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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창덕씨.
서창덕씨. ⓒ 강용주

대법원은 지난 13일 북한에 납치됐다 귀환해 간첩행위를 한 혐의로 옥고를 치른 서창덕(64)씨가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가 6억2000여만 원과 이자를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로 판결했다. 서씨는 진실화해위원회(진실위)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법원에 재심을 청구, 사건 발생 24년 만인 2008년 무죄를 선고받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 바 있다(관련기사 보기).

재판부는 "보안부대 군 수사관들이 서씨를 불법체포한 뒤 고문·협박해 허위자백을 받아내는 등 증거를 조작해 유죄판결을 받게 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으므로 국가는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서씨는 지난 1967년 서해에서 조업하던 중 북한 경비정에 피랍됐다 124일 만에 귀환했으나 1969년 반공법 위반 등 혐의로 남한정부에 의해 처벌 받았다. 그 후 17년이 지난 1984년 "대남 공작원의 지령을 받아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북한을 찬양해 이롭게 했다"는 등의 혐의로 다시 기소돼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1년 가석방됐다.

다음은 그동안 진실위에서 '납북어부간첩조작사건'을 담당했던 전 정광호 조사관과 지난 16일부터 18일까지 이메일로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간첩 몰려 이혼 당하고 자식 자살하고...

 정광호 조사관
정광호 조사관 ⓒ 정광호
- 진실위는 납북귀환어부사건으로 그동안 태영호 사건, 정삼근 사건, 서창덕 사건, 강대광 사건, 백남욱 사건, 임봉택 사건, 이상철 사건, 최만춘 사건, 정영 사건 등 모두 9건의 사건을 신청 접수했고, 9건 모두 진실규명 한 바 있다. 현재 납북어부사건 재판진행과 전체상황을 정리 한다면.
"현재 무죄판결을 받은 사건은 태영호 사건, 강대광 사건, 정삼근 사건, 서창덕 사건, 임봉택 사건, 백남욱 사건, 정영 사건 등 7건이며, 이상철 사건은 재심 중이고 최만춘 사건은 재심을 신청한 상태다.

진실위에서 2009년 직권조사를 위한 사전조사를 하여 파악한 납북귀환어부에 대한 간첩조작 의혹사건은 총 103건이다. 이중 인적사항이 확인되지 않은 1970년대 이전 간첩사건 관련자 40건과 진실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9건을 제외한 54건에 대해 국가기록원으로부터 판결문을 입수하고자 하였으나 인적사항 불명확 등으로 47건만 판결문을 입수했다.

그리고 입수한 판결문에 기재된 인적사항을 근거로 소재를 파악, 본인 또는 가족들 중 약 29명을 면담했다. 그 중 본인이 사망하거나 가족들이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한 4건을 제외한 25건에 대해 조사개시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2010년 5월 11일 진실위 전원위원회(전원위)는 범죄사실의 조작여부까지 조사한 7건의 조사개시를 의결하고, 나머지 18건에 대해서는 '납북귀환어부에 대한 인권침해사건' 명칭을 변경, 하나의 사건으로 묶어서 전원위에 상정하라고 의결했다.

하지만 이후 이영조 위원장 체제의 진실위는 18건의 납북귀환어부에 대한 인권침해 사건은 언제든지 상정만 하면 통과가 가능한 사건이므로 후에 논의하자며 무려 6차례를 논의하지 않고 뒤로 미루었다. 결국 정병석 위원이 이영조 위원장을 개별 면담하여 승낙을 받은 후에야 상정했다.

그러다 보니 진실위 최종결정기일인 6월 30일 전원위에 상정되었으나 조사기간 만료가 되어 더 이상의 조사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조사개시를 안 한다고 결정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조사개시를 한 김이남, 이병규, 김영일, 이성국, 윤질규, 김성학, 박월림 등 7건의 사건에 대해서는 진실규명 또는 일부진실규명으로 결정한 것이다."

- 서창덕씨의 경우 그동안 고통 받은 것에 비하면 국가의 손해배상 액수가 너무 적다는 비판이 있는데.
"당연히 국가배상이 적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납북귀환어부인 강대광을 친구로 두었다는 죄로 강대광 사건의 공동피의자가 되었던 김영석 선생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6개월 정도 밖에 살지 않았지만 죄가 없는 사람이 감옥생활을 하다 보니 너무나 억울하여 한 달만 더 있었다면 화병으로 죽었을 거야." 그런데 10년이 넘게 산 사람들은 어떠하겠나.

처가에서는 간첩과 결혼한 사실이 알려지면 연좌제로 피해를 입는다며 감옥에 있는 사람을 찾아와 이혼하게 했다. 자식들은 간첩자식라고 놀림당하다 학교도 못 다니고 간첩 아버지를 원망하여 자살까지 했다. 믿고 의지해야 하는 부모형제들마저 몇 십 년 동안 모른 체 하고 지낸 피해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국가의 손해배상은 그보다 몇 배는 많아야 한다. 국가는 그러한 억울한 사람을 더 이상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해자들에게는 구상권을 청구하거나 구속을 시키든지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만 한다."

- 서씨 등 '납북어부간첩조작사건'의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죄명이 벗겨지기까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나? 가장 가슴 아팠던 사연을 몇 가지 소개한다면.
"강대광 선생의 경우 형수 집안에서 형님마저 이혼을 시켰는데 형수가 아이들이 보고 싶어 만나려 해도 못 가게 하여 화병으로 이혼 2년 후 죽었고 형님도 화병으로 3년 후 사망했다. 강대광 선생의 딸은 같은 반 애들이 "간첩의 자식과는 함께 공부를 못 하겠다"고 하여 학교 선생님이 복도에 자리를 만들어 놓고 문을 열어 놓은 채 수업을 하기도 했다. 김용태 선생은 감옥에서 1급 기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대학 합격까지 한 후 출소했다. 그러나 장성한 아들이 입대를 앞두고 아버지가 보고 싶어 수소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만난 후 간첩인 아버지가 자신을 찾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며 한강에 투신자살하였다."

어부와 재일동포유학생은 왜 조작 간첩단 단골이었나

정광호 조사관 약력
2002. 4. - 2004. 7.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2006. 4. - 2010. 12.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
- 납북어부사건을 보면 주로 1960년대 당시 정권에 의해 처벌받고 10여 년이 지난 후인 1970~80년대 국가권력에 의해 다시 처벌을 받는 양상인 데 국가는 왜 그분들을 이중 처벌했나?
"어쩌면 이중 처벌일 수도 있고 어쩌면 별개의 사건이기도 하다. 1960년대 납북귀환어부들을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으로 처벌한 이유는 김신조 등이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이나 울진 삼척에 북한의 무장군이 침투한 사건 등이 납북귀환어부가 북한에 피랍되어 남한 지리나 관공서위치, 군부대 위치, 초소 위치 등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은 어부들이 남한해상에서 북한경비정에 피랍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귀환하면 수십 일 동안 구타, 고문 등을 가하여 북한해상에서 월선조업을 하였다는 허위자백을 받아내 처벌한 것이다. 진실위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시 중앙정보부는 경찰에 '혐의 없는 자라도 입건하라'는 지시를 하였고, 검찰은 법원에 사건을 기소하면서 '국가 시책에 의한 사건'이라고 기재하여 기소했다. 

이후 납북귀환어부들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처벌하였는데, 이는 정치적 이유가 가장 크다. 1970년 초반 "옆집에 온 손님 간첩인가 살펴보자"라는 표어가 마을 창고에 기재되어 있었다. 옆집에 온 손님도 간첩일 수 있다는 극단적인 반공사상을 국민들에게 주입시켜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려면 언론에 지속적으로 간첩을 검거했다고 발표하여 국민들을 착각에 빠지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는데 남파간첩들이 정권이 원하는 대로 검거되지 않았다. 그러자 간첩을 '국가정책으로' 양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납북귀환어부는 정권, 특히 공안기관 입장에서는 간첩을 생산하는 데 좋은 재료였다.

공안기관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첫째 납북귀환어부는 대부분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거나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로 자기 방어능력이 없었던 분들이었다. 따라서 공안기관이 요리하기 편했다. 둘째 납북귀환어부는 피랍되어 북한에 머물렀던 기간에 사회주의와 북한체제의 우월성 등을 교육받았고, 북한의 우수한 산업시설과 관광지 등을 견학 하였고, 남한에 내려가면 북한의 우월성을 지인들에게 홍보하라는 교육을 받았던 분들이다. 따라서 조금만 가공하면 간첩으로 만들 수 있는 반제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셋째 납북귀환어부들은 경제적 취약계층으로 변호인을 대부분 선임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완제품(법원에서 간첩판결을 받아 내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다른 부가재료(증거)가 별로 필요 없었다. 따라서 공안기관은 필요할 때마다 납북귀환어부들을 간첩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박정희가 죽고 난 서울의 봄 시절(1980년)에는 납북어부 간첩사건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총칼을 앞세워 들어선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다시 납북귀환어부들을 간첩으로 만들어 냈다.

진실위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재일동포유학생들도 간첩으로 만들어내는 데 좋은 재료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조총련 계열이니 민단계열이니 구분하여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조총련과 접촉하여 포섭되었다고 가공하기가 편했던 것이다. 또 법정에서 우리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그저 "예"하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도 간첩을 검거하였다는 공안기관의 발표를 보면서 납북귀환어부 사건과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을 조사했던 조사관들이 이야기하던 중, 이제는 탈북자를 가장하여 간첩으로 침투했다고 하는 것만 남았다고 농담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탈북자를 가장하여 침투한 간첩사건이 발표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지난 2008년 10월 24년만에 무죄를 선고 받은 서창덕씨가 군산지원 법정 앞에서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환히 웃고 있다.
지난 2008년 10월 24년만에 무죄를 선고 받은 서창덕씨가 군산지원 법정 앞에서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환히 웃고 있다. ⓒ 강용주

- 지금 재심예정 중에 있는 납북어부 사건의 피해자들도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것으로 예상하나? 납북어부 사건들과 관련하여 사법부에 건의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생각이 있는 재판부라면 납북어부 간첩사건은 모두 무죄판결을 하리라 예상한다. 그 이유는 대부분 납북귀환어부 간첩사건의 증거는 피해자의 자백인데, 모두 장기 불법구금, 고문 등 가혹행위에 의해 허위 자백한 것이다.

그 외 증거라고 하면 무인포스트를 설치하고 병속에 별표를 해서 묻어두어 접선하려는 자와 연락을 취했다는 증거로 제출된 농약병, 링거병, 잉크병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런 증거물들은 수사관들이 묻어놓고 피해자들에게 그 자리를 파게 한 후 사진을 찍어 제출한 실황조사서로 드러났다.

북한에서 공작금을 받아서 사용하고 남은 돈이라고 제시한 피해자들의 저축통장도 간첩의 증거물로 사용되었는데 사실 그것들은 독자적으로 증거가 되지 못하고 모두 피해자의 '자백'에 기초한 것들이다.

그리고 납북귀환어부들의 판결문에 군사기밀 탐지하였다고 적시된 것들을 보면 하나 같이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알 수밖에 없는 예비군초소와 무기고 위치, 지서 위치, 관공서 위치 등이다.

또한 납북되었을 때 북한에서 "쌀밥과 고깃국을 주더라", "모란봉을 구경하였다"는 등의 말을 여러 차례도 아니고 상대방이 궁금하다고 물어 마지못해 한두 차례 한 것이 '북한찬양고무죄'로 되었다."

- 납북어부사건 조사 당시 가장 어려웠던 점이나 그동안 진실위 활동을 통해 나누고 싶은 소회가 있다면.
"정부기관의 비협조로 기록이나 수사관들의 인적사항을 확보하지 못할 때 어려움을 느꼈다. 또 인적사항은 확보했지만 가해자들이 조사를 거부할 때 진실위법으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어 힘들었다.

납북귀환어부 사건을 조사하면서 진실위 존재를 몰라 사건을 신청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추가신청을 받아서 조사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조사보고서가 재심 등을 중심으로 작성되다 보니 사건의 발생배경 등의 조사에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있다.

진실위가 10건의 납북귀환어부에 대한 간첩조작의혹사건을 조사한 결과 납북귀환어부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그러나 이영조 위원장 체제하에서는 미신청 사건에 대해서 직권조사 등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직권조사를 거부할 때 아쉬웠다. 납북귀환어부들 중 반공법 및 수산업법 위반으로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 진실위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조사결과를 분석한 종합보고서가 나와야 하는데 사건 조사결과를 나열한 보고서를 국민 앞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안타깝다."


#김성수#정광호#진실화해#납북어부#서창덕#간첩조작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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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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