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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군 생비량면 도전리 마애불상군(경남유형문화재 제209호). 30cm 정도 크기의 마애불들이 4단으로 줄지어 조각되어 있다.
 경남 산청군 생비량면 도전리 마애불상군(경남유형문화재 제209호). 30cm 정도 크기의 마애불들이 4단으로 줄지어 조각되어 있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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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에 사는 지인이 전부터 한번 놀러 오라고 해서 지난 9일에 산청서 저녁 약속을 하게 되었다. 지긋한 나이에도 여전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분인데, 평소 시간적 여유가 나보다 더 없는 편이다. 그렇다고 그저 저녁 식사만 하러 그곳까지 가기에는 싱겁다는 생각이 들어 가벼운 여행을 겸해서 가까운 친구와 같이 산청에 다녀오게 되었다.

작은 목화씨 한 톨의 기적을 보다

오전 11시 40분께 창원서 출발하여 우리나라에서 처음 목화를 재배했던 목면시배유지(사적 제108호,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2시 50분께. 우리는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작은 목화씨 한 톨의 기적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목화씨 한 톨의 기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따뜻한 옷을 입게 해 준 주인공은 너무나 유명한 삼우당 문익점 선생, 그리고 그의 장인 정천익이다. 문익점 선생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서장관(書狀官) 자격으로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다.

그런데 당시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에 있던 최유가 기황후(奇皇后)를 설득해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옹립하려는 모사를 꾀하자, 그는 공민왕 폐위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신하로서 절개를 지키다 원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한동안 억류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목화를 재배했던 목면시배유지(사적 제108호). 
 우리나라에서 처음 목화를 재배했던 목면시배유지(사적 제108호).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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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13년(1364), 원 조정의 억류에서 풀려난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10여 개의 목화 씨앗을 붓두껍에 숨겨 가지고 고려로 돌아와 그것을 장인 정천익과 함께 고향에 심었다. 하지만 그가 심은 것은 모두 죽어 버렸고, 정천익이 심은 다섯 개 목화씨 가운데 오직 한 알만이 싹을 틔우게 되었다.

정말이지, 몇 번이고 들어도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우리 의생활에서 혁명적인 사건으로 기록되는 목화씨 한 알의 기적이 이렇게 두 분의 용기와 지혜와 끈기에 의해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바람이 꽤 차갑게 불어 대는 목면시배유지에서 나와점심으로 추어탕을 먹으러 우리는 산청군 농협 단성지점 앞에 위치한 목화식당으로 갔다. 추어탕의 깊은 맛을 즐길 줄 모르는 나로서는 맛집에서 먹고 있다는,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을 뿐인데, 손님이 연이어 줄을 잇는 이름난 추어탕 집이었다.

남사예담촌서 옛 선비들의 삶을 그리다

이씨 고가에 이르는 돌담 길에는 일명 선비나무로 알려진 회화나무 두 그루가 X 자 형태로 서 있다. 남사예담촌의 상징적 나무들로 수령이 300년이다.
 이씨 고가에 이르는 돌담 길에는 일명 선비나무로 알려진 회화나무 두 그루가 X 자 형태로 서 있다. 남사예담촌의 상징적 나무들로 수령이 300년이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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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목면시배유지를 지나서 오후 2시께 남사예담촌(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남사마을)에 도착했다. 남사예담촌은 옛 선비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전통한옥마을이다. 남부지방에서 사대부가 살았던 전통적인 한옥으로 이곳 남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이씨 고가(경남문화재자료 제118호) 쪽으로 걸어갔다.

이씨 고가에 이르는 돌담길에는 일명 선비나무로 알려진 회화나무 두 그루가 X 자 형태로 서 있다. 남사예담촌을 상징하는 수령 300년 된 나무들로 마을 지형으로 인한 불의 기운을 막기 위해 심었다 한다. 잎이 무성한 계절이면 더욱 예쁠 것 같은 이 부부나무 아래를 통과하여 돌담 끝에 있는 대문을 열자 1700년대 건축인 이씨 고가의 사랑채가 나왔다.

남사예담촌의 이씨 고가(경남문화재자료 제118호) 사랑채.
 남사예담촌의 이씨 고가(경남문화재자료 제118호)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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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예담촌의 최씨 고가(경남문화재자료 제117호)에 이르는 돌담 길 풍경은 참으로 운치 있고 정겹다.
 남사예담촌의 최씨 고가(경남문화재자료 제117호)에 이르는 돌담 길 풍경은 참으로 운치 있고 정겹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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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는 팔작지붕으로 앞면 4칸, 옆면 2칸 반의 크기이다. 고요 속에 잠긴 사랑마당에 서 있으니 한순간 시간이 정지된 느낌마저 들었다. 안채는 주인의 생활 공간이라서 그런지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우리는 남부지방의 또 다른 전통 사대부 한옥으로 남사마을 중앙에 자리 잡은 최씨 고가(경남문화재자료 제117호)로 걸음을 옮겼다.

경화당 부근 수령 220년 되는 은행나무를 지나서 돌담을 따라가다 보면 골목 끝에 최씨 고가가 있다. 이 고택에 이르는 돌담길 풍경이 참으로 운치 있고 정겹다. 최씨 고가에는 또한 옛 시절의 기발한 아이디어라 할 수 있는 독특한 뒷간이 있어 인상적이었다. 여느 뒷간과 달리 계단을 올라가 2층에서 일을 보게 끔 만들었는데, 사람의 똥이 가장 좋은 비료였던 옛날에 효과적인 인분 활용을 위한 것으로 옛사람들의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작은 마애불들의 아름다움에 추위를 잊다

도전리 마애불상군에서 내려다본 풍경. 얼어붙은 강물이 문득 내 어렸을 적에 겪었던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떠올리게 했다. 
 도전리 마애불상군에서 내려다본 풍경. 얼어붙은 강물이 문득 내 어렸을 적에 겪었던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떠올리게 했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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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남사예담촌에서 나와 문대삼거리(경남 산청군 신안면 문대리)를 거쳐서 도전리 마애불상군(경남유형문화재 제209호, 경남 산청군 생비량면 도전리)에 이른 시간은 오후 4시 30분께였다. 이 마애불들은 부처덤이라 불리는 구릉 남쪽의 자연 암벽에 새겨진 것으로 총 29구인데 처음에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4단으로 줄지어 조각된 30cm 정도 크기의 마애불들을 마주한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작은 크기의 마애불들을 무리 지어 새겨 놓은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1단에 14구, 2단에 9구, 3단에 3구, 4단에 3구가 배치되어 있고 전체적인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말엽에서 고려시대 초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 더 강하게 엿보이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연꽃무늬 대좌(臺座) 위에 가부좌를 하고 있는 불상들의 눈, 코, 입이 심하게 마멸되어 안타까웠다.

연꽃 무늬 대좌(臺座) 위에 가부좌를 하고 있는 불상의 얼굴이 심하게 마멸되어 안타까웠다.
 연꽃 무늬 대좌(臺座) 위에 가부좌를 하고 있는 불상의 얼굴이 심하게 마멸되어 안타까웠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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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몹시 추웠다. 이곳에서 내려다본 강물도 얼어붙었다. 문득 내 어렸을 적에 겪었던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떠올랐다. 우리는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 문대삼거리에 도착하여 반가운 지인을 만났다. 그리고 합천으로 같이 이동하여 저녁을 함께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서울→ 청계광장→ 청계2가→ 요금소(삼일로)→ 고가도로(한남로)→ 경부고속도로→ 통영대전중부고속도로→ 목면시배유지 * (통영대전고속도로) 단성 I.C→ 지리산 방향(국도 20호)→ 단성면 남사리 남사예담촌



태그:#문익점, #남사예담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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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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