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죽음이지만, 결국 인간이 전쟁을 벌이고 치열하게 싸우는 것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겁니다. 총칼이 날아오는 순간에도 분명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있고, 살려는 몸부림이 진실인 거지, 목숨 내놓고 더 치열하게 싸우는 게 진실? 그건 영화가 만든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할리우드 영웅주의가 관객을 얼마나 바보로 만드나 싶죠."
이준익(52) 감독이 <황산벌>에 이어 8년 만에 연작 <평양성>을 내놓았다. 관객 반응은? 출발이 순조롭다. 개봉 3일 만에 22만 명이 넘는 관객이 그의 새 영화를 찾았다. '웃기는 전쟁영화'의 고수가 새 작품을 내놨는데, 관객이 이를 그냥 지나칠 리 없을 터.
코미디 전쟁영화의 새 장을 연 이 감독은 전작 <황산벌>에서처럼 욕으로 승부를 보려들지 않았다. 또한 <평양성>은 전쟁영화 특유의 '전투 신'보다는 '휴먼스토리'에 주력한 느낌이다. 피가 튀는 전쟁 중에도 사람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사력을 다해 어떻게든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며, 영웅주의는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평양성>은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리얼리티와 난센스의 이종격투기'처럼 보인다. 전쟁과 웃음이라는 이질적 코드를 이종교배 하듯 매끄럽게 엮어냈다. 1344년 전 벌어진 나당연합군과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를 통해 그는 세대갈등, 이념갈등, 계층갈등을 그렸다.
요즘 남북관계를 연상케 하는 신라와 고구려의 갈등도 엿보였다. 노회한 신라의 장수 김유신(정진영 분) 장군이 목젖을 세워 갈파하는 게 있으니, 그 주장은 "고구려 민심을 잃으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쌀과 고기를 평양성 안으로 마구 던져준다. 그것도 산 채로.
지난 25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 감독은 "영화감독이야말로 이 사회에 짱돌을 던져야 하는 사람들"이라며 "<오마이뉴스> 팬이 아니면 다 사이비 아니냐"고 농을 건넸다.
그러나 그의 영화 <평양성> 그리고 그와 나눈 대화의 기록들에 따르면, 그는 정말 우리 시대에 진정한 의미의 짱돌을 던지고 있었다.
지난해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끊임없이 우리 사회를 불안케 하는 전쟁위협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 그 어떤 전쟁 중에도 개인의 가치는 소중히 다뤄져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 그 어떤 이슈든 밀실에서 쑥덕공론 할 게 아니라 광장에서 논의돼야 한다는 것, 민초의 주장과 입장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 등을 강조했다.
봄이 되면 오토바이를 타고 꼭 <지리산 행복학교>에 가보겠노라고 결심한 이 감독은 전작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와 달리 <평양성>에서만큼은 꼭 희망을 노래하고 싶었다고 했다. 다음은 이 감독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민초의 시선' 담은 7편의 영화들... 동어반복 감독 이준익?- <황산벌>에 이은 연작 <평양성>을 8년 만에 내놓으셨어요. 내가 만든 영화 중에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이라고 하셨는데요. 어떤 점이 그토록 만족스러우십니까."이게 코미디 전쟁영화인데, 정치적으로 평가받게 돼서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전쟁영화였지만 영웅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았고, <황산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백제출신 신라병사, 민초 거시기(이문식 분)와 문디(이광수 분)를 통해 민초들의 이야기를 자유스럽게 풀어냈다는 점도 만족스럽고. 또, 현재의 관객이기도 한 우리 민초들의 목소리를 굉장히 존중하는 권력자나 지배자의 너그러움을 담았다는 점도 만족합니다. 후훗."
- 말씀대로 이 영화는 전쟁영화지만 딱히 이 사람 할 만한 영웅이 없던데요. 이 영화의 진정한 영웅은 누구로 설정하신 건가요? 이 영화를 만든 이유는 거시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도 하셨지요."제가 <황산벌>부터 <평양성>까지 7편을 만들었는데 전체에 일관된 주제가 있습니다. 민초의 시선이지요. <왕의 남자>도 왕이 광대를 부러워하는 시선이 있었고, <라디오스타>는 한물간 아웃사이더들을 위한 찬가입니다. <즐거운 인생>은 명예퇴직 당해 소외된 가장들이 부르는 인생의 노래였고, <님은 먼 곳에>도 전쟁터의 군인들이 주인공이 아니었고 위문단이 주인공이었지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도 임진왜란이 발발한 가운데 모두 도망쳤으나 궁궐을 지킨 서자들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평양성> 또한 거시기와 문디로 대변되는 민초들의 이야기. 아우, 이쯤 되면, 제가 '동어반복' 감독인 거지요? 하하하."
- 이 영화를 보면서 이건 전쟁을 빙자한 휴먼드라마다, 이런 생각이 들던데요."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결국 전쟁은 살려고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전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죽음이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이 전쟁을 벌이고 치열하게 싸우는 것은 살려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거지요. 총칼이 날아오는 순간에도 분명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있고, 살려는 몸부림이 진실인 거지, 더 치열하게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게 진실? 그건 영화가 만든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할리우드 영웅주의가 얼마나 관객을 바보로 만드나 싶죠."
- 영화 속 거시기는 전쟁 중에도 계속 살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러나 문디는 전쟁에 나왔으면 '한 건' 해서 출세를 해야 한다, 장렬하게 싸우다 죽는 것이 낫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양쪽이 대비되어 앙숙관계가 되는데요. 결국 거시기가 인간적이다, 이렇게 보시는 거죠?"사람은 변합니다. 변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지요. 문디도 변합니다. 문디는 이 영화 속에서 전쟁을 통해 출세하려고 그 누구보다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참가하지만 결국 김유신(정진영 분)의 한 마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고인기라~'를 듣고 표정이 싹 바뀝니다. 저는 그 문디의 얼굴에서 희망을 봅니다."
- 영화 속에서 나당연합군이 고구려와 싸울 때 쌀과 고기를 현물로 던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적 상상력을 극대화 하셨는데, 내심 남북관계를 꼬집고 싶으셨던 건가요? 굶주린 북녘에 '대북 퍼주기' 하라는 메시지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뭘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설명할 뿐이지요. 역사 속 고구려는 동경과 연민의 대상이죠. 어쨌든 삼국통일은 신라가 이뤘고, 그때나 지금이나 한반도 지정학적 위치는 변경된 게 없습니다. 다만, 현재 고구려 말을 쓰는 사람들은 북한에만 있고, 남한에는 없지요. <평양성> 전투가 벌어졌던 668년. 1344년 전이나, 지금이나 반복되고 있는 우리 역사를 증명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오늘의 정치적 상황들은 오늘 생긴 게 아니라 1344년 전에도 있었고, 그것이 계속 반복돼왔다는 것을 말이지요."
"농촌총각 장가 못가... 남남북녀 결혼 안 되나?"- 갑순이와 거시기의 결합도 남남북녀를 연상케 하던데요. "맞아요. 거시기는 벌교 사람이고 갑순이는 함경도 사람입니다. 남남북녀의 결합이지요. 이 영화가 주는 핵심은 인본주의적 태도입니다.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모두 인본주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냐는 거지요. 전쟁 속에서도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하는 건 인본주의고, 모든 건 인본사상 위에 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 인간은 혼자 못 사니까요."
- 일각에서는 작위적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그냥 영화적 의도예요. 저는 거시기에 연민이 많이 가는데요. 음... 아, 농촌총각 장가 못가 동남아까지 가는 판에 남남북녀 결혼 좀 하면 안 되나요? 게다가 거시기는 신라군이었지만 고구려 포로가 돼 신라군이 후퇴할 정도로 공을 세웁니다. 어차피 그 판국에 고향 가면 맞아죽을 텐데, 장가라도 가야지요?
거기에도 핵심이 있는데요. 장군님은 거짓말 아이 한다, 들이대라우! 하거든요. 고구려 장군 남건이 거시기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고. 갑순이와 혼인하고 싶다고 하는데 실은 그것은 남건도 갑순이도 원하지 않는 것이었거든요. 그러나 장수가 뱉은 말은 책임진다. 그런 걸 보여준 거지요."
- 민주정부 10년간 우리 국민에게 평화는 공기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명박정부에서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등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아, 이러다 정말 전쟁이 날 수도 있겠구나, 대중이 겁먹었지요. 이 영화로 반전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건가요?"정중하게 현상을 설명한 것뿐입니다. 전작 <황산벌>과 다르게 <평양성>에 들어간 주제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지배권력자의 너그러움입니다. 문디가 특공대를 조직해 전투에 나가기 전에 이런 말을 합니다. 전쟁을 하도 수시로 하다 보니께 우리 누이가 아홉인데 모두 과부다, 다 먹여 살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논 열 마지기로는 택도 없대이~, 스무 마지기는 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때 김유신이 마 서른 마지기! 하지요. 여기에 힘을 입은 특공대는 더 열심히 싸우고 성문을 지켜 당나라를 전멸시킵니다.
다른 한편, 거시기가 전쟁 막판 또 다시 당나라와 신라가 전쟁을 치를 기세로 나오자 '안돼!'하고 '전쟁하려면 니들끼리 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때 문무왕은 거시기의 주장을 받아 안지요. 그 어떤 명분을 내세운 전쟁이라 해도 이처럼 그 전쟁에 참여한 개인의 주장을 받아들여줘야 한다는 거죠. '고마하고 퍼뜩 보내거라!' 개인의 가치를 존중해주는 것. 거시기와 앙숙이었던 문디가 거시기와 갑순이가 나갈 길을 열어줄 때 김유신이 '잘 가거래이~' 하는 것.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개인의 존엄성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이 이 영화의 멋스러움이라고 생각해요. 지배자의 너그러움…."
- <웰컴투 동막골>에서는 팝콘이 하늘로 튀어 오르죠. <평양성>에선 쌀 튀밥이 튀어 오릅니다. 벌떼공격 같은 친환경 녹색무기도 등장하고, 노래방을 연상케 하는 삽입곡도 있지요. 전쟁이라는 리얼리티 속에 난센스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감독의 의도는 무엇인가요?"이 영화는 프랑스 국민만화 <아스테릭스(1961년 고시니(글)·우데르조(그림)작-미국에 대항하는 프랑스인의 상징이자 자존심)> 같은 면이 있어요. 권력을 비판하면서 나타나는 풍자와 해학, 익살이 최고라고,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가 말했다는…. (웃음)
여하간, 전쟁과 웃음은 이질적 정서가 있지요. 이종교배 같은 걸 매끄럽게 만드는 것은 감독으로서 도전해야 할 새로운 드라마 방식이었고, 그걸 이뤄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리얼리티와 난센스의 이종격투기라고 할까요?"
- 감독님을 '사극전문 영화감독'이라 칭하는 언론도 있습니다. 사극을 잘 만드는 비결이 따로 있나요?"저는 어려서 서양의 사극을 많이 보고 자랐습니다. 서부영화는 미국의 사극이었죠. <벤허>니 <십계>니 이런 것들은 모두 할리우드 역사영화였지요. 그걸 보고 자란 서양의 감독들은 이제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를 만듭니다. 이들은 역사를 갖고 리얼리티를 넘어 아예 판타지로 갔습니다. 한국영화도 언젠가는 <해리포터> 같은 작품을 만들 것이고, 거기까지 가려면 끊임없이 우리 역사를 갖고 계단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계단의 시도로 <황산벌>이 한국영화 표현양식에 기여한 부분이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왕의 남자> 역시 상업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소재와 이야기 방식을 놓고 커다란 성공을 한 건대, 그만큼 우리는 잠재력을 충분히 갖고 있는 나라라는 거죠.
날마다 인문학이 부재하고, 문화콘텐츠 생산만이 국가경쟁력이라고 외치는데, 그 문화콘텐츠라는 게 어디서 나오느냐, 핵심은 역사라고 생각해요. 역사 없이 철학 없고, 철학 없이 문학도 없다. 5000년 역사를 가진 우리 교과서는 이리도 얄팍할진대, 불과 200년 역사를 가진 미국 역사책은 엄청 두껍다는 사실.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역사를 팔아먹고 사는 것인가. 미래 콘텐츠의 보물창고는 역사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온몸으로 도전하는 것이지요."
"영화라도 역사교육 해야지... 보물창고를 여는 무모한 도전 계속할 것"- 우리나라는 역사교육에 소홀하잖아요. 이명박정부 초기엔 역사도 영어로 가르치겠다고 해서 논란이 일었지요.
"영화라도 역사교육을 해야지. 예전에 소설가들이 교과서가 세상을 못 바꾼다고 소설로 세상을 바꾸겠다며 소설을 쓰지 않았습니까. 소설이 대중적 힘을 잃고 이제 그 짐을 영화가 떠맡았다고 생각해요. 할리우드 상업영화로 획일화, 장르영화로 획일화 되는 현재 어찌됐든 중견감독으로서 이준익의 소명이 있다면 후배감독들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도록 보물창고를 여는 무모한 도전을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평양성>이 미래 사극을 여는 새로운 장이 될 것이라는 것도 이 맥락의 해석입니까."역사 속에 기록된 사실을 놓고, 벌떼와 동물을 이용한 신무기가 나돌고, 쌀 튀밥이 날라 다닙니다. 이 난센스가 정교한 인물 간 심리와 잘 섞여 '나까 코미디'(싸구려 코미디)로 보이지는 않지요. 뭐 저런 게 다 있어? 그런 건 아니지요? 후훗. 드라마 특유의 핵심은 심리적 정교함에서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서 이 황당한 설정이 개연성 있게 드라마타이즈 된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 전쟁도 저렇게 하면 재밌는 놀이가 되겠다고 싶기도 했지요."저는 놀이에 대한 생산성을 강조하는 감독입니다. <왕의 남자>에서도 광대들의 놀이판이 벌어지고, <황산벌>에서도 전쟁 중에 다양한 우리네 놀이들이 등장합니다. 장기, 응원전 등등. 이 모두는 광장드라마라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회는 골방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광장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20세기 광장에서 세상을 배웠습니다. <평양성>에서도 광장이 주 무대이지요. 연개소문 큰 아들 남산(윤제문 분) 둘째 아들 남건(류승룡 분), 갑순이, 거시기 등 수많은 병사들 모두 광장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소통하고 운명이 결정됩니다. 적어도 뒤에서 칼질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게 올바른 세상 같아요. 광장의 놀이를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자 그런 말을 하고 싶었어요."
-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온라인 광장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굉장히 좋지요. 오프라인의 광장이 사라진 시대에 온라인 광장에서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채운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극장도 마찬가지죠. 껌껌한 공간 안에서 수백 명이 함께 앉아 영화라는 광장과 소통하는 것이지요. 영화에 열광하는 젊은이의 에너지는 광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 영화 중에 문디와 김유신 장군이 특공대를 꾸리면서 노사협상을 벌입니다. 논 20마지기를 원하는 문디에게 김유신 장군이 30마지기!를 부릅니다. 아주 쿨합니다. 현실에선 이런 '사장님'들이 거의 없잖아요. (웃음) "세상의 딜레마죠. 거시기가 고구려 병사로부터 칼로 위협을 받으면서 스피커 앞에 서서 김유신 장군을 비난합니다. 전쟁은 결국 권력자들에게만 유리한 것이지 민초들에게 좋을 건 없다고 갈파하지요. 이때 김유신이 다 인정합니다. 다 맞는 말 아이가? 세상은 개인의 목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정한 집단이 집단의 힘으로 개인에게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목소리를 인정하면 희망이 보입니다. 묵살하고 멸시하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됩니다. 그래서 나는 집단이 개인의 목소리를 경청할 때 희망이 생긴다고 봅니다. 결국 이 영화에서도 거시기가 희망을 만들었던 거지요."
-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성>을 봤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특별한 까닭이 있나요. "하하하. 제목이 <평양성>이니까 평양에서도 개봉했으면 좋겠다는 뜻? 우리는 너무 북한을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어요. 남한에서 틀면 북한에서도 틀어야지. <왕의 남자>도 김정일 위원장이 봤다는 설이 있는데, 영화광께서 <쉬리>안 봤겠고 <실미도>는 안 봤을까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김정일 위원장만 보지 마시고, 인민들도 좀 보게 해주라는 것. 그랬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하하하."
"현실을 인정하면 희망은 없어... 거시기 한 그루 심어보실라우?"- 평소 여성주의에 관심이 많으신 것으로 알려진 감독께서 영화 속에서는 고구려 장군의 명령으로 갑순이에게 거시기와 혼인하라고 합니다. 왜 이런 설정을 하셨나요?"나이가 들어 약간 보수화 되면서 변절자가 된 건가? 하하하. 이 영화는 여성을 가장 존중한 영화입니다. 여성을 비하했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여하튼, 거시기가 끊임없이 갑순이를 보호합니다. 갑순이가 행여 다칠까봐 온몸으로 막아냅니다. 억지결혼을 한 갑순이는 그렇게까지 보호해주는 남자를 보면서 점점 마음이 바뀌지요.
당나라와 일촉즉발의 상황이 됐을 때, 거시기가 갑순이에게 말합니다. '전쟁하지 말자, 당나라 몇 놈 죽여 봐야 뭘 하느냐, 나 당신을 엄청 거시기 한다'면서 무릎 꿇고 절창을 합니다. 죽을 때까지 잘하겠다고 말이지요. 갑순이가 행복한 표정으로 거시기 손을 잡고 나갑니다. 결국 갑순이는 뱃속에 손자를 갖고 시어머니와 상봉하는 장면이 마지막에 나오는데, 그렇게 소중한 가족의 가치를 전쟁터에서 찾아낸 것이지요."
- <평양성>은 <황산벌> <님은 먼 곳에>에 이어 세 번째 전쟁영화입니다. 관객은 전쟁영화를 통해 정치비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어떤 메시지를 던진 건가요?"거시기를 전쟁터에서 내보내주는 것이 가장 강렬한 메시지입니다. 1300여 년 전에 벌어진 고대 전쟁사에 빗대 개인의 가치가 소중히 다뤄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습니다. 집단에 휩쓸려서 개인의 가치가 말살되거나 획일화 되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것. 독일의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가 나는 더 이상 인간의 이성을 믿지 않겠다, 이성을 발전시켰더니 고작 1차, 2차 세계전쟁이나 일으키더라, 이성의 끝은 전쟁이다 이러면서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립니다. 인간은 집단을 만들고 집단과 집단이 충돌하면서 이상을 꿈꾸기 마련인데, 이런 현실을 그냥 인정해버리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요. 오늘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처럼, 오늘날 우리는 거시기를 한번 심어보자는 거지요. 희망을 심으면 희망이 피어나지 않겠습니까. 허허."
- 이 영화 망하면 미술 같은 것을 하면서 저예산 영화에 눈길을 돌리겠다고 하셨는데, 정말인가요?"뱉었으니까. 당연히."
- 천만감독이지만 흥행에 굉장히 큰 부담을 느낀다고 살짝 토로하셨습니다. 강우석 감독 작품 <글러브>가 상영 중인데 스코어가 좋습니다."<왕의 남자>도 상업적으로 되는 영화라고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는데 상업적으로 성공했습니다. 그 희망을 갖고 또 멀리 간 거죠. 물고기가 많은 곳에 그물을 던져야 하는데 더 큰 물고기를 잡겠다고 빈 바다에 그물을 던질 수 있는 거지요. 제가 뭐 40대 감독도 아니고 50대 감독인데 영화 관객의 파이를 넓히기 위해서라면 더 넓은 바다에 더 큰 그물을 던져야 하는 것은 어쩌면 이준익의 운명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무슨 말이냐면, 한국영화 관객은 10~20대가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그들을 위한 장르적 상업영화를 찍어낼수록 10년 전 그 장르적 상업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 앞에 줄을 섰던 관객들은 이제 영화시장 밖으로 밀려난다는 것이지요.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칠순 넘어 작품을 만들곤 했는데, 나도 한때 극장 앞에 줄을 섰던 관객들이 세월이 흘러도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 그들에게 선물을 주어야죠. 나 같은 감독이 그런 일을 해야지 누가 하겠어? 하하하.
10대엔 영화시장 안에 있었지만 나이 들어 영화시장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좋아할법한 영화를 찍어왔고, 멀어져가는 관객에게 그물을 던지는 영화를 찍어왔다고 생각해요. 이번 영화도 좀 위험하지만 당연히 도전해야 할 것을 온몸으로 시도한 것이라고 생각해주시길."
오토바이 타며 그림 그리는 감독님
- 한학자인 할아버지와 한 방을 쓰면서 붓으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화가의 꿈을 꾸셨던 걸로 알려졌습니다.
"우리 아이가 예전에 여름방학 겨울방학 때 영화를 보면 매번 할리우드 영화예요. <구니스> <나 홀로 집에> 등등. 상당히 불쾌했어요.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우리나라 이야기를 주제로 또 우리나라 주인공이 출연하는 영화를 만들고 보여주는 것이 마치 아버지의 소명 같이 여겨졌어요. 1993년 <키드캅>을 찍었죠.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데뷔작이 됐을 뿐이고.
그 뒤로 10년간 제작과 수입, 배급과 마케팅에 종사해오다 2003년 <황산벌>로 부활한 것입니다. 어려서 내가 봤던 만화영화가 나는 전부 우리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죄다 미국, 일본 것이더라고. 그때 배신감이 참 컸습니다. 언젠가는 꼭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애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우리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생각을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 조만간 어린이영화도?"그럼요. 왜 우리 어린이들에게 영화적 자의식을 미국영화로 심어줘야 합니까. 이건 어른들이 반성할 일이지요."
- 요즘도 오토바이를 타면서 그림도 그리시나요?"그럼요. 그런데 겨울엔 오토바이를 못 타요. 올 봄엔 꼭 오토바이를 타고 지리산 행복학교에 갈 것입니다. <지리산 행복학교> 책이 참 좋더라구요."
- 요즘 카메오 출연이 잦아지면서 영화감독도 모자라 영화배우까지 넘보는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이 있습니다. 상업영화 은퇴한다더니, 배우로 데뷔하는 거 아니냐면서요."배우로 데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단, 단편영화에서만! 상업영화는 아직 돈 받고 출연할 실력이 못 돼요. 하하하. 그런데 이런 건 있습니다. 영화감독을 오래 하다 보니 자꾸 영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배우가 되면 그 영화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게 되니까 그게 참 좋더라구요. 사르트르가 죽어서 소설가로 남고 싶다고 했는데, 결국 역사는 그를 철학자로 기록했지요. 실패한 인생인 거지. 나는 어떻게 기록될까. 하하하."
- 한국영화가 상업주의로 획일화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도 하셨는데요. 요즘 한국영화 어떻게 평가하세요?"소모적인 피로감이 누적돼 있는 상태라고 생각해요. 그건 투자자나 제작자나 감독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생산적인 피로감은 더 용기를 내게 하는데 소모적인 피로감은 자꾸 포기를 부릅니다. 요즘 평론은 사라지고 평가만 남았다고들 하는데, 뭐든지 흥행스코어로만 따지는 경향이 있긴 합니다. 이건 마치 영화를 시간이 지나면 유행이 지나가버리는 패션으로 소비하는 건데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문화는 생산적인 피로감이 쌓여야 되는 것이지, 소모의 피로감이 쌓이면 안 되는 것이거든요. 한국영화가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확일화되거나, 장르화되면 다양한 시도의 출구가 좁아지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 전작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너무 비관적이어서 <평양성>으로는 희망을 노래하고 싶었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희망을 던지고 싶으셨나요?"자신의 삶에서는 누구나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이는 누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지 헷갈릴 정도로 수많은 주인공들이 활약해 복잡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감독으로서 이 영화에 너무 만족합니다. 많은 관객들이 <평양성>을 본다면 각자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인공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주인공을 이해한다면 다른 주인공도 이해할 수 있도록 영화를 찍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주인공인지 잘 모르지요. 그 말은 곧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