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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은 조선조에 들어서 종 3품의 수령이 관할을 하는 <남원도호부>였다. 당시 남원도호부는 1부 1군 9현을 다스리는 곳의 중심에 있었다. 9현이란 담양, 곡성, 구례, 순창, 임실, 창평, 무주, 진안, 장수를 말한다. 이 모든 고을을 다스리는 곳이 바로 남원도호부였다. 남원은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주요한 교통, 역사, 군사의 요충지로, 정유재란 당시에는 2천의 군사와 8천의 남원성의 백성들이 왜병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모두 전사를 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남원에 소재한 남원향교는 조선조 태종 10년인 1410년에 처음으로 대곡산에 창건됐으며, 처음에는 남원성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천이 범람, 요천을 건너려던 유생들이 피해를 입게 되자, 세종 25년인 1443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는 것이다. 남원향교에는 향교 학생들이 지켜야 할 학규를 비롯하여, 유생들의 내부생활규범 등을 보관하고 있어서, 조선시대 향교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남원향교 진강루,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나?

 

문을 연 지 600년이 지난 남원향교. 그만큼 남원항교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현재 향교 안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대성전과 동무와 서무, 그리고 명륜당과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동재와 서재가 있다. 또한 사마재와 전사청이 있으며, 명륜당의 뒤편에 중층 누각으로 구성된 진강루가 자리하고 있다.

 

남원향교를 찾아 여기저기 살펴보니 진강루란 누각에 자꾸만 눈길이 머문다. 진강루 앞에는 커다란 하마비가 서 있다. 일반적인 하마비와는 그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 그런데 향교나 서원 앞에 이런 누각이 있을 때는, 그 아래편에 중문과 좌우에 문을 둔다. 이 누각 밑에 난 문이 솟을대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원향교의 경우에는 진강루 옆에 남원향교의 현판을 건 솟을대문이 별도로 설치돼 있다. 그렇다면 이 진강루는 도대체 어떻게 이곳에 서 있는 것일까? 혹 이 향교를 옮기면서 딴 곳에 있던 문루를 이곳으로 옮겨온 것은 아니었을까? 진강루를 돌아보면서 의문이 영 가시지를 않는다.

 

진강루에는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없다

 

진강루를 돌아보면 추녀마다 많은 용들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진강루 안 대들보에도 용 조각이 있지만, 주심포계 건물인 진강루의 기둥 위마다 용이 입을 벌리고 있다. 이렇게 많은 용을 조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점으로 보아 이 진강루가 어느 시기에 혹 성문의 누각이나, 동헌 등의 누각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많은 용을 조각하였다는 것은 향교의 건물에서는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강루는 원으로 다듬은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그런데 이층 누각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이 보이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진강루를 오르려면 어떻게 했을까? 그러고 보면 이 남원향교에서 보이는 이상한 구조물이 눈에 띤다. 바로 명륜당 뒤편에서 진강루로 연결된 나무다리가 있다는 점이다.

 

풀지 못한 수수께끼 진강루 가교

 

이 나무다리는 둥근 주추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가교를 구성하였다. 그 다리를 건너야만 진강루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왜 이런 구성을 한 것일까? 향교에 계신 분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남원에 계신 몇 몇 분에게 질문을 했지만,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향교를 둘러보았지만, 이런 구성은 처음이다. 그래서 남원향교가 더 오래 기억되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번 남원을 찾을 때는 다시 한 번 진강루를 찾아 누각 위에 올라보아야 할 것만 같다.   

덧붙이는 글 | 남원향교의 답사는 지난해에 이루어졌습니다


태그:#남원향교, #진강루, #누각, #가교, #6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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