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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0년 11월 22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417호 법정에서 열린 국민참여재판을 함께 방청한 참가자의 방청기입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함께해요 국민참여재판'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배심제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나누고자 합니다. 누구나 언제든지 배심원이 될 수 있는 '국민참여재판'을 옆에서 지켜본 방청자들의 겸험을 통해 여러분도 함께 배심원단이 되는 간접체험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소중한 방청기를 써준 이아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아란(신천고등학교 교사)

올해 고등학교 1학년 사회 수업을 처음 맡았다. 내가 담당한 파트는 정치·경제·문화 영역의 개론 부분이었는데, 이 모든 영역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민주(民主)'라고 보았다. 그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수업 계획을 세우던 중 국민 주권의 핵심 축인 '사법권'의 측면은 우리학교 학생들과 학습할 기회가 거의 없음을 알게 되었다. 1학년 교과 내용에서도 거의 다루지 않고, 우리학교는 '법과 사회' 과목도 선택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법'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은 학생들에게 사법 주권에 대한 토론의 기회를 갖도록 하고자 여러 프로그램을 살피던 중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의 '국민참여재판 함께 방청하기' 프로그램을 찾게 되었다.

지난 2010년 11월 22일 진행된 서울중앙지법 국민참여재판 방청에 참가한 참가자들. 신천고 고등학생 8명이 함께 했다. 방청기를 써주신 이아란 선생님은 사진 맨 왼쪽
 지난 2010년 11월 22일 진행된 서울중앙지법 국민참여재판 방청에 참가한 참가자들. 신천고 고등학생 8명이 함께 했다. 방청기를 써주신 이아란 선생님은 사진 맨 왼쪽
ⓒ 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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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방청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는데, 학교 행사 일정과 겹치지 않는 11월 22일 프로그램 참여를 결정했다. 다행히 그날 예정된 재판은 절도 관련 사건이어서 학생들이 사건의 자극적 측면보다는 재판의 흐름과 의미에 주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교에는 '사회교과 진로체험활동'으로 신청하고 예산을 지원받았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예정된 프로그램이기에 그야말로 관심이 많고 끝까지 버틸 수 있는 학생들로 참여를 제한한 결과, 8명의 학생이 모였다.

'사회교과 진로체험활동'으로 참가

참여 신청 후 참여연대에서 이메일로 보내주신 자료를 중심으로 사전 모임을 열었다. 학생들 대부분은 '법=재판, 형벌' 등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권리의 측면으로 바라보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재판'에 대해서는 주로 드라마나 영화 속의 스펙터클한 법정 공방의 장면을 통해 정보를 얻었고, 그 중 외계어같은 전문 법률 용어들, 권위로 무장된 판사, 간담을 서늘케 하는 검사의 날카로운 심문, 판세를 뒤엎는 변호사의 감동적 변론 등을 핵심 이미지로 떠올렸다.

그러다 보니 '국민참여재판' 제도에 대해서 낯설어하거나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 동안 '전문적 법률 지식'이 부족한 일반 시민이 사건을 이해하고, 평결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기존 법 질서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학생들도 있었다. '평범한 시민의 상식과 감정'이 전문 법률 지식을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 법률인은 직업적으로 재판에 임할 테지만, 시민 배심원은 피고의 인생이 달려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신중하게 접근할 것이다, 전문 법률인들은 대개 엘리트로만 살아와서 오히려 삶의 경험이 다양한 배심원들보다 시야가 좁을 수 있지 않겠냐는 등의 의견이 나왔다. 실제 국민참여재판의 방청 이후에는 학생들의 의견이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했다.

11월 22일 재판 방청 당일, 학생들과 일명 '짐짝 통근버스' 3200번을 타고 경기도 시흥에서 강남으로 향했다. 서울중앙지법 서관에서 참여연대 이진영 간사님을 만나 311호 형사 중법정으로 들어갔다. 법정에 들어서니 그 발랄하던 아이들이 자못 숙연해졌다. 법정에서 떠들면 바로 잡혀간다는 모 선생님의 안내(?)가 떠올랐던 모양이다. 311호 법정에서는 한 시간 정도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국민참여재판 제도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참여연대 사법감시팀 박근용 팀장님은 기존 재판, 다른 국가의 사례 등과 비교하면서 국민참여재판 제도의 의미와 진행 절차, 기대 효과, 배심원 선정 과정 등에 대해 상세히 말씀해주셨다. 실제 법정 안에서 안내가 이루어졌고, 다양한 사례를 중심으로 설명해주셔서 그런지 학생들의 집중도가 높았다. 다만, 안내 자료가 파워포인트 양식으로 되어있었는데, 실제 파워포인트를 활용하거나 아니면 자료를 일반 문서 양식으로 만들어주시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

버스를 타고, 경기도 시흥에서 강남으로

자리를 옮겨 참여재판이 열리는 417호 형사대법정 앞에서 한 시간 남짓을 기다렸다. 배심원 선정이 늦어진 까닭인데, 이곳에서도 박근용 팀장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직접 지켜볼 수는 없었지만, 팀장님의 설명 덕분에 법정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배심원 선정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들어선 417호 법정에는 일반 형사법정과 달리 정면 왼편으로 배심원석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맞은편과 방청석 쪽으로 스크린이 설치되어 재판 과정을 안내하고 있었다. 배심원뿐 아니라 방청석까지 배려하는 법정은 처음인지라 나 또한 설렘이 일었다. 배심원이 보는 화면 자료를 방청석 쪽 스크린에도 동시에 보여주니 방청석에 있는 학생들 또한 재판에 집중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처럼 뜨겁게 펼쳐질 법정 공방을 기다리던 아이들의 바람과 달리, 공판은 재판 절차에 대한 판사의 설명으로 시작되어 검사의 모두 진술로 이어지면서 꽤 딱딱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검사와 변호사 양쪽 모두 어려운 법률 용어를 사용하고, 말의 표현이 명료하지 않아 PPT 자료가 제시되지 않았다면 요점 파악조차 힘겨웠을 같다. 저런 법정에서 피고인이나 피해자가 자기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권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그냥 판사와 검사, 변호사 그들만의 리그로 끝나버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법정의 한편에 마련된 배심원석의 존재는 그 우려를 걷어내게 해주었다. 판사는 배심원과 피고인, 방청객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놓친 부분이 없는지를 살피며 용어를 쉽게 풀이하고, 요점을 재정리해주었다. 배심원이 없었다면 판사는 저토록 친절하고 부드럽게 재판을 진행해 나갔을까 싶었다. 판사는 피고를 향해 진술 거부권이 있음을, 그리고 배심원들을 향해 '범죄 입증의 책임'은 피고가 아니라 검사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피고인=죄인'이라는 선입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당연한 절차이겠지만, 이미 20차례가 넘는 절도를 행한 바 있는 피고에게도 그러한 권리가 있음을 이야기하는 재판부의 설명에 왠지 마음이 먹먹해졌다.

배심원이 없었다면 판사는 저토록 친절했을까

공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오늘 재판의 쟁점이 절도에 대한 유무죄가 아닌, 이미 100만 원의 절도를 인정한 피고에게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상습절도죄) 적용을 할 것인가, 아니면 단순 절도로 볼 것인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피고는 자수, 자백하고 피해액까지 변제한 상태인데다가 피해자조차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증언하였다. 학생들은 유무죄의 결론이 이미 나와 있는 상황이라 재판의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다소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미 수차례의 절도로 처벌을 받았던 피고의 '상습성'에 대한 판단이 새롭게 일자리를 찾고 결혼을 앞두고 있던 피고를 다시 6년 이상(최대 무기까지) 감옥에 보낼 수도, 혹은 1년 이하의 징역이나 벌금형에 그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재판의 무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상습성'에 대해 검사와 변호사, 판사, 배심원 모두 견해가 다를 텐데 과연 어떤 판결이 나게 될까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으며 큰 관심을 보였다. 배석 판사들조차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던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판사와 검사, 변호사, 배심원들을 주시하면서 재판에서 한몫을 해내고 있었다.

오후 5시, 방청 프로그램에서 예정한 시간을 지나 법정을 나서게 되었다. 정리 모임을 위해 다시 311호 법정으로 향하면서 재판의 증인 심문 과정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검사의 태도가 너무 강압적이에요", "증인을 범인 취급하면서 추궁하면 안 되잖아요" 등등 주로 검사의 심문 태도에 대한 불만들이 많았다. 그러면서 참여재판에서도 이 정도인데 배심원이나 방청객이 없는 재판에서는 증인이나 피고인에게 얼마나 더 함부로 하겠냐며 재판을 지켜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들을 쏟아내었다.

"증인을 범인 취급하면 안 되잖아요"

다음날, 학교 자습 시간에 모여 각자 적은 참관 후기와 이진영 간사님께서 이메일을 통해 보내주신 재판 결과를 바탕으로 재판 방청에 대한 정리 시간을 가졌다. 징역 3년을 구형했던 검사와 달리, 배심원들은 피고의 상습성을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고, 재판부는 징역 8월을 선고했다고 하였다. 결과를 들은 학생들은 검사의 구형과 배심원의 의견이 달랐다는 것, 재판부과 배심원의 의견과 거의 일치하는 판결을 했다는 것에 다소 놀라워했다.

그리고 '재판 방청을 통해 법이 TV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존재하는 것임을 느꼈다', '시종일관 성실하고 진지하게 재판에 임하는 배심원들의 태도를 보며 참여재판에 대해 신뢰를 갖게 되었다', '자료를 세세하게 같이 살펴보니 재판을 이해하는 데에 어렵지 않았다' 등의 의견들을 나누었다. 참여재판과 기존 재판을 비교해보면 좋겠다며 일반 형사재판 방청을 가보자는 제안도 나왔다. 대체로 참여재판에 여러 한계가 있을 지라도 다양한 참여를 통해 사법 권리가 최대한 지켜질 수 있다는 것에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 사회에서 '법'은 여전히 학생들에게나 일반 성인들에게나 어렵고 두렵게 여겨지는 영역일 것이다. 그러나 참여 재판 방청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배심원의 활동을 간접 경험하면서 학생들과 나는 그저 파헤쳐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 또한 충분히 설명할 기회를 가졌던 피고인, 타인의 삶의 무게를 기꺼이 지고 재판에 임하던 배심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법'은 다만 전문인에게 위임해 둘 수밖에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눈이 되고 손과 발이 되어 참여하고 지켜야 할 중요한 권리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참여연대 홈페이지에 함께 실렸습니다.



태그:#국민참여재판, #함께해요 국민참여재판, #이아란, #사회교과 진로체험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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