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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카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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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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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후반에 여전히 자유로운 싱글녀로 살고 있는 이민주(가명)씨. 난생 처음으로 정기적금 만기일을 목전에 두고 배실배실 웃음이 나오는 기쁨을 맛보고 있다.

"제가 직장 생활만 10년 넘게 했는데,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적금 넣고 돈 타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비록 1년짜리긴 하지만요."

예전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일단 신용카드로 사고 갚으면 되니까 굳이 돈을 모을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신용카드 월평균 결제액이 30~40만 원 수준이던 게 어느 순간부터 100만 원을 훌쩍 넘기기 시작하면서부터 결제일의 압박이 심해져서 일단 재무상담사의 말을 따라 신용카드를 안 쓰기로 해봤다. 그리고 대신 적금을 넣고 만기에 그 돈으로 사고 싶은 것을 사보기로 결심한 것이 불과 1년 전.

적금을 타게 되면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노트북 사려고요. 제가 지금 쓰는 노트북이 너무 오래된 거라 바꿔야 하거든요. 매장 가서 구경할 때마다 지금 곧바로 지르고 싶은 맘 참느라 애 좀 먹었죠."

그런데 이민주씨는 노트북을 사지 못했다. 갑자기 아빠가 고혈압으로 쓰러지시면서 민주 씨의 노트북 구매 비용은 아버지 병원비로 다 쓰였다.

"솔직히 진짜 속상했어요. 처음으로 돈 모아서 내가 사고 싶은 것 사려고 그동안 많이 참았던 건데. 아빠만 아프지 않으셨어도... 아빠 그렇게 갑자기 쓰러지신 것도 물론 속상하지만요."

당신에게도 '적금 징크스'가 있다고 생각하나

어떤 이들은 '적금 징크스'가 있다고도 말한다. 꼭 적금을 부으면 크게 돈 쓸 일이 생긴다는 이상한 인과관계에 대한 경험담이다. 이민주씨도 어쩌면 '적금 징크스'에 걸릴 우려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애써 모은 돈을 예기치 않은 곳에 쓰고 나면 상실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민주씨가 노트북을 사기 위해 돈을 모았든 모으지 않았든 아버지가 쓰러지시게 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번 일로 민주씨의 노트북이 저 멀리 사라지긴 했지만, 급한 돈을 빚으로 충당해야만 하는 상황은 모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노트북을 카드로 구매해놓은 상황이라면 본의 아니게 이중고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는 생각 안 해봤어요. 정말 그러네요."

일단 '지르고' 보는 일과 돈을 모아서 쓰는 일은 이렇게 굉장히 다른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 물론 아무 일 없었다면 문제되지 않았을 일이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늘 그렇게 '뭔 일이야 있겠어?'라며 무사안일하게 생각할 때 느닷없이 내 뒤통수를 후려치지 않나.

내 수준에서 아무리 계획이란 걸 정교하고도 멋지게 세워놓는다고 해도, 미래에 대한 최소한의 예측도 없이 내 삶을 통째로 '예측불가능성' 속에 두면, 미래는 곧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 수도 있다. 나이가 들어 갑자기 미래가 두려워지는 것만은 아니란 얘기다.

그런데 문제는 기껏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이에 대한 경제적 플랜을 마련해서 실천 중인데, 이민주씨의 경우처럼 실타래처럼 꼬여버리는 일이 발생할 때다. 만약 이 두 사안 중에서 우선 순위를 정하라면 당신은 어떤 것을 우선 순위로 놓겠는가?

내가 우선 순위로 놓기도 전에 '해야만 하는 일'은 일정 정도 우선 순위에서 강제성을 띤다. 과연 민주씨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쓰러지신 아버지를 뒤로 하고 노트북을 사기로 결정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하고 싶은 일'은 '해야만 하는 일'을 잘 수행해낼 때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포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상사, 누군가의 부하직원, 누군가의 친구 등 수많은 씨실과 날실로 위치지워진 우리는 자유로운 인격적 개체가 아니라 관계망 속에서 '인간 구실'을 하고 살아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이 '위치 지워진 좌표' 속에서 내가 해야만 할 일에 대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수동적 대처로는 행복을 얻기 어렵다. 먼저 '해야만 하는 일'을 파악하고 자신의 '기대역할'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어쩌면 평안과 행복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는지도 모른다.

문화생활 대신, 부모님과 함께 하기로 한 그녀

노트북을 사지 못한 이민주씨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 의외로 민주씨는 노트북에 대한 미련은 잊은 지 오래다.

"아, 최근 아빠가 퇴원하시고 나서 두 분 모시고 다니면서 맛난 것도 먹고 좋은 것도 사드리고 그렇게 지내요. 생각보다 부모님께 뭘 해드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다보니 돈을 더 쓰게 되어서 노트북 사는 건 더 뒤로 미뤘어요. 그런데 전혀 억울하거나 섭섭하지 않아요. 이번 기회에 제가 병원비를 내게 되어서 철딱서니 없는 큰 딸이 아니라 어엿한 큰 딸로 봐주시는게 참 좋았어요. 맛있는거 드시면서 좋아하시는 모습 보니 왜 진작 이렇게 안하고 살았나 싶은 생각도 들만큼 요즘 참 돈 쓰면서도 뿌듯해요."

민주씨는 이제 부모님께 매월 일정액을 정해놓고 쓰기로 결정했다. 마음이 동한다고 해서 또 무조건 쓰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을 테니까. 정해진 예산 내에서 부모님과 의논해서 해드리고 싶은 걸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런 새로운 예산 항목이 생성되었기에 민주씨의 문화생활비 예산이 축소되었다.

"당분간은 제가 즐기며 사는 것보다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으로 돈을 쓰려고 해요."

'하고 싶은 일'은 삶을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중요한 요소다. 사고 싶은 걸 사고, 먹고 싶은 걸 먹고, 가보고 싶은 곳에 가고... 그렇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살도록 할 때 우리는 인생살이의 고달픔 내지 갑갑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하는 인생의 숙제는 '해야만 하는 일'의 수행 여부에 달려 있는게 아닐까. 부모님이 꼭 아프셔야 그때 효도의 의미를 배우고, 소중한 사람이 꼭 떠나야 그 소중함을 느끼게 마련인 부족하고 미련한 인간인지라, 신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강제적으로 부과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아서 먼저 잘 하면 참 좋으련만.

덧붙이는 글 | 박미정 기자는 재무상담사입니다.



#재무목표#미래계획#돈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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