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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필자의 세례명이다. 한때는 전례부(성가대와 비슷하게 사회도 보고 노래도 부르며 미사를 이끌어가는 성가대와 비슷한 모임) 활동까지 하며 열심히 천주교에 다닌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천주교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면 고향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잃은 해미읍성과 해미순교성지는 특별히 가슴이 아팠던 장소이다.

그 옛날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길래…. 시대를 잘못 만난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한이 서린 해미읍성과 해미순교성지를 둘러보자.

서산해미읍성의 바깥쪽에서 바라본 모습
 서산해미읍성의 바깥쪽에서 바라본 모습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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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은 사적 제116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32-2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다. 이 성은 고려 말부터 많은 피해를 준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당시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해미로 옮기기로 하면서 충성되었다. 1417년부터 1421년까지 축성되어 1652년까지 병마절도사영성으로 자리를 지키다가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읍성이 되었다. 해미읍성은 고창읍성, 낙안읍성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읍성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있는 성 중에 하나이다.

성 밖으로 쌓여진 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글씨가 새겨진 것을 찾을 수가 있다. 성을 축조할 당시 전국에 동원령이 내려졌고, 그 책임을 다하게 하기 위해 지명을 새겨 문제가 생길 경우 그 지역에서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이렇게 치밀하게 보증을 세워놨으니 어느 누가 소홀히 돌을 쌓을 수 있었을까?

성 밖으로는 성벽보다 앞으로 돌출되어 있는 치성이 있다. 이는 성벽으로 돌진하는 적들을 정면뿐 아니라 측면에서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구조이다.

머리를 들어 성벽 위를 올려다 보면 뭉툭하게 튀어나온 돌들이 보인다. 이는 眉(눈썹 미)에 石(돌 석)자를 써서 미석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적이 사다리를 대고 올라섰을 때 돌이 굴러 떨어지며 방해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비가 올 때는 성벽으로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는 용도로도 사용된다.

해미읍성의 전경, 예전에는 장관을 이뤘던 읍성이 황량하기 그지없다
 해미읍성의 전경, 예전에는 장관을 이뤘던 읍성이 황량하기 그지없다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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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의 주 출입구는 진남문으로 다듬어진 돌로 만들어진 아치형 홍예문이다. 성문은 동, 서, 남 세곳에만 있으며 북에는 암문이 있다. 밖에서는 진남문이라고 불리는 이 성문은 안쪽으로 들어가면 진남루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며 그 용도가 변경이 된다. 진남루 아래 받침돌에는 한눈에 봐도 눈에 띄는 붉은색 글씨가 선명하다.

'황명 홍치 4년 신해 조'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단지 해미읍성을 부분적으로 손봤던 시기를 기록해 놓은 것이라고 문화해설사가 설명한다.

예전의 해미읍성은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을 비롯하여 관아와 객사등이 꽉 들어차 장관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읍성안의 모습은 황량하기 그지 없다. 2년 전 여름 이곳을 찾았을 때는 계절이 여름이라 푸르른 잔디밭이 생기를 더해줬었건만 군데군데 마른 나무만 서 있는 겨울의 모습은 더없이 쓸쓸하다.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매달았던 회화나무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매달았던 회화나무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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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 안쪽으로 들어서 쭉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둥그런 건물이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양반댁 가옥을 재현해놓은 듯 보이지만 이곳은 천주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 있던 옥사를 발굴 작업한 뒤 복원, 재현해놓은 곳이다. 옥사가 둥근 형태로 만들어진 것은 담을 타고 올라가기 힘들게 하기 위해서다.

해미읍성의 옥사는 1935년에 간행된 <해미 순교자 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하였으며 내옥과 외옥이 있고,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되어 있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 및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옥사의 앞마당에서는 곤장체험을 할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고, 감옥의 모습들도 재현되어있다.

옥사 앞에는 큰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가 바로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머리가 매달렸던 무서운 나무이다. 1790년~1880년대에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현재까지도 그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세월이 200년이나 훌쩍 지난 지금도 그 나무에서 고통의 기운이 느껴져 피비린내가 올라오는 것 같다. 수많은 이들이 아파하는 모습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울화가 치밀다가도 내가 시대를 잘못 만났더라면 이 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섬뜩해진다. 왠지 남일같지 않게 느껴지는 건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운명이 될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겠지?

해미읍성의 외삼문, 신분에 따라 들어가는 문도 다르다.
 해미읍성의 외삼문, 신분에 따라 들어가는 문도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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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의 왼편 안쪽으로는 객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임금이 계신 곳을 상징하는 곳으로 관리들이 임금에 대한 예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파견을 나온 조정의 관리들이 묵어가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가운데 3칸의 정청을 사이에 두고 동익헌과 서익헌이 있었으며, 문관은 동익헌에서 무관은 서익헌을 이용하게 하였다. 이는 같은 관리라 하더라도 무관과 문관에 차이를 두었던 시대상을 알 수가 있는 부분이다.

객사의 왼편, 진남문에서 이어지는 길의 끝에는 해미읍성 외삼문이 있다. 이 외삼문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경영장이 정무를 보던 동헌으로 통하는 문으로 3개의 문이 각각 관직이나 지위에 따라 지나다닐 수 있음이 달랐다. 문 하나를 지나는데도 지위와 신분을 따졌다니 어디 서러워서 살겠는가. 그 시대에야 그것이 당연시 여겨졌을 수도 있겠지만 다시금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고마워진다. 괜히 지체 높으신 분들이나 다녔다는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굳게 잠겨있다. 설마, 대통령이라도 오면 열리는 건 아니겠지?

외삼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이 동헌이다. 동헌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겸영장의 집무실로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해미 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 군, 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를 겸한 지위였다고 하니 지금의 도지사급 정도 되나 보다.

동헌의 뒤쪽으로는 동헌부속사와 책실이 ㄱ자의 형태로 이어져 있다. 동헌부속사는 관아의 물품을 보관하고 출납을 맡아보는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던 곳이며, 책실은 병마절도사 또는 현감겸영장의 사적인 일을 돕거나 그들 자제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던 곳으로 일명 책방 또는 책사라고도 한다.

해미읍성 언덕위의 정자 청허정, 최근에 목재로 보수작업을 했다.
 해미읍성 언덕위의 정자 청허정, 최근에 목재로 보수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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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의 왼쪽 쪽문을 통해서 나오면 읍성 뒤쪽의 정자 청허정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길이 통한다. 계단을 오르다 옆을 내려다 보면 나무에 가려져 조금은 답답하지만 외삼문 안쪽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계단을 오르면 쭉 뻗은 길 끝에 한폭의 그림처럼 정자가 서있다. 청허정은 시멘트로 지어졌다가 최근에 보수공사를 거쳐 나무로 새로 지어졌다. 이곳은 읍성 내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청허정의 옆으로는 소나무숲이 펼쳐진다. 키큰 소나무들 사이로 난 길은 호젓한 산책길로 안성맞춤이다. 솔향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길을 따라 나오면 성곽을 따라 해미읍성을 휘 둘러볼 수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읍성의 모습이 정갈하고 반듯하여 마음이 다시금 편안해진다.

해미순교성지의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 대강당이 둥근것은 해미읍성의 모습을 딴 것이다.
 해미순교성지의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 대강당이 둥근것은 해미읍성의 모습을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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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해미순교성지가 있다. 이곳은 신자들의 성금으로 지어졌으며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대강당의 모습은 해미읍성의 모형을 본 따서 둥근형태이다.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의 각 지역에서 잡혀온 1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생매장당한 곳이라니 입구부터 숙연해진다.

문화해설사는 충청도 지방에 유독 천주교인들이 많았던 이유를 지형적 특성과 유교 사회라는 문화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당시 모든 문물이나 종교는 중국을 통해서 유입이 되었고, 충청도가 서해에 위치해 있다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가장 근접했으며, 또한 신분 차이가 명확하던 조선시대에 하류층민들이 많이 거주하던 충청도에서는 천주교의 평등사상에 대한 갈망이 컸을 것이라고 한다.

해미순교성지가 '여숫골'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진 데는 유래가 있다. 천주교 신자들을 무더기로 살생을 할 때 "예수마리아~ 예수마리아~"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여숫골로 통영되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해미순교성지 전시관, 박해의 현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품들이 있다
 해미순교성지 전시관, 박해의 현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품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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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성지 안쪽으로 들어서면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당시 박해의 현장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형태로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 구석의 유배참배실에는 여숫골에서 발견된 순교자들의 치아와 머리털들이 안치되어 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영혼을 달래본다.

'부디 그곳에서는 편안하소서.'

전시관 한켠에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옛 충남 대덕군 기성면 오리 공소에서 종 대신 사용되었던 뿔나팔은 신자들을 부르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진둠벙 위쪽 뚝 밑에서 발견된 휘광이칼은 박해 당시에 형리들이 휘광이에게 참수용으로 사용케 한 것으로 추정되며, 해미읍성에 있는 회화나무에서 잘려나온 나뭇가지도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 비록 조형물이지만 줄에 묶여 끌려가는 한 어르신의 표정에 서글퍼진다.

해미순교성지안에 보존되어 있는 자리개돌, 당시의 혈흔이 아직도 남아있다.
 해미순교성지안에 보존되어 있는 자리개돌, 당시의 혈흔이 아직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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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을 나오면 천주교 박해의 또 하나의 상징물인 자리개 돌이 보존되어 있다. 이 자리개 돌은 해미읍성 서문 밖 수구 위에 놓여 있던 돌다리로서 병인 대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자리개질로 처형했던 사형도구이다. 서문 밖 순교지에 보존되어 있던 것을 해미도시계획 도로개설로 인하여 여숫골로 옮겨 보존하고 있으며, 그곳에는 모조품으로 꾸며져 있다. 사람을 묶은 채로 돌에다가 메어쳐 처형을 했다니 이처럼 잔인할 수가 없다. 몇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돌에 혈흔이 남아있으니 이는 그들의 억울한 한이 맺힌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을까.

많은 교인들이 거꾸로 쳐박혀 처형당한 진둠벙
 많은 교인들이 거꾸로 쳐박혀 처형당한 진둠벙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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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개돌 옆으로는 진둠벙 또는 죄인둠벙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처참한 처형의 현장이 남아있다. 둠벙은 '연못'의 사투리로 이곳으로 신자들을 끌고와 팔이 묶인 채 거꾸로 쳐박아 죽였다고 한다. 물밑에 깔린 낙엽의 빛깔 때문인지 물색이 유독 붉어보인다. 마치 핏빛처럼….

순교성지 깊숙한 곳에는 노천성당이 있어 미사나 행사가 거행되기도 하며,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해미순교탑도 세워져 있다.

종교를 버린지 10년도 훌쩍 넘은 지금, 해미순교성지의 십자가의 길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14처를 다 돌 수는 없지만 1처에서만이라도 그들의 한을 달래주고 싶어 오랜만에 가슴에 십자가를 그어본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덧붙이는 글 | http://dandyjihye.blog.me/140121061811 개인블로그에 게재된 글입니다.



태그:#해미읍성, #해미순교성지, #여숫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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