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국치(國恥) 100년에 즈음하여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 기자 말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한국인이 혁명정부의 도독부 총참의(고문) 겸 육군소장으로 임명되다니. 범재 김규흥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무창봉기로 촉발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중국을 끌고 가는 기관차가 바뀌었다. 청제국은 망하고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대신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그 기관차에 올라앉은 유일한 조선 사람이 김규흥이었다. 중국의 새로운 수뇌 급 인사인 손문, 당소의, 추노, 진형명과 한인 사이의 연결고리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누구보다 먼저 1908년 3월 중국에 망명한 김규흥. 신해혁명의 진원지 광동에 거주하며 혁명의 주역들과 일찌감치 안면을 익혔다.    

 범재 김규흥(1872-1936)
범재 김규흥(1872-1936) ⓒ 독립기념관
그는 김현구의 이종사촌 형이다. 김현구가 누구인가. 박용만이 교장으로 있던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의 훈련생이었고 졸업한 다음 교관이 되지 않았던가.

박용만의 변함없는 지지자로 '박용만전', '이승만전', '정순만전' 이른바 '3만'에 대한 전기를 남긴 사람. 그 김현구가 어릴 적 고향인 옥천에 살 때 나이차가 많은 범재는 좋은 책들을 구해다 주기도 한 자상한 형이었다. 

1922년 11월 김규흥은 북경에서 흥화실업은행을 설립한다. 중국인과의 탄탄한 인맥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은행은 한인들과 중국인들이 최초로 합자해서 만든 기업체였다. 박용만은 그때부터 그의 사업 파트너가 된다. 9살 더 젊은 박용만은 무대 위에 나서고 범재는 주로 보이지 않는 막후의 연출자가 된 것이다. 

중국어도 서툴고 중국인과의 인맥도 없던 박용만이 은행이다 농장이다 판을 크게 벌이고 또 군벌의 최고 사령관을 만나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김규흥이 쌓아놓은 기반이 없었다면 어찌 가능했을까.

김규흥은 직예파 군벌인 풍옥상의 군사고문을 지낸 적도 있었다. 박용만이 풍옥상을 쉽게 접촉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나중 일이지만 1929년에는 만주 군벌 장학량의 배려로 범재는 '재만한인입적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했다.

 북경흥화실업은행 창립기념. 앞줄 좌로부터 5번째 범재 김규흥, 우로부터 3번째 김구
북경흥화실업은행 창립기념. 앞줄 좌로부터 5번째 범재 김규흥, 우로부터 3번째 김구 ⓒ 독립기념관

 흥화실업은행 창립기념사진 부분확대. 앞줄 우로부터 3번째 김구, 4번째 신채호, 그 바로 뒤가 박용만.
흥화실업은행 창립기념사진 부분확대. 앞줄 우로부터 3번째 김구, 4번째 신채호, 그 바로 뒤가 박용만. ⓒ 독립기념관

북경흥화실업은행 창립을 기념해서 찍은 사진에는 당연히 범재가 앞줄에 앉아 있다. 모두들 도토리 모자를 쓰고 짱꼴라(중국인을 중꿔런이라 부르는데 와전된 발음) 옷들을 걸치고 있는데 양복에 넥타이 맨 김구가 깜짝 출연하고 있다.

그 옆에는 눈매가 매서운 신채호도 보인다. 김구는 왜 그 자리에 끼게 됐을까. 상해에서 북경까지 온다는 것은 체포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그리고 북경은 상해 임시정부를 부인하는 박용만이나 신채호 등 소위 창조파의 소굴로 껄끄러운 장소가 아닌가.

무엇보다 이상한 건 기념사진을 찍은 사람들에게서 도대체 돈 냄새라곤 맡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앞줄에만 노털들이 앉아 있을 뿐 뒤에는 온통 새파란 청년들뿐이니 도대체 은행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혹시 은행이 잘 돼 독립운동 자금을 무제한 융자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너나없이 꾸역꾸역 모여든 건 아니었을까.

김구가 참석을 감행한 건 다목적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설립될 때 후원을 아끼지 않은 범재 선생의 얼굴을 봐서였다. 임시라는 관형어가 붙긴 했지만 명색이 한국 정부인데 중국의 거물급 정치인들이 후원하는 최초의 한중합판사업을 외면할 수도 없는 이유도 있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의열단 때문이었다. 1919년 11월 만주의 길림성에서 조직된 의열단은 그간 북경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의열단은 암살과 파괴 그리고 테러 등 과격한 방법의 독립운동을 실행해 나가기로 결의한 단체였다. 한 말로 김구의 입맛에 맞는 동지들이니 수인사를 나눠둘 필요가 있었다. 사진을 같이 찍은 젊은이들 가운데는 의열단 단원들도 섞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북경흥화실업은행 개막기념'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돈 냄새 대신 화약 냄새 같은 것이 솔솔 풍긴다.

흥화실업은행은 1922년 창립됐지만 발기된 것은 3년 전이었다. 1919년 11월 15일자 상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의 기사를 훑어보자.

 1919년 11월 15일자 독립신문에 흥국은행창립 기사가 보인다.
1919년 11월 15일자 독립신문에 흥국은행창립 기사가 보인다. ⓒ 독립기념관

"중한(中韓) 양국의 친선을 도모함에는 위선 실업제휴에 있다는 주의 아래 우리 측에 김복(범재 김규흥의 가명), 김무규, 김남헌, 이유필 중국인측에 왕정정, 사원함, 진형명(중국 신해혁명의 주요인물) 등 제씨가 흥국실업은행(주식회사)을 발기했는데 찬성인으로는 김일강, 손문, 장건, 오정방, 이열균, 호한민, 고일청 등 중한 양국에 유력한 명사들이 후원하며 동은행의 목적은 중국 흑룡강 길림 봉천 등 지의 농간사업을 진흥케 하기로 해 자본금 총액을 은폐 2백원으로 하고 제1회 수납금은 총액의 4분지 1로 해 목하 주식을 공모 중이라는데 이는 한국의 독립선언 후 중한합판사업의 효시라고."

3.1운동 이후 범재가 모색했던 독립운동의 방책은 의열단을 통한 항일무력투쟁과 둔전제를 이용한 정규군 양성이었다. '무력투쟁'과 '둔전제'는 박용만이 일편단심 추구해 왔던 노선과 일치하는 것이어서 둘은 이후 그림자처럼 행동을 같이 하게 된다. 박용만 외에 그와 노선을 같이 했던 동지들은 신채호, 이회영, 김창숙, 이유필, 김구 등이었다. 그들이 거의 얼굴을 내밀었으니 이건 은행의 개막기념식이 아니라 또 다른 독립운동의 출정식이었다.

범재와 박용만의 북경에서의 행적은 일본 영사관이나 북경에 파견된 조선총독부의 밀정에 의해 끊임없이 추적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밀정 목등극기(木藤克己)는 1923년 6월 8일 '북경재주 조선인의 최근상황' 이라는 문서에서 그 시기 박용만의 동태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전략) 최근에 있어서의 불령선인의 행동 중 가장 주의해야 될 것은 박용만의 행동인데 군사통일회(1921년 4월) 이후 하등 현저한 행동을 안했지만 그 원인은 군사통일회의 실패가 자금의 부족에 있음을 자각하고 잠시 은인하여 실력을 양성하려 하여 김규흥과 획책하여 흥화실업은행이란 것을 일으켜 이 은행의 신용을 이용하여 북경과 만주방면에 토지를 구입하고 그 부하와 각지에 산재하는 소위 군인이라 하는 자들로 귀농케 하여 농한기에 연병양기하여 점차 각 군사단체를 통일하고 유력한 일단을 이루고 스스로 군사령관으로서 기회를 타서 서서히 거사할 것을 원하였다.

박용만은 그어간 서간도 방면에 사람을 보내고(1921년 9월) 군정서와 통일교섭을 하였고 한쪽으로는 북경성 외 서산록(西山麓)의 석경산(石景山)에 있는 땅을 빌려 수전(水田)을 경영했고 또 김복(金復, 범재 김규흥의 가명) 등과 모의하여 흥화실업은행 창립을 위해 크게 뛰어다녔는데 불행히 그의 계획은 사사건건 실패에 돌아갔다. (하략) "

은행은 창립됐으나 오래 버티지 못했다. 조선인 측의 출자가 미미했기 때문이다. 자본금 5백만 불로 인가된 은행은 선중합판(鮮中合辦)이었다. 헌데 한인들이 출자한 돈은 2만 불도 되지 않았다. 박용만도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하와이에서 송금해온 돈은 고작 400 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중국인 주주들은 한인들에 대한 신뢰를 접었다.

그렇지 않아도 미약한 단계에 있는 은행에서 박용만은 2500 달러를 대출했다. 석경산 농장 경영비가 필요해서였다. 그러나 그 돈은 다른 데 유용됐다. 개인비용이었는지 아니면 중국의 당소의(唐紹儀)에게 정치자금으로 제공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쨌든 농장 임대료를 지불할 수 없는 형편이 됐다. 석경산 농장의 지주인 중국의 사원은 박용만을 관에 고소했다.

농장경영에 실패한 박용만은 암담한 처지가 됐다. 가족들 부양도 버겁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두 집 살림이었다. 본처와 딸 그리고 사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경으로 이주해 와 있었다. 본처는 병석에 누워 있고 2년 전 새로 결혼한 중국계 부인 웅소청은 임신 중이었다. 일정한 수입이 없자 생활난은 극심해졌다. 박용만은 무엇이든 활로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1919년 5월 4일 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일어난 5.4 운동은 반제, 반봉건 혁명의 시작이었다.
1919년 5월 4일 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일어난 5.4 운동은 반제, 반봉건 혁명의 시작이었다. ⓒ 미상(저작권해제)

1922년 4월 제1차 봉직(奉直)전쟁이 일어났다. 북경의 직예파와 만주의 봉천파 군벌 간의 전쟁이었다. 박용만은 직예파 사령관 오패부(吳佩孚)를 찾아갔다. 물론 김규흥을 통해 다리를 놓고 접근한 것이다. 자신에게 자금과 무기를 대주면 만주의 한인들을 무장시켜 봉천군을 배후에서 공격하겠다는 거였다. 그게 이뤄지지 않자 다음해 5월 초 제남으로 가서 오패부의 참모장인 산동성장 웅병기(熊炳璣)를 만났다.

"성장 각하, 만주에는 싸울 수 있는 한인 장정이 한 2만은 되오. 그 중 3분의 1은 이미 무장이 돼 있소. 직예측에서 부족한 무기와 군자금 100만 원을 대주면 우리가 봉천군의 배후를 공격하겠소."
"좋은 생각이오만 당장 결정할 수 없는 일이요. 일단 최고 사령부에 진정을 해 보겠소."

웅 성장은 대총통 조곤에게 20만 원의 군자금을 공급하면 좋겠다는 의견서를 써서 박용만에게 건넸다. 북경으로 돌아온 그는 5월 12일 보정으로 가서 조곤을 만났지만 헛물을 켰다. 빈손으로 돌려보내기가 미안했던지 경비나 보태라고 몇 백 원을 손에 쥐어줄 뿐이었다.
 
박용만은 코가 석자나 빠졌다. 활로가 보이지 않았다. 엇비슷한 시기 이승만도 하와이에서 벌목과 토지개간 사업을 벌였다가 파산하고 만다.

이승만의 추종자들로 동지회가 결성된 건 1921년 7월. 동지회의 3대 정강은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되 비폭력적이어야 하며 개인행동을 버리고 단체 범위 안에서 지휘에 복종하며 경제 자유가 민족의 생명이니 자작자급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자작자급을 도모하기 위해 이승만은 동지식산회사를 세웠다. 자본금 5만 달러의 주식회사를 수립하고 1926년 3월 오울라 지방에 있는 산판 930 에이커를 약 1만 달러로 매입했다. 벌목과 토지개간과 목탄제조 및 채소농사를 겨냥한 거였다. 이승만은 그 산판에 한인들의 공동체도 형성하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사업에 매달렸다. 그러나 막대한 투자 없이는 개발이 불가능했다.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하와이 출신 미 하원의원 휴스턴을 찾아갔다. 미 해군과의 계약위반으로 인한 벌금을 탕감하는 법안을 미 연방 하원과 상원에서 통과되도록 간청한 것이다. 그걸 보면 이승만은 외교에 있어 한 수 위인 것 같다.

박용만이나 이승만이나 사업에는 운이 따라 주지 않았다. 사업하기가 독립운동 보다 더 어렵다는 비싼 수업료를 바쳐야 했다.*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박용만 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