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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총각 장병윤 그는 언제나 조합원을 위해 노조 활동을 할 것입니다.
▲ 노총각 장병윤 그는 언제나 조합원을 위해 노조 활동을 할 것입니다.
ⓒ 조성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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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15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1공장 점거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비정규 노동조합은 같은해 7월 22일 대법원에서 '불법파견' 판결이 내려진 이후 조직화 사업에 박차를 가했고, 그에 따라 600여 명이던 조합원이 2000여 명으로 늘어 났습니다.

이들이 파업에 들어간 이유는 이날 현대자동차가 울산공장 근교에 있던 시트공장의 한 하청업체에 대해 계약 해지를 단행했기 때문입니다. 비정규직 노조는 "시트에서 노조 가입자가 늘고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지속되자 업체를 폐업 시켰고 이는 명백한 노동탄압 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이날 노조원 1천여 명과 함께 1공장 점거 파업에 돌입했는데요. 이틀 후인 17일 파업 3일차에는 500여 명만 1공장에 남고 2공장, 3공장 조합원과 현장 간부 500여 명은 각 공장으로 들어가 파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전 8시 출근 투쟁과 집회를 시도 하였습니다.

장병윤씨는 비정규직 노조 3공장 대표를 맡고 있었고, 이날 오전 노조가 내린 지침대로 3공장에서 조합원들과 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집회 도중 회사 쪽은 젊은 용역과 관리자를 투입시켰고 수백여명이 몸싸움이 벌어 졌다고 합니다.

"몸 싸움 도중에 수십 여명의 용역 깡패가 달려 들어 앞장선 우릴 에워싸고 집단 폭력을 행사 했어요. 그리고는 우릴 강제로 끌고가 봉고차에 태워 예전만 근처로 끌고갔고, 미리 대기해 있던 경찰에게 넘기더군요. 봉고차에서도 얼마나 두들겨 패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어떤 동지는 너무 심하게 두들겨 맞아 병원으로 후송 되기도 했습니다."

그때가 2010년 11월 17일 오전 11시 경이었다고 합니다. 며칠이 지난 후 구속영장이 신청 되었고 그는 울산구치소로 보내졌습니다. 한 달 후인 12월 17일 오전 11시경, 경기도 양평에서 구속 소식을 접한 가족이 장병윤씨를 면회 하려고 울산으로 내려 오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큰 형님이 크게 다쳐 병원으로 긴급 후송 되었으나 뇌사 상태에 빠졌고 19일 오후, 동생을 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장병윤씨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지금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조는 지난 3일, 장병윤씨의 보석을 신청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그날 오후 가출소했는데요. 오늘(7일) 오전 10시 울산지방법원 102호 법정에서 선고 공판이 열렸습니다.

밤 20시 구정문 1인 시위 요즘 몸시 추운날이 많아 1인 시위 하기도 힘겹습니다.
▲ 밤 20시 구정문 1인 시위 요즘 몸시 추운날이 많아 1인 시위 하기도 힘겹습니다.
ⓒ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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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오후 5시경 저는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하였습니다. 그날 비정규직 노조로부터 '17시 30분 정문 본관 앞에서 결의대회 있으니 조합원은 모두 집결 바랍니다'란 문자를 받고 그곳으로 향한 터였습니다. 등 뒤에서 누가 어깨에 손을 얹으며 "형님 잘 계셨어요?"라고 인사를 하더군요. 돌아 보니 장병윤씨 였습니다. 순간, 반갑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몸 고생 마음 고생이 심할 것이고, 다른 일정으로 바쁠 터인데 일부러 저를 만나러 왔다고 했습니다. 선고 공판이 오전 10시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보겠다고 했습니다.

오전 6시에 일어나 구정문 앞으로 나갔습니다. 힘들지만 아직도 고생하는 노동자들이 있기에 1인 시위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바깥 공기는 엄청 차가웠습니다. 구정문 앞에 나가 서니 6시 50분경이었습니다. 구정문 사방은 아직 어두웠습니다. 날이 추워서 옷도 두텁게 입고 장갑도 겹겹이 끼고 나갔으나 강추위에 점점 몸이 떨려 왔습니다. 손발이 시리다 못해 나중엔 아려 왔습니다. 그래도 참았습니다. 가만히 있으니 더 추운거 같아서 시위 간판 들고서 왔다 갔다 했습니다. 출근 하는 노동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추위에 웅크린 채 출입문 안으로 발빠르게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서 있다가 8시 10분 경 야간근무를 한 퇴근자들이 어느 정도 줄어 들 즈음에 중단했습니다.

시위 간판을 놔두는 곳에서 잠시 몸을 푼 후 울산 법원으로 향했습니다. 10경 재판이 시작 되었습니다.

"휴대폰 진동으로 하고 들어 가세요."

문 앞 감시원이 우릴 보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장병윤씨 재판엔 정규직 활동가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17명 정도 참석 했습니다.

"모두 일어 서 주십시오."

예전엔 "모두 기립"하고 말하던데 요즘엔 "모두 일어 서 주십시오"라고 하더군요. 한결 더 부드러워진 것 같았습니다. 재판 하는 판사님도 여성 판사님이었습니다.

"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인데요. 장병윤씨 재판 장면 사진 한 장 찍으면 안 될까요?"

판사님에게 법원 직원이 판사님에게 전달한 쪽지.
▲ 판사님에게 법원 직원이 판사님에게 전달한 쪽지.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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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방청석 가까이 있는 법원 직원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법원 직원은 판사님이 허락해야 한다면서 좀 기다려 보라 했습니다. 법원 직원은 작은 쪽지에다 뭐라 적어서 판사석 가까이 있는 여직원에게 전달 했습니다. 여직원은 판사님과 대화를 하더니 쪽지가 되돌아 오고 법원 직원이 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판사님이 사진 찍는 걸 거절하셨습니다. 기사로만 쓰시고 법정에서는 사진기를 못들고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보관했다가 재판 끝난 후 돌려 드리겠습니다."

법원 직원은 저에게 쪽지를 넘겨 주고 사진기를 달라고 하여 주었습니다. 다른 재판이 하나 끝나고 장병윤씨 재판이 시작 되었습니다. 방청석에 있던 장병윤씨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조용히 일어나 재판정 피고인 석에 섰습니다. 여러 사람을 재판해야 하는지 말을 빠르게 했습니다.

"7월 22일 대법원 판결은 의미 있는 판결이 났지만 아직 진행중이고 파업의 목적과 정당성이 있다고 하지만 법원에서 인정해 주긴 어렵다. 현대차 쪽도 대화를 통한 해결에 미흡한 면이 있고 처우문제는 회피 할 수 없는 상황에 왔다."

빼곡한 재판 일정 법정 밖 소식란엔 그날 할 재판 일정이 있었습니다.
▲ 빼곡한 재판 일정 법정 밖 소식란엔 그날 할 재판 일정이 있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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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을 다 읽은 판사님은 장병윤씨에게 여러 점을 참작하여 다음과 같이 선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다."

장병윤씨는 다음 주 부터 출근하면 다시 힘차게 현장 활동에 들어 가겠다고 포부를 밝혔습니다. 장병윤씨는 구치소에서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자 "작은 방에 7명이 지냈어요, 잠 잘 때는 칼 잠을 자야만 했어요, 한 날 목욕을 하는데 7명이서 20분 안에 목욕을 끝내라 하더군요, 뜨뜻한 물은 나와요"라고 하더군요.

장병윤씨에게 대화 좀 하자고 요청 했으나 "큰 형님 사고 후 어머님도 병원에 입원해 계셔서 어머니에게 가봐야 합니다, 나중에 한번 시간 내 볼게요, 저보다 어머님이 더 충격을 받으셨어요"라고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올해 서른 아홉 노총각인 장병윤씨는 착하게 살아온 죄 밖에 없는데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인생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러웠습니다. 어머니는 올해 76세라 합니다.

25일간 진행된 1공장 점거 파업도 끝났고 판결도 그렇게 끝났습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언제쯤 올까요?


#비정규직#현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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