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다, 왜 꼭 울진이어야 했을까?
나는 집착이 강하고 변덕이 심한 편이다. 혹자는 열정적이라는 좋은 표현을 써주기도 한다. 무언가를 하고 있다가도 다른 것에 흥미를 느끼면 당장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책을 읽다가도 남은 설거지가 생각난다면 더 이상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랑이나 일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좋아지면 반드시 표현을 해야 하고 직장에 다니다가도 다른 일을 하고 싶어지면 가차없이 회사를 박차고 나와야 한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진득함을 갖고 즐기는 것이 여행이다. 그런데 이젠 여행에서조차 성격이 드러나고 있다.
겨울 바다가 그렇게 생각나더니, 결국 울진에 꽂혀버렸다. 재작년 늦가을에 다녀왔던 울진 죽변항 인근의 바다가 머릿속에 그려오던 겨울 바다의 모습과 가장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겨울 바다는 좀 더 가까운 곳에서도 찾을 수 있을 거라고들 말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마음이 그곳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데….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나의 첫 번째 혼자 여행, 울진 죽변으로.
혼자 떠나는 첫 여행, 울진 겨울 바다생각이 확고해지자 바로 울진행 버스표를 예매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일 또 스스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게으름을 피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011년 1월 5일 오전 7시 10분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
새벽 4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시계는 오전 5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울리는 알람을 두 번이나 끄고 잠이 든 것이다. 자려고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잠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세수만 간단히 하고 부랴부랴 챙겨서 집을 나선 시간은 오전 5시 45분. 25분 만에 챙기고 나오다니 급할 땐 초능력을 발휘하는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얼굴에 분칠도 좀 했는데 말이다.
마을버스를 타고 나와 지하철 2호선에 몸을 싣고 동서울터미널로 향했다.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 틈에 낀 여행자는 세상을 다 얻은 듯 여유로워진다. 그들에겐 참 미안한 말이지만 말이다.
문득 생각나는 글귀가 있어 끼적거리다가 내릴 곳을 지나쳐버렸다. 오전 6시 40분 구의역. 그나마 다행이다. 한 정거장만 되돌아가면 되고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오전 6시 47분, 넉넉하게 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아침 끼니를 때울 김밥과 물을 산 후 정확히 오전 7시에 버스에 승차했다. 자리는 내가 좋아하는 맨 앞자리, 옆 사람과 눈치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는 3번 싱글석.
이제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 설렘으로 심장이 뛴다.
버스는 동해, 삼척, 호산을 경유해 죽변정류장에 도착했다. 작게나마 터미널이 있을 줄 알았는데 매점과 매표소가 한 가게에 있는 간이정류장이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죽변에 정류장이 없었다면 올 엄두도 못 냈을 거야! 매표소 안쪽으로 들어가 서울로 가는 마지막 차편을 알아보고 길을 나선다.
출발 전 지도만 봤을 때는 정류소에서 죽변항까지 내내 바다를 바라보며 걸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게 웬걸! 도로 양쪽으로 민가들이 줄지어 서 있어서 길을 걸으며 바다를 만끽하는 건 어렵다. 10m쯤에 한 번씩 숨바꼭질하듯이 머리카락을 살짝살짝만 내놓아 날 애타게 한다.
그나마 도로 왼쪽 주택들 담장에 그려진 아기자기한 벽화들이 눈요깃거리를 제공해준다. 아직 몇몇 주택의 담장에만 그려져 있지만 울진의 특성을 살려 잘만 꾸며준다면 죽변정류소에서부터 죽변항까지의 길도 가치가 상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길을 따라 10분쯤 걷다 보니 '폭풍속으로 세트장'이라는 반가운 글씨가 쓰인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길이 미끄러워 천천히 걸었을뿐더러 사진까지 찍어 10여 분이지, 그런 게 아니었다면 조금 단축이 됐을 것이다. 더구나 길은 경사가 전혀 없는 평지고 포장도 잘 돼 있다. 표지판을 지나면 바로 사거리다. 길은 왔던 길을 제외하고 세 갈래로 갈라진다. 친절하게도 표지판이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 직진.
아무래도 안 되겠다. 민가들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항구의 모습이 자꾸 시선을 잡아끈다. 계속 직진을 해야만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 있지만 잠시 길을 틀기로 한다.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니 죽변항이 펼쳐진다. 바닷가에 길게 늘어선 횟집에서는 손님을 맞을 준비가 한창이다.
가게 앞에서 하얀 김을 뭉게뭉게 피우며 대게를 삶고 있고, 가게 앞 수족관에는 제철을 만난 대게가 조금의 틈도 없이 빼곡히 몸을 맞대고 있다. 경매가 끝난 시장은 한산해졌고, 어선 위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아주머니들의 손만 바쁘다. 다가가 말 한마디 건네고 싶지만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의 소심한 성격을 탓하며 다시 가던 길을 나선다.
큰길 쪽으로 나와 다시 길을 걷는다. 2년 전 '폭풍속으로' 세트장을 가기 위해서 언덕을 올라갔었고, 그 언덕 아래 마을은 아직도 생생한데 눈앞에 나타나질 않는다. 한 번 와봤던 곳이라고 자신 있게 길을 틀어 항구로 들어갔는데 후회가 되려고 한다. 점점 조바심이 생기고 불안해진다. 결국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물어본다.
"저기요~ 폭풍속으로 세트장 갈려면 어떻게 가야 해요?""더 가야 돼요. 쭉 가다가 다른 사람한테 또 물어보세요.""네. 감사합니다."다른 사람한테 또 물어볼 필요도 없다. 2분 정도 걸었을까? 폭풍속으로 세트장 표지판이 떡하니 나타난다. 큼직하니 눈에 잘 띄기도 하지. 표지판 뒤편 대각선으로 익숙한 언덕이 보인다. '하아…. 드디어 도착했다.'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 그곳에 있었다죽변정류소에서 '폭풍속으로' 세트장 입구까지는 내 걸음으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죽변항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다 보면 20~30여 분이 걸리겠다.
세트장으로 오르는 언덕길을 들어서는데 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모양새로 보아 인도와 차도를 나누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전에 왔을 때는 어땠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 걸로 보아 불편함을 못 느꼈던 것 같은데 굳이 국민의 혈세를 이런 곳에 쓸 필요가 있나 싶다. 공사는 분명 연말에 시작했겠지?
언덕은 약간의 경사가 있다. 하지만 길이가 긴 편이 아니라서 올라가는 데는 버겁지 않다. 요즘 너무 운동을 안 했더니 약간 숨이 차오른다. 서울로 돌아가면 체력관리 좀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어본다.
3분여쯤 걸어 오르막이 끝나는 곳에 울진항로표지관리소가 있다. 관리소 안쪽에는 아담한 정원이 잘 꾸며져 있다. 죽변항을 지키는 하얀 등대가 외로이 서 있고 정원에는 죽변등대의 조형물과 벤치 몇 개가 놓여 있다. 조형물은 동해안의 수평선 너머로 밝게 떠오르는 태양과 잔잔하게 일렁이는 파도 위를 꿈과 희망을 안고 항해하는 돛단배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100여 년간 큰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온 등대가 앞으로도 그래주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만든 것이다. 조형물에 담긴 의미처럼 꼭 그렇게 되기를 바라본다.
항로표지관리소를 나와 몇 발자국을 떼니 눈앞에 푸른 바다를 뒤로 한 '폭풍속으로' 세트장이 눈에 들어온다. 저 깊은 곳에서부터 가슴이 벅차오른다. 다시 봐도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연신 싱글벙글이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날씨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구름이 살짝 덮은 하늘이다. 그래도 괜찮다.
'그래. 내가 너네를 만나려고 여기까지 왔어.'푸른 바다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주황색 지붕의 하얀 교회건물도, 절벽 위에 지어진 드라마 주인공의 집도 그대로다. 반갑다. 그리웠다. 교회 앞 돌담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을 바라보며 기분을 만끽해본다.
주인공의 집을 오른쪽으로 끼고 길을 내려가니 또다시 그리웠던 풍경이 기분을 둥실둥실 떠오르게 만든다. 바다 앞으로는 몇 채 안 되는 가옥들이 둘러져 있고, 누가 봐도 하트 모양인 자갈해변이 펼쳐져 있다. 바닷물 위로 불쑥불쑥 솟아난 바위를 때리는 하얀 파도마저도 그리웠다. 이렇게 말하면 그리움을 너무 남발하는 것이 되는 건가?
바다 앞에 놓인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끼룩끼룩 갈매기 소리도, 촤아촤아 부서지는 파도소리도 음악이 된다. 얼마 전에 큰맘 먹고 질러버린 패딩 점퍼가 한몫 단단히 하는지 춥지가 않다. 한참을 앉아서 멍하니 바다를 쳐다보는데 바위 위에 홀로 서 있는 갈매기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꽤 오랫동안 서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굴 기다리는 걸까? 다리를 다친 걸까? 꼿꼿이 서 있는 걸 보니 다친 것 같지는 않다. 나처럼 혼자 여행을 온 걸까? 잠시 후 다른 갈매기가 날아든다. '그래. 약속이 있었나 보다.'
둘은 그렇게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더니 늦게 온 놈이 다시 떠나고 잠시 후 다른 한 놈도 날아갔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둘의 러브스토리가 하나 만들어졌다. 누구에게 들려주기도 창피한 이야기.
이곳은 고기도 잘 잡히나 보다. 벤치에 앉아 있는 사이에 벌써 3대의 차가 들어왔다. 한 대는 연인들이 타고 있었고, 나머지 두 대에서는 낚시꾼들이 내렸다. 아들 둘과 함께 온 아빠도 있고, 혼자서 온 사람도 있다. 저 멀리 갯바위에 올라서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주변으로 바위를 때려대는 거센 물보라가 아찔하다. 추운 날씨에 위험을 감수하고 서 있는데 고기라도 많이 낚아야 할 텐데…. 하긴, 한겨울에 이렇게 나올 정도면 그냥 낚시 자체를 즐기는 거겠지.
마음 같아선 바다 바로 앞에 있는 펜션에서 1박이라도 하고 싶지만 오늘은 준비가 안 됐다. 다음을 기약하며 해변을 빠져나오는데 한 연인이 사진 좀 찍어달라며 카메라를 내민다. 방금까지만 해도 행복하던 기분이 갑자기 가라앉는다. 쳇!!
2011년, 혼자 떠나는 여행이 잦아질 듯하다세트장 앞쪽으로는 대나무 오솔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세트장으로 오기 위해 걸어왔던 언덕길로 나갈 수가 있다. 오솔길로 들어서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 돌아보니 방금 전 그 연인이다. 남자는 여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여자는 포즈를 취해주며 모델놀이를 즐긴다. 이 사람들이 왜 하필 내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건지 원망스럽다. '나도 서울 가면 남자친구 있다구!'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다가도 막상 지금은 혼자임에 쓸쓸해진다. 변덕쟁이.
오솔길은 넓지 않아 혼자 조용히 걷기 참 좋다. 나무가 동굴처럼 둘러진 대숲동굴은 아늑함마저 느끼게 해준다. 숲길 중간 중간 전망대 데크가 마련되어 있어서 눈앞에 펼쳐진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
대나무 숲을 나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배가 고프다. 먹은 거라곤 아침 끼니를 때운 김밥 한 줄이 전부. 아직 한 번도 식당에 혼자 가본 적이 없는 나. 죽변항 근처에서 만만한 식당을 찾다가 사거리까지 와버렸다. 참고 그냥 서울로 돌아갈까 하다가 모험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마침 만만한 김밥천국이 나왔지만 손님이 있다.
왠지 용기가 나지 않아 두리번거리다 손님이 없을 것 같은 식당을 발견했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메뉴인 칼국수 전문점. 좋아! 여기로 결정. 용기를 내어 들어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주문을 하고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혼자 떠나보기, 식당에서 혼자 밥 먹기. 모든 것을 온전히 스스로 해야 하는 여행. 어쨌든 성공이다. 이제 자신감이 조금 생긴 것 같다. 2011년 혼자 떠나는 여행이 잦아질 예감이 든다.
덧붙이는 글 | http://dandyjihye.blog.me/140121218906 개인블로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