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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20일 재개발 문제로 투쟁하는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진압 과정 속에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6명의 죽음의 문제가 철거민의 화염병이 문제 인지 경찰의 폭압적인 진압 때문인지에 대한 논란이 많이 있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용산 참사라 부른다. 그 사건이 일어 난지 2년이 지났다. 2년이 흘렀지만 내 인생에서도 용산참사는 잊기 힘든 일이다.

 

빈민현장활동 기간 중 용산참사 소식 듣다

 

2009년 1월 겨울 대학생사람연대라는 학생운동 단체 친구들과 함께 부산지역의 빈민 지역의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 '빈민현장활동'(이하 빈활) 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 부산 빈활은 대연-우암 공동체라는 곳에서 부산외국어대와 개발의 문제로 10여 년 싸운 주민들을 만나고 한국 사회의 재개발 문제를 고민했었다. 1월 17일부터 20일까지 마을 회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활동을 해나갔었다.

 

1월 19일 밤 또한 17, 18일의 밤 때와 마찬가지로 각 활동가들이 편성된 조에서 평가를 진행하고 다음날 일정을 확인하며 잠이 들었다. 20일 아침 눈을 뜨자 많은 사람들에게 똑같은 내용의 문자가 도착했다.

 

"서울 용산, 철거민 투쟁하다 5명 사망."

 

첫 문자를 확인했을 때는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믿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문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실감하지 못했지만 마을 대표가 아침 일찍 우리 숙소로 와서 한 마디 하자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분들. 아침에 소식을 들어서 알겠지만 서울 용산에 철거민 5분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이른 아침 여러분들이 계획한 다른 일정이 많겠지만 일단 오늘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용산에서 돌아가신 철거민들의 이야기를 알려나가는 활동을 부산에서 만들어 봅시다."

 

용산참사 기자회견에서 울음을 터트리다

 

빈활을 함께 하는 친구들 모두 표정이 침울했다. 활동 중에 철거민들이 투쟁을 하다가 분신을 하시거나 용역 깡패의 폭력 앞에 사망한 사람들의 역사를 책을 통해 살펴보았다. 근데 책에서 나오는 상황을 현실로 맞이하게 되자 모든 활동가들의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철거민들의 죽음 앞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 무력했었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 빈활 단장을 맡은 친구 녀석이 유인물을 한 보따리 들고 와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자고 있을 때 저는 이 소식을 먼저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분노하고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없습니다. 용산에서 돌아가신 철거민들의 죽음을 부산의 시민들에게 알려나가기 위해 거리로 나갑시다. 미리 저랑 마을 대표님이 유인물을 만들었으니 이걸 오늘 하루 안에 다 뿌립시다."

 

아침 일찍 세면도 하지 않고 빈활에 참가하고 있는 학생 20명은 지하철을 타고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철거민의 죽음을 알려나갔다. 그리고 부산지역 시민 사회 단체 준비한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기자회견장은 싸늘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발언을 할 때 마다 슬픈 나머지 빈활 활동가들은 울기도 했다. 그리고 울부짖는 목소리로 "철거민 죽이는 이명박 정부 규탄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민들에게 용산참사를 기억해달라고 외쳤다.

 

용산참사 추모집회 참석, 벌금 200만 원 선고받다

 

빈활이 끝나고도 용산참사의 부당함을 알려나가기 위해 계속 활동했다. 2009년 2월 6일에는 서울에 갈일이 있어 용산참사 추모제에 참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추모제를 참석했다는 이유로 연행이 되어 200만 원의 벌금을 선고 받았다. 당시 정부 측은 용산참사와 관련 된 모든 집회와 기자회견은 불법으로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집회를 참석만 해도 연행과 구속·벌금 등이 선고됐다.

 

연행이 되었을 때 정보과 경찰들의 추궁은 불편했다. 용산참사에 참석하게 된 배후를 찾기 위해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왔는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반복했다. 신문 방송을 봤다고 하면 어떤 신문과 방송을 보고 왔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어떤 단체의 소속이냐고 계속 추궁하며 우리를 마치 불법 데모만 하기 위해 작당된 그룹의 회원들로 몰고자 했다.

 

결국 같이 잡혔던 친구가 대학생사람연대의 소속이라고 말했는데, 연행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경찰은 우리 단체 회원들에게 불법 체증을 통해 벌금과 구속 영장을 발부하기도 했다. 그 당시 대학생사람연대 회원 10여 명이 벌금과 구속영장을 받았었고 그 벌금을 다 합하면 2-3천만 원이나 되는 액수였다.

 

말도 안 되는 벌금과 구속 영장에 회원들은 모두 항소를 하며 재판을 진행했었다. 나 또한 200만 원의 벌금이 있기 때문에 서울까지 가서 재판을 진행했다. 연행된 것에 대한 충분한 증거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재판은 시작하자마자 5분도 체 안 돼서 끝났었다. 이후에도 인권단체 활동가가 내가 구형 받은 일반교통법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소송을 걸고 있어 판결이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걸로 봐서는 아직도 일반교통법이 위헌인지 합헌인지 판결이 나지 않은 것 같다. 

 

용산참사의 진실의 증인은 살아있다

 

용산 참사가 일어 난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 참사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 작년 11월 11일 대법원은 용산참사 사건의 철거민의 상고를 기각했다. 결국 대법원은 경찰의 진압과정이 정당했다는 것을 사실로 판결했다.

 

법원에서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2009년 1월 20일 용산참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들은 아직 한국 사회에서 살아 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 용산참사와 같이 재개발 문제로 싸우고 있는 철거민들이 아직 존재한다. 그들 또한 생존권의 문제를 걸고 용산참사의 뜻을 이어가고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진실은 이런 사람들이 있는 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 20일 서울, 부산에서 용산참사에서 사망한 철거민 5명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문화제가 7시에 열린다. 사망한 철거민들의 못 다한 뜻을 들으러 오늘 추모제에 참석해야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용산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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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부산본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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