. 이로써 국내에 원자력발전이 도입되고 32년이 지난 뒤 처음으로 방폐장이 가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방폐물을 처리소로 옮기는 길은 험난했다. 환경단체와 경주시 시의회 의원들이 폐기물의 반입을 막아섰다. 지하처분고(시일로, silo)가 완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상에 있는 인수저장건물에 방폐물이 저장되기 때문이다. 저장시설이 아닌 검사를 위해 잠시 보관하는 장소에 장기간 보관하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이날 오전 9시, 울진원자력발전소에서 전용선박 '청정누리호'에 실려온 1000드럼 분량의 방사성폐기물이 약 1㎞ 떨어진 처리장에 반입되기까지는 4시간 가까이 걸렸다. 이후에도 지하처분고 완공 전에 약 3000드럼 가량의 방폐물이 더 반입될 예정이어서 방폐장 안전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인수저장시설은 '저장' 시설 아닌 '검사' 시설"
경북 경주 양북면 봉길리에 있는 경주 방폐장은 원자력발전소에서 배출되는 작업복과 장갑, 각종 교체부품 등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을 모아 처분하는 시설이다. 국내에는 현재 경북지역에 고리, 월성, 울진원전과 전남 영광원전 등 총 4개의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 있다. 그동안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한 방폐물은 모두 각 원전에 있는 임시저장소에 보관돼 왔다.
경주 방폐장은 방사능 측정기와 엑스레이·초음파 검사기 등으로 방사능 농도 등을 확인하는 인수저장시설과 지하처분고가 있는 지하시설로 크게 구성돼 있다. 12월 현재 지상건물인 인수저장시설은 모두 완공됐지만 지하시설은 공정이 당초보다 30개월 가량 늦어져 2012년 연말에 준공될 예정이다.
지하시설의 준공까지 2년 동안 방폐물을 임시보관하게 된 인수저장시설은 외벽두께가 최대 82센티미터로 각 원전에 있는 임시저장소의 외벽두께가 30센티미터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더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지역 환경단체와 경주시의회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들 50여 명은 방폐장 정문에 고속버스와 트럭을 세워놓고 폐기물 반입에 반대하는 기자회견과 시위를 잇달아 진행했다.
경주핵안전연대와 환경운동연합은 기자회견에서 "인수저장시설의 원래 정식 명칭은 '인수검사시설'"이라며 "방사성폐기물을 분류하고 검사하는 장소이지 몇 년씩 넣어두고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다, 장기간 방폐물을 저장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없는 건물"라고 지적했다. 인수검사시설을 저장시설로 사용할 수 있게 승인한 것은 퇴임 직전에 있던 백상승 전 경주시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상홍 경주환경운동연합 간사는 "방폐장 유치 이후에 경주시로 3000억의 국가지원금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데 1500억은 유치와 동시에 나머지는 방폐장이 가동되면 받기로 했다"며 "지하암반이 약하고 지하수의 양이 많아 지하처분소의 건설 공정이 늦어지자 1500억 원을 빨리 받기 위해 위험한 허가를 내준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간사는 또 "올해 공기업 평가에서 최하 점수를 받은 방사선폐기물관리공단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 방폐물을 반입시킨 것"이라며 "임기가 끝나가는 민계홍 공단 이사장의 치적 쌓기"라고 지적했다.
두 단체는 이번 방폐물 반입뿐만 아니라 경주 방폐장 사업 전반에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성명서에서 "지하수가 하루 3000톤 이상 유출되고, 암반등급은 대부분이 4등급 이하여서 방사능 유출이 예측되고 있다"며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는 경주 방폐장의 모든 설계와 시공은 원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경주시 시의회도 이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이종근 한나라당 경주시 의원(원전국책사업특별위원회 위원장)은 "방폐장의 최초 공사기간은 24개월이었는데, 30개월이나 더 늘어지고 있는 것은 암반이 연약하고 지하수가 나오기 때문"이라며 "안전성 문제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이어 "지하처분소가 완벽하게 완공된 상태가 아니라면, 경주시 의회와 합의 없는 어떤 방폐물의 반입도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경주시 시의원 20여 명은 방폐물을 실은 운송트럭이 방폐장 앞에 도착할 때까지 정문을 막았고, 이들을 끌어내려는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환경단체, 시설에 대해 이해 떨어진다"
방사능폐기물관리공단은 이러한 논란에도 방폐물을 반입한 것은 "그동안 원자력발전소 임시저장소가 포화상태에 달해 운용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용식 공단 지역협력과 차장은 <오마이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인수저장시설의 안전설비가 돼 있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 "인수저장시설의 건물은 외벽 두께가 82센티미터나 되고 국가보안시설 '나'급으로 관리하고 있어 방사선 차단, 방수, 소방 등 안전시설이 갖춰져 있다"라며 "각 원전에 있는 임시저장소는 외벽 두께가 30센티미터 내외지만, 그럼에도 지난 30여 년간 안전하게 폐기물을 보관해 왔다"고 설명했다.
공단에 대한 낮은 평가 때문에 실적을 위해 방폐물 반입을 서두른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실적 문제가)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번 방폐물 반입의 본질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김 차장은 '다량의 지하수가 쏟아지고 암반이 약해 경주 방폐장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환경단체가 시설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맞섰다.
"지표수가 흐르면 지하수가 없을 수 없다. 그 물을 어떻게 잘 막느냐가 안전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도버해협을 건너는 터널이 있을 정도로 현대 토목공학 기술의 안정성은 이미 입증됐다.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서 만든 안전성분석보고서에서도 경주 방폐장에서 방사능 물질은 1400년 뒤에나 유출된다고 나왔다. 그때 유출되는 방사성물질은 이미 자연 그대로 돌아갔을 상태다. 또 지하처분소의 높이는 50미터로 파다 보면 연약한 암반이 나올 수 있는데 그런 곳은 외벽을 더 두껍게 해 대비하고 있다. 또 폐기물이 들어 있는 드럼통을 쌓은 후 그 사이는 또다시 시멘트로 채우기 때문에 물이 흘러들 틈이 없다. 안전성을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김 차장은 또 "공사기간이 30개월 늘어난 것은 당초 계획이 너무 촉박하게 잡혔기 때문"이라며 "외국 사례를 봐도 지하처분고를 건설하는 데는 50개월 이상 걸린다. 공사기간을 너무 의욕적으로 잡았던 것이 문제"라고 덧붙였다.
민계홍 공단 이사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동안 원자력발전소 임시저장소에 포화된 상태로 있던 폐기물을 공단이 안전하게 인수해 저장하면서 우리나라 원자력발전 운영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됐다"고 이번 방폐물 반입의 의미를 부여했다.
민 이사장은 방폐물 반입에 반대하는 목소리에 대해 "지역주민들 분들은 전혀 집회에 참여하지 않았다"며 "시의원들이 안전성을 우려하며 참여했는데, 방폐장을 유치하면서 받게 되는 지원 사업을 정부가 좀 더 원활하게 추진해 달라는 의도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편, 경주시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 전화통화에서 "경주시가 방폐물 반입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말하기는 어려운 상태"라면서도 "그래도 이번 방폐물 반입으로 국가지원금 1500억 원이 투입되는 것은 경주시로서는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