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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면서 버티던 모습
▲ 인공호흡기로 연명중인 모습 살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면서 버티던 모습
ⓒ 권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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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기사①] 동병상련은 이런 것... 한 추모관의 두 엄마

[이전기사②] 효자폰 선물하고 하늘나라로 간 우리 아들

[재훈 어머니 이야기] 우리집 아이 재훈이는 정말 효자였어요. 자라면서도 단 한 번도 부모 속을 썩이는 일이 없이 늘 잘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가 스스로 알아서 척척 하는 아이였어요. 군대에 가기 전에 합기도 도장에서 부사범으로 아이들을 지도하고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너무 따라서 집에도 데리고 올 정도로 아이들을 좋아하기도 하였지요.

2009년 5월 11일에 입대해 훈련이 끝나고 자대 배치를 받은 후 대전 통신학교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11월 16일 자대 배치를 받았대요. 하사관이기 때문에 핸드폰이 있어도 아이들 앞에서 전화를 할 수 없다고 가끔 문자만 보낼 정도로 조심성스러웠지요.

그런데 2010년 2월 말일날에 재훈이 상사되시는 분이 전화를 해서 "재훈이가 우울증이 걸려서 밥도 안먹고, 머리가 아프다며 친구들과 말도 잘 않고 그러니 면회를 한 번 와주셨으면 합니다"라며 "포천 병원에도 데리고 가봤는데 이상은 없다고 해요, 그냥 우울증이라고 했을 뿐이고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3·1절 연휴기간 동안에 급히 아들 면회를 하려고, 부랴부랴 달려 갔지요. 그런데 부대에 간 우리들에게 당직이었던 중대장이 나와서 잠시만 기다리면 나올 것이라던 아들은 나오지 않았어요. 아들이 면회소로 나올 수조차 없다는 연락에 망연자실했지요.

부대에서 우선 아버지만 들어오시라고 해 그렇게 했는데, 남편이 들어간 지 30여분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어요. 근데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얼마나 기다렸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게 초초해 하고 있는데, '어머니도 들어오시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세브란스에서 1차 수술후 회복되어 가던 때의 모습
▲ 1차 수술후 회복실에서 세브란스에서 1차 수술후 회복되어 가던 때의 모습
ⓒ 권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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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어가서 보니, 그렇게 건강하던 아이가 중대장실 소파에 앉아 있는데 반쯤 늘어져서 얼굴은 하늘을 향한 채 늘어져 있는 거예요. 마침 대대장이 눈이 많이 와서 걱정이 되었던지 들어 왔다가 이 모습을 보고

"요새 스트레스 받은 적 있나?"하고선 어떤 조치도, 어떻게 하라는 명령도 없이 나가 버렸어요. 아들이 멀건 구토를 해대면서 말조차 하지 못하고 실신해 있는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혔어요. 연휴 기간 동안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의무실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라 판단돼서, 이만저만 화가 난 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마구 소릴 지르며 항의를 하고 병원에 데려가게 해달라고 했어요.

"아니 아이가 이렇게 위독한 상태가 되었는데 방치해두는 법이 어디 있어요? 이게 당신의 아들이라면 이렇게 두었겠어요? 장병 모두가 당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살펴 주어야지 이게 뭐냔 말이에요!"

마구 악을 쓰면서 이 모양이 되도록 병원에도 안 가보고... 죽어도 좋단 말이냐고 따졌어요. 그러면서 어서 병원 이송을 해줄 것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군 규정상 바로 민간 병원으로 이송이 안 된다며 군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군병원으로 가게 되었어요.

연휴라 의무관도 없었지요. 간신히 연락이 됐지만, 이곳 의무관의 진단이 있고 허락을 받아야만 했기에 시간이 지체 되었지요. 이 때 이미 아이는 정신을 잃고 옷에 소변을 보는 등 사경을 헤매고 있었어요. 마침내 민간병원으로 이송하기로 결론이 나서 세브란스로 옮겨 입원하였지만, 생명을 건질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MRI를 찍으려다가 숨이 멎어가, 간신히 심폐소생술을 해서 살려 가지고 응급조치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긴급 수술을 해야 했지요.

만약에 우리가 현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니 조금만 더 늦게 갔더라면 아마도 우리 재훈이는 그곳 의무실에서,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죽어가야 했을 것 아니에요. 세상에 이게 어디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할 짓인가요? 남의 귀한 자식들을 데려다가 이렇게 개 취급을 하니까 돈 있는 놈들이 군대에 안 보내려고 온갖 술수를 다 부리는 것 아니겠어요. 이제는 저도 욕밖에 안 나와요. 더러운 놈의 세상이라고 밖에 안 보이니까요.

핼쑥하지만 바깥 바람을 쐴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 회복기에 바깥으로 나선본 모습 핼쑥하지만 바깥 바람을 쐴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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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로 간신히 생명을 구했지만 뇌종양으로 쓰러진 아들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어서, 소생 시켜 보려고 시골로 가서 회복을 기다리며 온갖 노력을 해보았으나, 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완전히 식물인간 상태가 됐고, 다시 연세의료원으로 돌아왔죠. 결국 아이는생명을 유지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하지만 군에서는 '입대 12개월 미만인 상태에서 발병한 이런 질환은 입대한 후 발생한 질병이 아니라서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규정을 앞세우며 1개월 입원비를 지급하겠다고 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책임지지 않고 의병제대로 처리를 하고 말았어요. 

멀쩡한 아들을 군대 보냈는데, 불과 10개월 만에 죽음 직전에야 그 상황을 알게 되는 것도 모자라, 이를 나 몰라라 하는 군이 원망스러워요. 어디 호소할 곳조차 없어서 억울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지만, 어떻게든 아들의 명예를 찾아주고 싶어요.

세브란스에서 주치의는 분명히 '이렇게 젊고 체력이 좋은 사람은 뇌종양이  급히 진행이 되어서 불과 몇 개월 만에 이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판정을 하였기 때문에 국가에서 책임이 없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정말 국방부 앞에서 1인 시위라도 하고 싶어요. 이 한 몸 죽도록 노력해서 내 아들의 명예는 찾아 주고 싶어요. 이제는 다시 살아올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라에서 책임이 없다는 말을 하지 말고 내 아들은 나라를 위해 군복무 하다가 죽어갔으니 국립묘지에라도 가게 해주고 싶어요.

한숨을 토해내다가 어느새 분노를 토해내는 어머니의 모습은 한없이 처량하기만 했다.   다음은 대대장에게 보낸 고 황재훈 어머니의 내용증명이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심정을 적습니다'

1. 재훈이는 부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통신학교 8주간 교육 중에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대전에서 서울 집으로 외박을 나왔습니다. 11월 17일 자대에 복귀하기 전까지도 건강한 모습으로 주말이면 가족들과 같이 지냈습니다. 자대에서 뇌종양이 최종으로 악화 될 때까지 구토 두통 간질 등 어느 정도 전조 증세가 있었다는 것은 의학적인 상식이 아닌가요?

어떻게 하여 최악의 상태에서 부모가 면회 가서 병원으로 후송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만들었는지, 또 치료 중 사망에 이르게 하였는지, 부대 내에서 대대장님의 조처에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재훈이가 전역하기 전 지난해 7월 달에 육본전공상심의에서 비전공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동안 부대장님은 당신의 부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지 이것 또한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부하가(사랑 따위는 바라지도 않습니다만) 군복무 중에 불치의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부모의 요청으로 병원으로 전원 되었으니 부대장은 모든 책임이 끝난다고 생각 하셨습니까? 여자인 저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직장 생활에서 동료나 부하 직원이 곤란을 당했을 때 전사적으로 도움을 주고 힘을 보태 주는 것이 상관의 도리가 아닌가요?  하물며, 죽음에 이른 부하에 대한 인지상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버텨 보려고 애를 썼지만 떠나버린 고 황재훈 하사
▲ 결국 떠나버린 재훈군 그렇게 버텨 보려고 애를 썼지만 떠나버린 고 황재훈 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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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난해 11월 달에 육본전공상 재심의에서도 비해당으로 나왔습니다.  앞으로 재심청구를 2011년 1월중에 한번 더 신청 할 것입니다. 더불어 이 어미는 재훈이의 억울하고도 국군에서 버림받은 불쌍한 초급 군인의 명예를 위해 사회적 이슈를 만들 것입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부대장님의 부대 앞에서, 또 국방부 앞에서 일인 시위도 할 것입니다. 집안의 장손이며, 제게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넋이라도 위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두려움도 없어야 그 아이의 부모 된 도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재훈이가 평소 문학하는 어미를 자랑스레 여기며 문학서적 발간에 도움을 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 해왔는데, 이제 저는 떠난 아들의 뜻을 생각하여 군부대에서 발병과 그 과정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실을 책으로 엮으려 합니다.

물론 이 책자에서는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을 실명으로 거론 할 것이며, 제 아들이 불치의 병으로 외롭고 힘든 투병을 할 때 국군과 또 부대장과 책임 있는 지휘관들이 전혀 돌보지 않아서 최악의 병세를 만든 사실을 가슴으로 온몸으로 원망하며 그들의 이름 또한 실명으로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대대장님, 어리고 불쌍한 한 군인이 자신의 꿈을 펼치기도 전에 한줌의 재가 되어 세상을 떠난 것이 얼마나 애절하고 슬픈 사연입니까? 군인이 되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거창한 속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직분에 만족하고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 하려는 청년 군인이었습니다. 그러한 청년을 국군은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작 치료비로 1백여만 원을 지급 받은 것이 전부 다입니다. 저는 다른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아들이 사랑했던 군인의 꿈이 불치의 병으로 군복무 중에 사라졌지만, 죽어서도 영원한 군인이 되고자 하는 것은 부모의 마음만이 아닌 아들 고 황재훈 하사의 꿈이기도 할 것입니다.  재훈이가 국립묘지에 마지막 쉼터가 되기 위해서는 육본전공상 재심의에서 공상자로 판정되어야 합니다.

재훈이와 같이 전우애를 나누었던 동료 선후배 상사는 물론이고 하늘과 같이 존경하고 신뢰했던 지휘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들이 군복무 중에 질병으로 인한 공상자가 되어
죽어서도 명예로운 군인들 영혼의 쉼터인 국립묘지에 영면 할 수 있도록 같이 노력 해 줄 것을 당부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저는 아들을 위한 투쟁을 멈추고 재훈이와 관계 했던 모든 사람들을 좋은 인연으로 남기고 그의 영혼만을 위해 살아 갈 것입니다.

2011년 1월 6일
고 황재훈 하사 엄마 권미향

다음 기사 '백령도에 다시 찾은 내 아들 해병들'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서울포스트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고 황재훈하사, #부사관학교, #대대장, #의무실, #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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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아동문학회 상임고문 한글학회 정회원 노년유니온 위원장, 국가브랜드위원회 문화멘토, ***한겨레<주주통신원>,국가인권위원회 노인인권지킴이,꼼꼼한 서울씨 어르신커뮤니티 초대 대표, 전자출판디지털문학 대표, 파워블로거<맨발로 뒷걸음질 쳐온 인생>,문화유산해설사, 서울시인재뱅크 등록강사등으로 활발한 사화 활동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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