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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대책위원장 : "백악관은 월요일 공화당의 감세 정책에 대해 대응할 예정이죠. 최고 부유층 1%p의 세금을 올려서 그 돈으로 대학 학비 세금 공제 재원을 충당하자는 내용을 발표할 계획이잖아요. 오늘 밤 반대 의사를 밝히세요."
후보 : "왜요?"
선거대책위원장 : "대통령의 부하가 아님을 보여주는 거죠. 그 1%의 다수는 여기 살아요."
후보 : "세금 인상안,  내가 직접 작업한 거에요."

미국의 정치드라마 <웨스트윙>의 한 장면. '보수' 공화당과 '중도 진보' 민주당의 감세-증세 논쟁이 막 벌어질 참이다. 대통령의 핵심 참모로 일하다 캘리포니아 47 선거구 재보선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샘은 득표를 위해 백악관의 증세안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라는 선거대책위원장의 제안을 거절한다.

가상의 미국 대통령 제드 바틀렛(민주당) 집권 시기를 다룬 이 드라마에서 공화당은 양도소득세 15% 삭감을 골자로한 감세안으로 백악관을 압박한다. 하지만 백악관이 놓을 정책은 대담하게도 최고 부유층을 상대로한 1%p 증세다. 증세의 목적도 뚜렷하다. 대학 학비를 세금 공제 대상에 넣는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민주당이 마련한 안에 따르면 1년 수입이 최저임금 수준인 1만8746달러인 받는 '투 잡' 노동자, 평균 연봉이 4만1724달러인 미국 공립학교 교사는 대학 학비를 낼 경우 각각 세금으로 낸 321달러와 1251달러를 환급받을 수 있게 된다. 연봉이 15만 달러인 의사의 세금은 그대로이고 연간 1600만 달러가 넘는 수입을 챙기는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같은 최고 부유층은 소득의 1%만큼 더 세금을 내야한다. 부유층에게 세금을 걷어 서민층의 교육비 지원을 늘리는 것은 재임에 성공한 바틀렛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정치권에서 시작된 '복지' 주도권 다툼

이런 드라마 같은 일이 현실에서도 가능할까. 실제 국내 정치권에서도 복지 이슈를 선점하려는 주도권 다툼이 이미 시작됐다. 한나라당은 소득 하위 70%에 집중하는 '70% 복지론'을 제기한 바 있고, 민주당은 당헌에 당의 존재 목적으로 '보편적 복지 실현'을 못 박고 정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같은 보편적 복지가 발휘한 위력을 경험한 정치권의 조건 반사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지난 20일 오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사회보장기본법 전면개정 공청회'를 열기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지난 20일 오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사회보장기본법 전면개정 공청회'를 열기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남소연
특히 지난 20일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선 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가 '한국형 사회복지 모델'을 선보인 이후 논란이 뜨거워지는 양상이다.

박 전 대표의 구상은 수혜자의 소득을 보장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주거·보육·의료 등 생애주기에 따라 필요한 사회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생활을 다층적으로 보장하는 복지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전 대표는 이런 내용을 담은 '사회보장기본법 전부개정안'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사회 보장의 범위를 정하고 복지의 사각지대와 중복 지원 등 비효율을 없애기 위한 정책의 뼈대를 세우는 일차 작업인 셈이다.  사회보장 내용에 출산과 양육이 추가된 점도 눈에 띈다.

큰 정부와 복지 확대에 체질적 반감을 보여왔던 보수 진영이 복지론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진보진영에서도 일부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참여연대는 "보수정치인의 대표격인 박 전 대표가 복지국가에 대한 신념을 밝히고 정책비전을 제시한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여야를 가리지 않는 견제구도 여럿 날아들었다. 비판의 주요 초점은 재원 조달 문제였다. 복지 혜택 확대에 따라 필요한 재정이 늘어날텐데 이를 마련할 구체적 계획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같은 당의 심재철 정책위의장은 "복지를 늘리려면 세금을 더 거둬야 하는데 그 이야기를 감춘 것은 좀 솔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지적했다. 민주당도 마찬가지 비판을 퍼부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복지를 위한 구체적인 재정확충 방안이 없다"고 했고 전병헌 정책위의장은 "빈수레, 속빈 강정"이라고 했다.

박 전 대표 측은 이 같은 비판은 초점이 엇나갔다고 반박한다. 박 전 대표의 경제 가정교사로 통하는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은 "껍데기조차 보지 않은 사람들의 비판"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지난 20일 제시한 복지 정책은 전체 설계도 격인 밑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 재원 마련 대책이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 앞서 나간 비판이라는 지적이다.

이 의원은 "여러 제도와 재원 마련 문제 등 세부 계획에 대한 연구를 다 해놨다"며 "구체적인 방안은 차차 제시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의 경제통인 한 의원도 "박 전 대표가 이번에 발표한 안은 복지 정책의 기본 틀을 정비하겠다는 계획으로 필요한 일"이라며 "재원 마련에 관해 어떤 대책을 제시할 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복지 확대? 피해갈 수 없는 재원 조달 방안 논쟁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재원 조달 방안은 뜨거운 논쟁을 예고하고 있다. 재원 조달 방안은 곧 세금 문제와 연결되고 국가 재정 정책의 근간을 바꾸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에 따른 진통의 파고는 높을 수밖에 없다. '복지'를 화두로 정책 행보를 벌이는 박 전 대표로서도 이 문제는 언젠가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핵심은 진보와 보수 진영간 뚜렷한 전선이 형성된 조세감면 축소를 포함한 증세 여부다. 박 전 대표 측은 민감한 세금 문제에 대한 논쟁은 피하고 있다. 대신 기존 재정 지출 안에서 해법을 찾겠다는 입장이다.

이한구 의원은 "재원의 경우 기본 복지시스템에서 낭비되는 것이 굉장히 많은데 이 부분을 정리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세출 쪽에서 줄일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 비중과 GDP에서 세금과 사회보험료 총액이 차지하는 비율인 국민부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에 크게 못미치는 상황에서 세수 증대를 고려하지 않은 복지 확대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현재 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 비중은 OECD 회원국 평균이 20%에 가까운 반면 우리는 8%대에 불과하고 국민부담률도 OECD 평균 33.7%에 크게 못미치는 25.6%다. 정부가 세금을 적게 거둔 만큼 복지에도 충분한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의 감세 기조가 계속되면 국민부담률은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제주대 의대 교수)는 "기존의 재정 지출을 조정해 복지를 늘리겠다는 이야기는 한 마디로 거짓말"이라며 "사회복지 지출 비중이 절대적으로 낮은 상황에서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도 쌓인 돌의 높이는 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재원 조달 방법을 뺐던 '비전2030'의 실패

이런 점에서 참여정부의 정책추진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여정부는 2006년 저출산고령화와 사회양극화 심화에 대처방안으로 '비전2030'을 만들었다.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데 연간 50조 원씩 2030년까지 1100조 원의 재원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됐다. 참여정부는 당시 재원조달 방법으로 전액 증세, 전액 국채 발행, 증세와 국채 발행 혼합 등 3가지 방법을 구상했다. 하지만 증세에 대한 보수 세력의 알러지 반응에 증세의 '증'자도 꺼내지 못했고 비전2030은 '어떻게'가 빠져있다는 좌우의 비판 속에 빛을 보지 못했다.

사실 감세와 규제 완화를 중심으로한 작은 정부를 신봉하는 보수 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삼고 있는 박 전 대표의 사정은 더 나쁘다. 지난 대선 국면 당시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 질서를 세운다)를 들고 나온 원조 '부자감세'론자였던 박 전 대표가 지지층의 반발을 살 증세를 섣불리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22일 오전 청와대에서 보건복지부 2011년 업무계획을 보고 받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22일 오전 청와대에서 보건복지부 2011년 업무계획을 보고 받았다. ⓒ 청와대
증세라는 방울을 고양이 목에 다는 것은 어느 정치인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심각한 국가 부채와 재정 건정성에 대한 우려를 여러 차례 나타냈던 박 전 대표가 복지 확대를 이야기하면서 증세가 아닌 다른 재정조달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박 전 대표가 아버지의 꿈이었다는 '복지국가'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서는 지지층을 반발을 뚫을 수 있는 혁명적 용기가 필요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당장 정부 내에서부터 박 전 대표가 불을 당긴 복지 논쟁이 못마땅한 속내도 감지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보건복지부의 새해 업무보고 자리에서 "내년도 복지예산이 역대 최대다, 우리가 복지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수준"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자신의 복지 모델을 선보인 이틀 뒤 나온 대통령의 언급이라는 점에서 박 전 대표를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됐다.

아직은 지켜보고 있지만 박 전 대표가 추가로 들고 나올 정책의 강도에 따라 보수 진영 내부의 논란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지지층의 뜻에 반하는 과감한 복지를 주장할 경우 집토기를 놓칠 우려가 있고 반대의 경우에는 지지층 확대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복지' 가 박 전 대표의 대권 가도에 디딤돌이 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전망도 엇갈린다

박 전 대표의 복지 정책 논의에 참여한 정치권의 한 인사는 "복지 확대에 대해 여당 내부와 지지 기반인 보수층이 합의할 수 있으면서, 새로운 지지층을 확보하는 데도 부족함이 없는 복지의 수준을 찾기 힘든 게 사실"이라며 "향후 증세 문제를 포함해 전개될 복지 논쟁은 박 전 대표에게 늪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상이 대표도 "우리 사회가 복지 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누진적 증세를 포함한 적극적인 조세 및 재정정책이 필요하다"며 "박 전 대표가 과거 주장했던 '줄푸세'라는 구체적 정책 프로그램을 공식적으로 폐기하지 않는 한 그의 복지 담론은 대국민사기극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에필로그] 드라마 속 이야기는 해피엔딩... 우리 미래는?

다시 드라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드라마 속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 서민들의 교육비 지원을 늘리겠다는 공약을 내놓은 바틀렛 대통령은 재임에 성공해 두번째 임기를 시작한다. 미국 작가의 상상력은 복지 확대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부유층에 대한 증세를 공약한 대선 후보의 당선을 그렸다.

대한민국에서는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2년 우리 사회에서는 복지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의 논쟁이 치열하게 펼쳐질 것이다. 멍성은 이미 깔렸다. 작가 '대한민국'은 2012년이라는 미래 공간에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갈까. 그 드라마는 흥행에 성공할 수 있을까.

2012년의 드라마가 흥행하기 위해서는 바틀렛 정부의 1%p 증세안처럼 각 대선주자들이 펼쳐놓을 복지 정책은 필요한 재원의 규모와 조달 방안이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논쟁이 뜨겁고 생산적일 수 있다. 물론 상대의 정책에 대한 색깔론도 사절이다.


#박근혜#복지국가#부유세#웨스트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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