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람은 아침부터 분주하다. 아이들 출근시키고 나서도 쉬질 않는다. 급한 일이 있다면 새벽 6시부터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였다. 아이들이 집을 나서니, 집은 조용해진다. 할 일이 없어졌으니, 쉴 법도 하다.
그런데 아니다. 부산스럽다. 빨래를 한다, 집안 청소를 한다며 정신이 없다. 쉬어가면서 해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부지런을 떨었다. 찜질방을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소를 하면서 한 손으로는 전화로 약속을 잡는다. 찜질방에 갈 약속을 하고는 부지런을 떨었다. 찜질방에 가서 먹을 것을 준비하는 등 요란스럽다. 그리고는 찜질방을 다녀오겠다는 말 한 마디 남겨두고 나가버린다.
텅 빈 공간.
집안에 나만 홀로 남았다. 고요가 내려앉은 공간에서 혼자 앉아 있으니, 기분이 묘해진다. 혼자라는 사실에 외로움을 만진다. 그런데 그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열정이 넘치던 시절에는 견디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밀려오는 고독감을 주체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니었다. 묘한 기분이 든다. 혼자라는 사실이 싫지 않다. 은근히 즐기고 싶다. 얼마만인가? 혼자 있는 시간이 쉽지 않다. 예상하지 못한 불청객들의 방해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혼자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지 않아서 주변을 살펴본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고 나니, 편안해진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바라본다. 커피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허공으로 올라가는 김에는 지난 날들이 어려 있었다. 꼬리를 잡고 이어지는 추억들이 그리움의 오솔길로 안내한다. 참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 그만큼 살아온 날들이 길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이야기의 끝이 보일 법도 한데, 아니다. 일부러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술술 따라 나오고 있었다. 잊고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딸려 나오고 있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이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마음을 아프게 하였던 이야기일수록 더욱 더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있었다.
며칠 뒷면 설날이다. 설날은 새날이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수많은 출발을 생각한다.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좋았던 일은 좋았던 대로 아름답다. 나빴던 일은 나빴던 대로 아름답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이 모두 나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조각들이 이어져서 내 삶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 이순을 바라보게 되니, 참 많은 추억들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운 얼굴들의 수도 참 많아졌다. 만나보고 싶은 얼굴들의 수도 많아졌다. 고요가 내려앉은 공간에 홀로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아름다운 추억을 꺼내보고 있노라니, 즐거워진다. 특히 마음을 아프게 하였던 추억이 더욱 더 간절해진다. 그 당시에는 그 것이 아픔의 원인이 되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팠기에 더욱 더 소중해진다. 극복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더욱 더 맑은 샘물이 되었다. 마음을 순하게 만들어주고 걸어온 지난 날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아름다운 추억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한 그것은 언제나 빛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윽한 커피 향이 감미롭다. 유한한 내 삶에서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는 것은 선물이다. 아름다운 선물이다. 섣달에 아름다운 추억 하나 꺼내보며 즐거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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