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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직각(直閣)이 도임을 앞두고 목숨을 잃자 전하께선 살꽂이벌의 강무를 삼간 채 그와 독대(獨對)했던 몇 가지 일을 생각하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전하, 신이 일찍이 승정원에 있을 때, 도검으로 국권을 장악한 훈구파(勳舊派)들이 왕권을 가볍게 여겨 사초(史草)를 주물러 온 사실을 확인하며 얼마나 경악했는지 모릅니다.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듯 실록(實錄)을 들여다보며 자기네 허물이 쓰인 부분을 사관에게 다시 쓰게 하는 망령된 행동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한양에 뿌리를 내린 훈구(勳舊)의 적당들이 저지른 씻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그것이 연산조 때 일이었지만 상감은 윤창하의 상주가 무얼 말하는지를 알았다. 그가 수차에 걸쳐 입에 올린 것 중에 규장각에 들어와 변화를 꾀하고 싶은 게 '논사파(論思派)'의 화두였다. 그 골격을 어렵지 않게 끄집어 올렸다.

"전하, 신이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법을 논하다가 선조 대왕 때의 석학 기대승(奇大升)의 세상을 잘 다스리는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왕도정치를 발견했나이다. 자가 명언(明彦)이요 호가 고봉(高峰)인 선생은 <근사록(近思錄)>을 진강하였는데 이로 인해 훗날 <논사록(論思錄)>을 집필하게 됐습니다. 하여, 소신 등은 주자학에 물든 선생의 학문을 높이 존경해 '논사파'를 결성하기로 한 것입니다."

논사파의 목적은 선조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 고봉의 언로를 되살려 시시비비를 가려 장안 사대부들의 정신적 토양을 기름지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가 조선에 전해진 <삼국지(三國志)>에 대한 망령됨이었다.

"전하, 소신이 '정령형상(政令刑賞)'에 참작코자 선조 때의 기록을 뒤적이다 보니 고봉의 절규를 들을 수 있었나이다. 세상은 <삼국지>를 열 번 읽지 않은 자와는 이야기를 나누지 말 것이며 관직에 오른 자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으로 소문났으며, 소학을 뗀 어린 유생도 읽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괴변에 가까운 서토의 망상 소설이니 전하께옵선 <삼국지>를 멀리하옵소서!"

그 자리에 있던 승정원 최주서가 당치않은 일이라고 반론을 내놓는다.

"아니옵니다, 전하. <삼국지>는 뼈있는 생선을 씹듯 몇 번이고 잘근잘근 읽어야 묘미를 알 수 있는 역사서이옵니다. 대비마마께서도 궁인들에게 권장하는 책이옵니다."

윤창하는 상대의 말을 전연 귀 담아 듣지 않았다. 성상을 알현한 자리에서 자신이 조선에 전해진 <삼국지>의 해악을 입에 담은 것이다.

"전하, 선조 대왕 2년인 명나라 융경(隆慶) 3년 임진에 고봉은 서토의 삼국지에 대해 글을 올렸습니다. <삼국지>는 첫째 허망하고 터무니없는 말로 쓰였으며, 둘째 무뢰(無賴)한 자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古談)처럼 엮었고, 셋째 잡박(雜駁)하여 무익할 뿐더러 의리를 크게 해치는 것이며, 넷째 괴상하고 언행이 거짓되고 망령된 데다 말이나 행동이 망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최주서가 그렇지 않다고 목소릴 높였으나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윤창하의 말은 그치지 않았다.

"전하, 6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위오촉'이 중국 일부 지역에서 전쟁을 치르는 보잘 것 없는 역사입니다. 그것이 마치 중국대륙 전체에서 일어난 것처럼 과대 포장한 망상 소설이 <삼국지연의>입니다. 전하, 이 책을 보고 배운 게 뭐겠습니까. 금권만능과 출세하기 위한 중상모략, 부모 형제도 몰라보는 배은망덕, 은혜를 원수로 갚는 추악함인데 여기에 무슨 사상이 있겠습니까. 과대망상소설 <삼국지연의>는 이 땅에서 척결돼야 하며 금권에 사로잡힌 얼빠진 추종자들의 정신개조를 위해 전하께서 <삼국지연의>를 도말해야 하옵니다."

최주서가 즉시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정주학(程朱學)의 이론을 확립한 설문청의 <독서론(讀書論)>을 입에 올렸다.

"명나라 '하동' 사람 설문청은 정주학의 이론을 확립했지만 그 역시 <삼국지>나 <수호지>, <전등신화> 등은 읽을만한 책으로 권했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전하, 선조 대왕이 장필무(張弼武)를 인견하실 때 나누시던 얘기가 사초에 있었나이다."

그것은 여진족에 관한 내용이었다. 함경도 지방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모 한 분이 여진족에게 시집 가 낳은 아들이 있었다. 그는 세력이 강성해 졸개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왔다.

조정에선 무과에 급제한 장필무를 강계부사에 파견해 여진족의 준동을 막게 했다. 세종 때 설치한 사군이 폐지된 변경 일대 백성들은 강계와 구성으로 옮겨갔는데 여진족을 몰아낸 빈 땅엔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그것은 인구가 많아야 군사들이 먹을 양식을 조달 할 수 있었고 군사가 많아야 침입해 온 여진족을 물리칠 수 있었다. 빈 땅에 둔전을 만들고 가축을 기르며 번창시킨 것이다. 그때 선조 대왕은 전교를 내렸다.

"<삼국지연의>에 의하면, 장비가 고함을 치자 만군이 달아났다는 말이 있는데 경은 어찌 생각하오?"

"책이 나온 지 오래 되지 않아 신은 아직 보지 못하였사오나 간혹 친구들은 허망하고 터무니없다고 들었나이다."

얼마 뒤 다시 만난 자리에서 장필무는 단숨에 <삼국지>를 무인의 기상으로 박살내고자 으르렁댔다.

"전하, <삼국지>는 무뢰한 자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古談)처럼 엮어놓은 것입니다. 잡스럽고 천박해 무익할 뿐 아니라 크게 의리를 해치옵니다. 내용을 들어 말씀드리면, 동승(董承)이 의대 속에 조서를 넣는다거나 적벽의 싸움에서 이긴 것 등은 괴상하고 허탄한 말로 근거없이 만든 것이옵니다."

"오호."
"<삼국지>는 결국 <초한연의>와 같은 책으로 의리를 심히 해치는 것들입니다. 이곳에 나오는 시문이나 사화(詞華)도 중하게 여기지 않을 뿐더러 <전등신화>나 <태평광기>처럼 사람의 심지를 오도하는 책이나이다."

윤창하는 자신이 규장각의 직각에 앉으면 터뜨릴 중대한 화포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것은 명나라에서 전해진 <삼국지>에 쓰인 한 절의 경구(警句)였다.

<젊어서는 수호지를 읽지 말고 늙어선 삼국지를 읽지 말라(少不看水滸 老不看三國)>

혈기가 왕성한 젊은 시절엔 수호지를 읽고 강도가 될까 겁나고, 나이 들면 가뜩이나 교활한데 더욱 음흉해 지는 걸 경고한 것이다. 조선의 유생들이 <삼국지>에 흥미를 느끼자 <독서론>을 쓴 설문청은 하늘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는 것이다.

"조선의 학자들은 정신이 없어. 그건 백성들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중원에서 일어난 60년 역사엔 귀가 뚫려 제갈공명이나 방통, 주유, 육손을 알지만 제 나라의 역사 을파소나 명림답부, 최치원은 모른단 말이야. 어찌하여 적벽이나 허창, 건업과 형주는 줄줄 외우면서 비류수나 백천강, 비사성이나 관미성은 모른단 말인가? 참으로 정신없는 백성들이지."

이러한 점을 논사파(論思派)에선 그 이유를 찾아내 세 가지로 분류해 교훈을 남겼다.

첫째, 위 · 오 · 촉은 60년도 못 간 나라들이라는 점이다. 위는 46년, 촉은 43년, 오는 59년이다. 조선의 미래를 걸머질 젊은 유생들이 중국인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은 역사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 <삼국지> 내용은 배울 게 없다고 했다. 전쟁과 권모술수로 날을 새는 것이기에 중국인들 스스로 경구로 삼는 '젊어서는 수호지를 읽지 말고 늙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는 뜻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삼국지>에서 가장 내세우는 인물이 제갈공명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의 실력은 별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의 나라가 60년도 못가 망한다는 걸 예견하진 못했고 더 번영시킬 역량도 없는 일개 술수 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어떤가? 도선 국사는 신라 말에 '개성에 도읍하면 5백년은 간다'고 했고, 무학도 '한양에 도읍하면 5백년은 간다'고 했다.

그런데 조선의 선비들은 제갈공명은 기억하면서 도선이나 무학대사는 잊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란 것이다.

윤창하가 평소에 선조대왕 때의 석학 기대승(奇大升)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걸 정약용은 알고 있었다. 그런 탓에 규장각 직각(直閣)으로 도임해 착수할 일도 그쪽이 아닌가 여겼다.

그가 집안에 한동안 있었던 점을 염두에 둔 정약용은 살인 사건이 일어난 뚝도(纛島)의 낡은 초옥으로 서리배를 이끈 채 말을 달렸다.

[주]
∎기대승(奇大升) ; 자는 명언, 호는 고봉으로 선조 대왕 때 <삼국지>의 패악을 상소하였다.
∎장필무(張弼武) ; 선조 때 무관
∎설문청(薛文淸) ; 정주학의 이론을 정립한 명나라 때 하동 사람.


#추리,명탐정,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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