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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훈(박신양 분)이 빼돌린 시체를 갖고 부검실로 뛰어간다. 시체를 부검하려던 이명한(전광렬 분)은 범인이 지훈임을 직감하며 그를 찾으라고 소리친다. 고다경(김아중 분)은 영문도 모른 채 지훈에게 끌려 부검실에 들어가고, 화가 난 검사 정우진(엄지원 분)은 법원에서 압수수색영장을 받아와 국과수를 뒤집어 놓는다. 이 모든 장면이 2분 30초 동안 빠르게 흘러가고, 시간은 62시간 전으로 되돌아간다.

 

SBS 새 수목드라마 <싸인>(오후 10시 방송)의 오프닝은 강렬했다. 자칫 감정의 과잉으로 흐를 수 있었던 전광렬과 박신양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이 깔끔했고, 장면의 전환은 빨랐지만 포인트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시청자들은 대체 지훈이 왜 시체를 빼돌렸는지, 그리고 지훈과 명한, 다경과 우진은 서로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궁금해 한다. 고작 2분 남짓한 시간 동안, <싸인>은 시청자를 TV 앞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근래 본 드라마 중에 이렇게 단시간 내에 집중하게 만든 작품은 없었다. 드라마의 오프닝, 첫 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많은 드라마들은 첫 회에 제작비를 아끼지 않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힘을 준다. 그러나 <싸인>은 빠른 화면 전개와 적절한 편집, 배우들의 호연만으로 시청자들이 자연스럽게 극에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인물 간의 관계도를 빠르고 명쾌하게 풀어낸 <싸인>

 

<싸인>의 첫 회가 보여준 또 다른 미덕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대권력이 은폐하려는 진실을 파헤친다는 기본적인 설정에서 차이가 있지만 <싸인>은 장르적으로 미국 드라마 <CSI>와 닮은 점이 많다. 국과수 소속 법의관과 경찰청 소속 검시관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이 드라마가 '수사물'의 한 갈래인 것을 증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싸인>은 미적대지 않고 오프닝 이후 시간을 현재에서 62시간 전의 과거로 돌리면서 곧바로 사건을 전개시킨다. 이 과정에서 눈여겨 볼 점은 <싸인>이 장르적 사건 전개를 빠르게 풀어내면서도 등장인물들의 관계에 대해 시청자들이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명쾌하게 풀어냈다는 것이다.

 

예컨대 지훈과 명한의 관계가 그러하다. 오프닝에서 시청자들은 지훈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적개심을 드러내는 명한을 보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 한다. 그리고 궁금증은 두 사람이 마주친 국회 청문회에서 밝혀진다. 드라마는 두 사람의 관계를 굳이 과거 회상이나 설명투로 풀어내지 않고, 청문회에 출석한 국회의원의 입을 빌려 밝힌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그 한 장면을 통해, 지훈과 명한의 관계를 명확하게 인지한다.

 

지훈과 우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과거 연인이었다는 사실은 갑작스럽게 죽은 톱스타 서윤형(건일 분)의 부검의가 지훈에서 명한으로 바뀐 사실에 대해 지훈이 분노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밝혀진다. 이 과정에서 지훈과 우진의 대화를 통해 시청자들은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째서 이토록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게 된다.

 

사건의 빠른 전개는 시청자를 몰입하게 만들었다

 

성공하는 드라마의 첫 회는 무엇이 다를까. 바로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사건의 배경에 대한 명쾌하고도 빠른 설명이다.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각각의 주연배우들의 캐릭터를 명확하게 인지하게 하고 그들의 관계가 앞으로 일어날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결코 회상이나 설명하는 장면을 과하게 끼워 넣어 극의 흐름을 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싸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첫 회부터 사건을 빠르게 전개시켜 나간다. 서윤형이 죽고 난 뒤 우진이 그의 주변 인물들로부터 그와의 관계에 대한 증언을 듣는 장면은,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반대되는 행동이 담긴 동영상 파일을 휴대기기에서 재생시키는 방식을 통해 교차 편집돼 보여졌다. 이로 인해 시청자들은 단번에 그들이 우진에게 거짓증언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건의 배후 또한 2회 만에 드러낸다. 이 모든 일에 차기 대권주자로 유력시되고 있는 국회의원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과정은 형사 최이한(정겨운 분)이 상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한 한 번의 계좌추적을 통해 밝혀져 다소 쉽고 밋밋했다. 그러나 사건의 배후를 일찌감치 밝힘으로서 시청자들은 지훈과 다경 등이 거대권력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나가는지에 대해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싸인>은 시청자가 최대한 빠르게 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쓸데없는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직하면서도 빠르게 사건을 전개시켜 나간다. 그리고 이어진 2회에서는 호흡을 잠시 가다듬고 지훈과 다경을 국과수 부검실에서 사건현장으로 옮겨놓으면서 수사물로서의 장르적 특성 또한 정교하게 연출했다.

 

CCTV 테이프를 이용해 가해자의 당시 이동경로를 찾아내는 방식은 인상적이었다. 또 각고의 노력 끝에 살인에 쓰인 범행도구의 행방을 찾아내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비 때문에 모든 게 무산되어 버린 장면은 사건의 전개를 단순하게 풀어나가기보다는 복선과 반전을 통해 극적 쾌감을 안겨주려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케 한다. 만약 이 장면에서 지훈이 증거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면, 이후 징계위원회에서 승리의 쾌감을 만끽하는 명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통쾌한 장면을 목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뚜렷한 선악구도는 빠른 감정이입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싸인>은 일찌감치 극 안에 선악구도를 정립시켜 빠른 전개에 안정감을 실었다. 원리원칙을 고집하는 지훈과 열정과 패기가 가득한 다경을 선의 입장에 서게 하고, 거대권력의 사주를 받아 부검결과를 의도적으로 조작한 권력욕의 화신 명한과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든 장 변호사(장현성 분)를 악의 입장에 서게 하여 시청자로 하여금 지훈과 다경에 빠른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었다.

 

1, 2회를 통틀어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은 지훈과 명한에 비해 다경과 우진의 캐릭터가 다소 처지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다경은 두세 번에 걸친 지훈과의 마찰로 인해 벌써부터 '민폐형' 캐릭터의 자질을 드러내면서 제 2의 '언년이(<추노>의 여자주인공)'가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그러나 다경이 지훈에 비해 덜 다듬어진 캐릭터라는 점을 생각할 때, 크게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새해가 밝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음울하다. 힘 있는 자는 힘없는 자를 거리로 내몰고, 거대권력의 탐욕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추운 날씨에 우울한 현실이 겹쳐 몸도 마음도 얼어붙은 이 계절, 매스 한 자루로 정의를 실현코자 하는 패기 가득한 이들이 어떻게 거대권력을 무너뜨리는지 지켜보는 일은 한 줄기 위안이 될 듯하다. 김태희(MBC <마이 프린세스>)와 박신양의 사이에서, 이래저래 최수종(KBS2 <프레지던트>)만 불쌍하게 됐다.


#싸인#박신양#전광렬#김아중#엄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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