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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1일 서산의 대표 양반 가옥으로 유명한 정순왕후생가와 김기현 가옥을 찾았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둘러본 정순왕후 생가와 집주인의 성별에 관계없이 여성성을 유지하고 있는 김기현 생가가 색다른 느낌을 안겨줬다.

 

정순왕후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 정순왕후생가

 

김홍욱 선생의 4대 손인 김한구의 장녀로 영조 35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던 정순왕후가 살았던 생가는 1988년 8월 30일 기념물 제 68호로 지정되었다. 경주 김씨, 일명 한다리 김씨가 16대를 이어 살아온 이 터전은 여러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소실되고 현 건물만 남아있다. 이 가옥은 효종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것으로 문신 김홍욱이 노부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내려준 목조의 기와집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15세의 나이로 51살이나 연상인 영조와 가례를 올린 정순왕후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더 유명하다.

 

이곳이 여행지로 정해지자 정순왕후에 대해 잠깐 조사를 해보았다. 그녀에 대한 일화가 인상 깊었다. 왕비간택 당시 좋아하는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화려한 꽃들의 이름을 대는 다른 규수들과 다르게 '목화'로 대답했다는 그녀. 그 이유는 그것으로 백성들의 옷을 만들기 때문이라고 했단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대답으로 왕후가 된 그녀는 역사 속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다. 순조를 대신하여 청정하여 천주교를 박해하는가 하면 노론을 옹호하여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때로는 왜곡이 되고, 때로는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이 역사 속 이야기인지라 과거로 돌아가 직접 느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배움으로 옛날 이야기를 전해 듣는 현대인으로서 그녀가 미운 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정순왕후가 살았다는 이곳에 그다지 애착이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생가 입구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 묘비는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신 열사 김용환 선생의 것으로 중국에 있던 것을 생가 터로 옮겨 세웠다. 여느 묘비와 다르게 태극문양이 각인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정순왕후 생가 대문 앞쪽에는 350여 년이 된 느티나무가 듬직하게 서 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들을 보니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기운차다. 이 나무그늘 아래에서 정순왕후는 무엇을 하며 놀았을까 궁금해진다.

 

정순왕후 생가는 대문이 참 단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장 좋아하는 꽃이 '목화'라고 대답을 했던 시절의 정순왕후의 모습을 닮은 듯하다. 후에야 어찌됐든 그때는 단정하고 순수한 양반집 규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대문을 들어서면 양쪽으로 작은 화단들이 꾸며져 있다. 정성을 들여 가꾼 기색이 역력한 화단이다. 툇마루에 앉아 있는 어르신들은 방문객이 와도 전혀 개의치 않고 대화를 나누신다. 기념물로 지정된 가옥이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지셨나 보다. 한참을 이렇게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시는 모습에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몇십 년이 지나고 나도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허리가 휘었을 때 저렇게 다정하게 소소한 일상들을 나눌 수 있는 말벗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머릿속에 몇몇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다. 세월이 흘러보면 알겠지?

 

건물의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작은 쪽문을 지나 안채로 이어진다. 정순왕후 생가의 구조는 측면 2칸, 정면 5칸의 몸채 좌우로 각각 3칸씩 'ㄷ'자 형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측면 1칸, 정면 5칸의 별채를 배치하여 'ㅁ'자형의 평면구조를 하고 있다. 서쪽의 대청 양옆으로 방과 부엌을 두고 마당을 향한 곳에 툇마루를 두었으나 동쪽의 별채에는 바깥으로 툇마루를 두었다. 지붕은 모두 홑처마 맞배 지붕을 하였다.

 

벽 한쪽에 걸려있는 메주들 주변으로만 빛이 들어온다. 이럴 것을 알고 이곳에 메주를 매달았을까? 그렇지 않다면 우연일까? 전자라면 정말 현명한 주인장. 마당에는 우물이 있다. 안을 들여다보지만 세월의 깊이도 우물의 깊이도 가늠하기가 어렵다. 우물 옆으로 수도꼭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는 사용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나오는 길 철창에 갇힌 강아지 두 마리가 보인다. 갑자기 여기서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생각날 게 뭐람?

 

 

수줍은 여인네의 모습을 닮은 김기현 가옥

 

정순왕후 생가에서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경주 김씨 가옥인 김기현 가옥이 있다.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199호로 지정된 이 가옥은 세워진 연대가 정확하지 않다. 건립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안채와 사랑채의 건축양식으로 가늠하여 19세기 중반쯤으로 추측된다. 600년 전부터 이곳 한다리에 경주김씨가 터전을 잡고 살았다는 고증에 의하면 그동안 타성씨로 소유권이 변경된 적도 있었으나 김기현의 선조가 건축한 것으로 전해오는 건축물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ㅣ'자 형의 사랑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랑채가 대문을 등지고 있는 경우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특이하다. 보통 사랑채는 대문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사람들이 들고남을 볼 수 있도록 길가 쪽을 바라보고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김기현 가옥의 사랑채는 수줍은 듯 등을 돌리고 앉아있다. 일부 조사에 의하면 집을 먼저 짓고 대문을 만들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1층 기단을 마련하여 그 위에 가공하지 않은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후 홑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기와집이다.

 

김기현 가옥도 정순왕후생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 대롱대롱 처마 밑에 매달려 말려진 감들과 빨랫줄에 매달린 색색의 빨랫감들이 사람의 흔적을 느끼게 해주니 정겹다.

 

사랑채 뒤로 돌아 안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안채로 향하는 문과 마주한다. 안채 역시 수줍은 듯 문 뒤로 몸을 숨기고 있다. 문 안쪽으로 발을 디디고 들어서야만이 안채의 모습을 온전히 바라볼 수가 있다. 문이 살포시 열린 주방에는 한 아이와 어머니가 식사 준비에 한창이다. 현대생활에 맞게 변화를 준 입식 부엌이 전통가옥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은근히 조화를 이룬다. 그 모습을 담고 싶지만 다정한 모녀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슬며시 문을 나선다.

덧붙이는 글 | http://dandyjihye.blog.me/140121416165 개인블로그에 게재된 글입니다.


태그:#정순왕후생가, #김기현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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