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27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은 여름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며 가을을 초대하는 빗줄기가 하늘을 적시고 있었다. 출국시간을 기다리며 가족들과 몇몇 지인들에게 안부를 남기는 목소리도 빗소리를 따라서 축축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빈상의 자식으로 자랐지만 자식 공부를 위해서라면 일수를 써서라도 장사를 하시던 어머니 덕분에 서울의 한 대학교를 졸업하던 게 1994년 8월이었다. 단칸방에서 덩치 큰 여섯 식구가 살면서도 자식만은 대학을 보내겠다는 어머니의 의지가 없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또 정작 본인이 공부를 위해 서울로 가고 싶어했지만 장남의 중압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형의 양보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졸업을 하는 같은 달에 이름도 처음 들어본 회사에, 우연히 손에 들어온 지원서를 들고 와서 취직을 했다. 당장의 호구가 필요했고, 부모님께 그럴듯한 자식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국회에서도 '신도 감추어 놓은 직장'이라는 소리를 듣는 그 회사에서 만으로 15년에 7일이 빠진 세월을 다녔었다.
그리고 지금, 캐나다의 작은 시골마을인 메리트(Merritt)에서 홀로 새해를 맞았다. 벌써 4개월이나 됐다.
회사를 그만둘 때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 '왜 그만두냐?'였고, 캐나다에 잠깐 다녀온다고 했을 때는 '왜 가느냐?'였다. 사실 두 질문은 같은 물음이었고, 결국 '앞으로 뭐 해먹고 살려고 그러는 거냐?'의 다른 표현인 셈이다. 회사를 그만둔 이후로 사람들의 '왜?'라는 질문처럼 난감한 질문이 없다.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기도 하거니와 굳이 대답할 가치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왜?'라는 물음에는 두 가지가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나는 역시 먹고사는 문제의 중요성이다. 점점 천박해져 가는 자본주의의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의 관심(혹은 걱정)은 어쩔 수 없이 저놈이 뭐해먹고 살려고 그 좋은 직장을 떠나 떠도는가? 이다.
나 또한 하루 세끼를 꼬박 먹어야 사는 인간이다 보니 이것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인식은 그리 어려운 것만도 아니었다. 조금만 돌아봐도 나는 태어나서부터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더 잘 먹고 살아왔으면 살아왔지 결코 굶거나 악화된 적이 없었다. 일수를 쓸 일도 없었고, 아이들 손잡고 단칸방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이 글 내용하고는 상관없지만 이 대목에서 우석훈 교수도 책에서 언급했듯이, 조금 앞세대로서 지금의 88만원 세대들에게 미안한 맘은 어쩔 수 없다).
따라서 더 정확히 말하면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라기보다 '더' '잘' 먹고 사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더'라는 말을 좇다보면 죽기 전에는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 또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이런 시점에서 '더'를 좇는 시간에 '내가 추구하는 행복'을 선택하는 것 또한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미래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고 정해진 것도 없다. 돈이건 행복이건 무한정 '더'로 갈 수도 있고, 무한정 '덜'의 나락으로 후퇴할 수도 있다. 바란다면 '더'도 '덜'도 말고 그냥 지금처럼만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것 또한 과한 욕심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여 간혹 지인들에게 하는 '돈 떨어지면 노가다라도 해야지'는 어쩌면 내가 한 대답들 중에 가장 진솔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점점 불안정해져 가는 회사원으로서 가지는 불안감이 작용한 호기심이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악독한 원천기술인 '경쟁'이라는 말이, 많은 회사들을 그리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의 생존에의 의지는 한번 칼질에 간당간당해져 버린 닭의 모가지가 된 지 오래다. 이렇다 보니 예전처럼 예측가능한 회사원의 생존 유효기간은 폐기된 지 한참이다.
결국 '경쟁'이란 놈은 개인의 사적 행복은 언감생심이고 조직의 행복(생존 유효기간)조차 만들어주지 못한다. (자신이 조직 내 경쟁에서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면서 그래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고 있다고 자위하는 사람에겐 딱히 할 말도 없고,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미래를 점쳐보기라도 하듯이 한번 지켜보겠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 '왜?'라는 말속에 녹아있는 셈이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나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왜?'란 질문에 답할 마음이 전혀 없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는 건 당연하지만, 설령 당분간일지언정 그 '무엇'을 좇아가면서 시간을 소비하고 싶지는 않다. 결국은 '무엇'을 하며 살겠지만 내가 여기서 보내는 시간이 그 '무엇'에 경제적으로든 기능적으로든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나의 관심은 이렇게 살아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그냥 이렇게 살고 싶을 뿐이기 때문이다. 2011년 1월 3일,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시기나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추구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정하지 않는 삶', 이것이 요즘 내가 쳐놓은 행복의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그리운 건 그리운 대로 놔두고 미안한 건 미안한 대로 놔두고 그렇게 떠나온 이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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