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어빙의 사무실에서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로스는 아프간전을 비롯해 미국의 대외정책 전반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한다.
 어빙의 사무실에서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로스는 아프간전을 비롯해 미국의 대외정책 전반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한다.
ⓒ 이십세기 폭스 코리아

관련사진보기


영화 제목은 내용과 메시지를 함축합니다. 그러다 보니 원제를 과장하거나 반대로 축약하거나 또는 뻥튀기하다 보니 가끔 영화의 내용과 메시지가 희석돼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보적 감독이자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가 연출한 <로스트 라이언즈>(2007)의 원제는 '양들이 이끄는 사자들'(Lions for Lambs)입니다. 이 말은 1차 대전 중 사자처럼 용맹한 영국의 병사들이 무능하고 머저리 같은 장교들 때문에 떼죽음 당한 '솜므' 전투를 한 독일 장군이 빗대어 부른 데서 연유합니다. 잘못된 리더들 때문에 희생 당하는 젊은이와 파편화되는 역사를 함축하는 상징적인 제목이지요. 하지만 결국에는 '길 잃은 사자'라는 모호한 제목으로 둔갑했습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100분 토론'을 능가할 정도의 치밀한 토론으로 스크린을 후끈 달굽니다. 주제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프간전을 배경으로 정치적 애국주의와 언론,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 등 만만치 않은 어젠다가 불꽃을 튀깁니다. 하지만 영화가 파고드는 지점은 분명합니다. 오늘날 미국이 좌표를 잃고 혼돈에 빠져 있는 이유가 '잘못된 리더'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영화는 그 리더들을 정치인·언론인·지식인으로 지목합니다.

잘못된 리더로 좌표 잃고 혼돈에 빠진 미국

같은 시간대에 세 곳의 공간에서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교차시키는 영화의 첫 무대는 공화당 상원의원 제스퍼 어빙(톰 크루즈)의 사무실입니다. 차기 대선주자 어빙은 대선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저널리스트 제니 로스(메릴 스트립)에게 단독 인터뷰를 자청합니다. 전쟁도 이기고 민심도 얻을 새로운 아프간 전략에 관한 특종을 주겠다며 넌지시 다가섭니다.

베테랑 기자 로스는 어빙의 제안이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직감합니다. 새 전략이란 게 베트남전과 이라크전 등지에서 숱하게 보고 들은 것을 녹음기 틀 듯 재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포장입니다. 같은 상품이라도 어떻게 포장해 대국민 홍보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하지만 터무니없이 빈곤한 특종(?)으로 인해 로스는 망설입니다.

두 번째 무대는 휴머니스트를 자처하는 대학교수 말리(로버트 레드포드)의 연구실입니다. 명분 없는 전쟁을 반대하는 이상주의자로 보이지만 기실 말리는 상아탑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대변합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는 그의 말에 유색인종인 제자 어니와 아리안은 아프간에 자원 입대합니다. 그에 비해 백인 중산층 토드는 현실을 조롱하고 방관하며 말리의 '행동하는 청춘론'에 반기를 듭니다.

영화가 두 무대를 교차 편집하는 사이사이 카메라는 세 번째 무대로 시선을 돌립니다. 어니와 아리안이 무장 헬기를 타고 아프간의 전략 요충지로 가던 중 탈레반의 공격을 받아 추락합니다. 그와 동시에 유색인종도 대학을 나오고 군대를 다녀오면 주류 사회에 편입할 수 있을 것이라던 그들의 믿음도 함께 추락합니다. 그 누구도 파병이 국가의 악행에 공모하는 것이라고 발언하지 않는 가운데, 어빙의 '새로운 아프간 전략'에 따라 두 청년은 그렇게 생사의 기로에 섭니다.

정치권력과 미디어의 동업자 의식 그리고 공모

영화의 포인트는 '공모'입니다. 어빙의 정치적 야심과 로스의 특종과 말리의 이상이 청년들의 목숨을 담보로 서로의 등을 긁어주며 타협하고 결국 한 배를 타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이들 공모의 무늬에 대해 너무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려다 설교조로 빠진 감이 없지 않지만 문제의식은 도드라집니다.

어빙과의 논쟁 중 밀리던 로스가 새로운 전략이 베트남전 등 실패한 전쟁의 되풀이에 불과하다며 반격에 나서고 있다.
 어빙과의 논쟁 중 밀리던 로스가 새로운 전략이 베트남전 등 실패한 전쟁의 되풀이에 불과하다며 반격에 나서고 있다.
ⓒ 이십세기 폭스 코리아

관련사진보기


압권은 어빙이 새 전략에 대해 시시비비를 거는 로스에게 반격을 가하는 대목입니다. 어빙은 미디어가 언제부터 정론직필을 따졌느냐며, 파병 지지뿐만 아니라 성조기에 경례를 하는 사각턱의 해병을 TV에 시시각각 보여주며 애국심을 팔았고, 그나마 정치는 이라크전의 실수를 인정했는데 미디어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며 거세게 몰아붙입니다. 당혹스러워 하는 로스에게 공화당과 미디어는 같은 팀이며, 이미 전쟁을 팔았으니 해결책도 함께 팔아야 한다며 동업을 요구합니다.

영화의 이 대목은 연평도 포격에 대해 정부 여당과 조중동이 '단호한 응징'을 주고받으며 보여준 동업자 의식을 떠오르게 합니다. 포격 다음날, 이 대통령이 강력 응징으로 돌아서고 연평도를 휘감은 포연을 포샵질해 1면에 건 <조선일보>의 사진은 이를 증거합니다. 최근에 조중동이 종편 사업자로 선정된 것은 이러한 동업자 의식이 앞으로 보다 짜임새 있게, 조직적이며, 지속적으로, '포샵질'될 것임을 예고합니다. 

목표가 확연하기 때문입니다. 보수와 수구의 천년왕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입니다. 미디어를 장악한 자가 권력을 장악한다고 말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를 계승하겠다는 것입니다. 일본 자민당의 동업자인 <요미우리-니혼TV>와 <산케이신문-후지TV>, <니혼게이자이-TV도쿄>처럼 권력의 시녀라는 모욕을 털어내고 당당히 동업자의 반열로 올라서겠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향한 미디어의 이런 욕망을 영화는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빙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로스는 그의 사무실을 구경합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한 곳을 클로즈업합니다. 과거에 로스가 어빙을 인터뷰했던 <타임> 표지에 '의사당의 젊은 피'라는 제목 아래 '상원의 초선 어빙이 케네디가 민주당에 그랬듯이 생기를 불어 넣었다. 어빙은 공화당의 미래…'라는 내용의 기사가 스크린을 가득 채웁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권력을 틀어쥐어야 한다

방송국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취재수첩을 뒤적이던 로스의 눈에 문구 하나가 꽉 찹니다. 'whatever it takes!' 인터뷰 말미에 어빙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기길 원한다면 예스와 노 외에 답은 없다"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해야 한다고 강조한 대목입니다. 로스는 어빙과의 인터뷰가 백악관 행에 필요한 윤활제에 불과해 보도할 가치가 없다며 보도국장과 설전을 벌입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알링턴 국립묘지 앞을 지나는 로스의 눈에 눈물이 흐릅니다.

어빙과의 인터뷰를 두고 보도할 것인지 놓고 망설이는 로스에게 보도국장은 작은 양심에 흔들리지 말라고 한다.
 어빙과의 인터뷰를 두고 보도할 것인지 놓고 망설이는 로스에게 보도국장은 작은 양심에 흔들리지 말라고 한다.
ⓒ 이십세기 폭스 코리아

관련사진보기


이상과 명분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말리는 토드에게 "문제는 대테러전쟁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거기에 무관심한 우리 모두에게 있다"며 최후통첩을 합니다. 면담을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온 토드에게 TV 뉴스는 인기 연예인의 섹스 라이프와 함께 로스가 취재한 어빙의 '새 전략'을 긴급 속보라며 자막으로 보도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 어니와 아리안은 산산이 부서진 꿈과 희망을 끌어안은 채 아프간의 오지에서 최후를 맞이합니다.

영화는 어빙과 설전을 벌이며 상념에 잠긴 로스의 회한이 무엇이었는지, 택시를 타고 가며 흘린 눈물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명분 없는 전쟁에 반대한다면서도 수천 명의 미군이 죽어가는 '화염' 옆에서 빈둥거리지 말고 참전하라는 말리 교수의 위선에 대해서도 입을 다뭅니다.

마치 루퍼트 머독의 전신으로 불리는 미디어 재벌 월리엄 랜돌프 허스트를 모델로 오슨 웰스가 연출한 걸작 <시민 케인>(1941년작)에서 케인이 정론직필을 주창하며 신문을 창간했다 어떻게 권력의 화신으로 변모하는지를 절묘하게 포착해 내면서도 끝내 '로즈 버드'에 대해 침묵하듯이 말입니다. 대신 영화는 TV 뉴스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토드의 얼굴에 카메라를 고정한 채 엔딩 크레딧을 올립니다.

종편 선정된 조중동 '편들어 당 만들까?'

영화에서 로스는 자신이 쓴 기사를 되짚어보며 정론과 곡필 사이에서 '잠시' 갈등합니다. 수렁에 빠진 이라크전과 아프간에 대해 회한의 눈길을 보내며, 뻔히 보이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어 보도국장에 맞서고 눈물도 흘리니까요. 하지만 부시 재선의 일등공신이었던 루퍼트 머독의 <폭스뉴스>처럼 과거에도 그랬듯이 로스는 어빙과 여전히 '공모'하고 있었음을 영화는 토드의 눈을 통해 직접적으로 고발합니다.

권력과 언론의 공모를 실증한 대표적 인물은 앞서 말한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와 루퍼트 머독입니다. 탈세 등으로 재판까지 받고 재임기간 중 경제성장률이 1% 수준이었음에도 3선 총리가 된 베를루스코니. 자신이 사주로 있는 <뉴욕포스트>가 힐러리의 출마를 극구 반대했음에도 정작 자신은 앞장서서 그녀의 정치자금을 모았지만 결국에는 부시를 당선 시킨 일등공신으로 등재한 루퍼트 머독. 이들의 신기에 가까운 비즈니스는 조중동의 흠모를 한 몸에 받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미디어를 통해 민심을 조작한 아이템은 '진보에 대한 분노'와 '성공신화'입니다. 영화에서 어빙이 진보세력들에게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 끊임 없이 상기시켜 줘야 한다고 말한 그 대목입니다. 머독이 <폭스뉴스>를 정점으로 진보에 대한 분노를 공포의 정치로 탈바꿈시켜 미국의 보수세력을 결집시키고, 일개 부동산 개발업자였던 베를루스코니가 누구든지 자기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으로 이탈리아 사회를 보수화시킨 뒤, 보수권력을 창출해낸 지배전략은 조중동의 미래전략에 다름 아닙니다.

한국사회에서 곡필의 대명사로 불리는 조선일보의 사시는 공정함을 뜻하는 '불편부당'입니다. '편들지 않고 당 만들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종편 선정으로 날개를 단 현실은 조선일보로 하여금 '편들어 당 만들겠다'는 동업자 의식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 어쩌면 한 술 더 떠 언론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의 가벼움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선언할지도 모릅니다.

조중동은 종편으로 여론을 독점해 갈 것입니다. 끊임없이 정치 혐오증을 부추기고, 정치의 비생산성을 부각시키며, 진보 힘 빼기에 방점을 찍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삼성 등 재벌과의 동업으로 영화 속 어빙과 로스의 관계를 역전 시켜 새로운 유형의 권력을 창출하려 할 것입니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잘못된 뉴리더'들은 그렇게 탄생될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하여, 대안의 정치와 대안의 언론을 갖추지 못할 경우 민주공화국은 거세되고 껍데기만 남을 개연성은 커지만 합니다.


태그:#로스트 라이언즈, #조중동, #종편, #루퍼트 머독,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