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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기행 첫날(10일) 밤10시 26분에 심양(선양) 북역을 출발하는 하얼빈행 기차를 타려고 플랫폼으로 나가니까 추위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에 얼음 가루가 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주는 만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양 북역에서 하얼빈행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는 승객들. 질서가 없기는 도로나 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양 북역에서 하얼빈행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는 승객들. 질서가 없기는 도로나 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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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25분쯤 되니까 기차가 역 구내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5호 차를 찾아가니까 승객이 내리기도 전에 사람들이 입구로 몰려들었다. 아귀다툼만 벌이지 않았지 시끄럽고 복잡하기는 작년 여름과 다를 게 없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더한 것 같았다.      

만주에서 몇 차례의 기차여행 경험이 여러모로 도움되었다. 승객이 모두 승차하고, 승무원이 확인해야 출발할 터이니까 앞으로 나아가 몸싸움을 벌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승차하는 광경도 여유를 갖고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야간열차에서의 컵라면은 별미

일행이 가져다준 컵라면. 기차에서 먹는 컵라면은 또 다른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행이 가져다준 컵라면. 기차에서 먹는 컵라면은 또 다른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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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 올라 17호 침대칸을 찾아가 번호를 확인하고 짐을 풀었다. 7박 8일을 함께 할 안전가이드와 인솔자, 박영희 시인이 좌석을 제대로 찾았는지 확인하고 갔다. 안마를 받은 효과가 나타나는지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한결 가벼웠다.

일행이 뜨거운 물이 담긴 컵라면을 하나 주면서 먹어보라고 했다. 그렇잖아도 허기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고마웠다. 기차에서 먹는 컵라면은 그야말로 별미였다. 먹는 재미에 행복감까지 느꼈다.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컵라면을 먹고 누우니까 허전함이 밀려왔다. 처음부터 혼자였으면 낭만이라도 있지, 일행(19명)이 여러 칸에 흩어져 있으니까 기차여행의 참맛을 빼앗긴 것처럼 허탈했다. 모두 한 칸에 승차했으면 수학여행 가는 기분이 들 터인데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성에꽃 활짝 핀 하얼빈행 열차

활엽수가 빽빽한 숲을 떠오르게 하는 성에꽃.
 활엽수가 빽빽한 숲을 떠오르게 하는 성에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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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에 피어난 눈꽃을 떠오르게 하는 성에꽃
 나뭇가지에 피어난 눈꽃을 떠오르게 하는 성에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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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맡 창에 낀 성에가 깊은 산골의 빽빽한 나무숲을 떠오르게 했다. 나뭇가지의 눈꽃과 제철을 만나 활짝 핀 진달래도 떠올랐다. 겨울엔 버스, 사무실, 안방 등 어디서나 보는 성에꽃. 그러나 기차, 그것도 만주의 동서를 횡단하는 야간열차에서 보는 성에꽃은 별다르게 느껴졌다. 

머리맡 성에만 감상하는 것보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침대에서 내려왔다. 통로 창마다 만개한 성에꽃은 심심하던 참에 좋은 구경거리요 친구가 되어주었다. 기차 바퀴의 경쾌한 마찰음은 분위기를 더욱 잡아주었다.  

하얼빈행 열차는 설경만 고집하는 어느 화가의 개인 전시실을 연상케 했다. 창마다 온갖 모양의 성에꽃이 피었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명작들을 관람료 없이 감상한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빙등제'의 예고편이자, 겨울 만주기행 옵션이라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성에가 어찌나 두꺼운지 얼음을 조각해놓은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아침에 일어나면 안방 유리창에 낀 성에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그 유리창 앞에서 동생이랑 숨은그림찾기 하던 추억이 시나브로 떠올랐다. 

심양에서 하얼빈은 동북 방향이어서 기차가 달릴수록 기온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데, 철로도 꽁꽁 얼어붙은 모양이었다. 여름엔 힘차고 활기가 넘쳤던 기차 바퀴의 마찰음이 연하고 부드럽게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장거리 열차에서 만난 총각 승무원

성에꽃 감상에 푹 빠져 있는데 젊은 중국인 승무원이 콧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갔다. 여드름 하며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승무원은 고향의 개구쟁이 누군가를 떠오르게 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의 움직임을 통해 정차할 역이 가까워지는 걸 알 수 있었다.

광활한 대륙에서 다양한 풍물을 한꺼번에 싣고 다니는 교통수단은 누가 뭐래도 기차일 것이다. 기차는 다수 사람과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이 가장 잘 갖추어져 있고, 어렵잖게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지는 장소여서다.  

승무원과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중국어를 못하니까 답답했다. '모르는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서로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자리를 마련하라'는 말이 떠올랐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승무원과도 뭔가를 함께 먹으면서 얼굴을 마주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와 간직해 두었던 문어포와 땅콩 봉지를 가지고 가서 승무원에게 덜어주었더니 고개를 꾸벅이며 고맙다는 표시를 했다. 그리고는 땅콩을 몇 알 집어먹었다. 문어포가 입맛에 맞는지 입이 귀밑까지 벌어지면서 오른손 엄지를 꼽아보였다.  

손짓 발짓으로 승무원이 서른 살 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중국어를 못하니까 언어장애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 손목에 찬 시계를 자세히 보더니 웃으며 뭐라고 했다. 가짜 아니냐는 모양이었다. '오리지널(original)'이라고 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승무원은 영어를 못했다. '차이나', '코리아'만 알았지, '하우 올드 아유? (How old are You?)' 같은 쉬운 문장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이 꺼져 있어 옥편을 볼 수 없어서 더욱 답답했다. 답답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기차가 정차한 역 플랫폼이 환하게 불이 켜져 있어 어딘가 궁금해서 내다봤더니 장춘(長春)이었다. 만주에서 가장 너른 들녘은 장춘에서 하얼빈 사이에서 볼 수 있다고 들었는데 밖이 칠흑같이 어두워서 아쉬웠다.

심양-하얼빈 열차 6인실 침대(잉워) 2층 모습.
 심양-하얼빈 열차 6인실 침대(잉워) 2층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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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새벽 2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얼빈역 도착 예정 시각은 새벽 5시 28분인데, 그 시간까지 앉아 있으려다 조금이라도 잠을 자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침대로 돌아왔다. 난방이 꺼졌는지 추웠고, 한참을 뒤척이다 잠들었다.

나를 전봇대 보듯 하던 중국인 아주머니

수런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 4시 30분이었다. 한 시간 남짓 잠든 모양이었다. 몸이 으스스하고 찬기가 느껴졌다. 세면도구를 들고 세면장으로 갔더니 내복차림의 중국인 아주머니 셋이 씻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남자나 여자나 기차에서 내복차림을 일상복쯤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여름에는 팬티만 걸친 남자가 통로를 활보하고 다니더니 겨울에는 세면대에서 내복차림의 아주머니들이 외간 남자를 전봇대 쳐다보듯 했다. 바로보기가 뭐해서 밖으로 나왔다.

한참을 기다리다 아주머니들이 나오기에 들어가 양치질을 하고 입을 헹궈 내려니까 뜨거운 물은커녕 찬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주머니들도 물이 안 나오니까 적당히 씻고 나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왜 물이 안 나오는지 불평 한마디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마침 총각 승무원이 지나갔다. 반가움에 붙잡고 사정을 얘기했더니 수도꼭지를 돌려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손바닥을 들어 좌우로 흔들면서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총각 승무원과 기념촬영

중국인 총각 승무원과 기념사진. 사진이 또다른 주인(승무원)에게 전해지기를 빌어봅니다.
 중국인 총각 승무원과 기념사진. 사진이 또다른 주인(승무원)에게 전해지기를 빌어봅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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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이 가까워지니까 불이 들어왔고, 검표원이 보관하고 있던 차표와 카드를 교환해주고 다녔다. 내리기 전에 사진으로 총각 승무원과의 추억을 남겨놓고 싶었다. 해서 일행에게 카메라를 건네주며 승무원에게 손짓했더니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으며 다가와 뒤편에 앉았다.

사진 파일을 보내주겠으니 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해야겠는데 마음을 전할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차는 하얼빈역에 도착하는데 속만 타다가 그냥 헤어졌다. 지나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안타깝고 아쉬웠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만주기행, #성에꽃, #승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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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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