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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11일 새벽 5시 25분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얼음과 눈'의 도시답게 무척 추웠고, 눈가루가 뿌리고 있었다. 새벽이어서 찬기가 더욱 날카롭게 느껴졌다. 두꺼운 머플러로 목을 감아서 입을 막고 조금 걸으니까, 입이 닿는 부분에 팥빙수 얼음 같은 것이 생겼다. 대단한 추위였다. 

기차여행을 흩어져서 했던 일행은 한곳에 모여 이동했다. 박영희 시인을 따라 안중근 의사(1879-1910)의 혼이 서린 현장부터 찾았다. 안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역 플랫폼이었다.

박영희 시인이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장소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박영희 시인이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장소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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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시인은 안 의사의 저격 지점과 이토가 러시아 군대 사열을 받으려고 걸어오다 쓰러진 장소를 알려주었다. 안 의사가 저격한 지점에는 삼각형, 이토가 쓰러진 지점에는 사각형의 대리석으로 표시해놓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101년 전으로 돌아가 박 시인의 설명을 들었다.

"도마 안중근은 1909년 3월, 동지들과 비밀결사대(단지회:斷指會)를 조직합니다. 이토를 암살하기 위해서였지요. '앞으로 3년 안에 이등박문을 암살하지 못하면 대한제국 국민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다짐할 만큼 도마의 생각과 계획은 오직 하나 이토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해 9월, 이토가 북만주 시찰을 명목으로 소련의 코코프체프와 회견하러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도마는 권한촌(훈춘과 방천 사이에 있는 마을)을 떠나 연해주에 도착, 크라스키노에서 단지동맹을 가진 뒤 블라디보스토크 발 하얼빈행 열차에 몸을 싣습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방아쇠를 당기고 '코레아우라!'를 외쳤던 역사의 현장에서 모두는 뜨거움을 느꼈다. 매서운 추위에도 품에서 메모장을 꺼내 꼼꼼히 메모하는 일행(학생)을 보니까 마음이 숙연해졌다. 박 시인의 설명이 끝나고 모두는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는 묵념을 올렸다.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한국 통감(1905년)으로 한밤중에 칼을 뽑아들고 고종황제를 위협하고 1907년에는 7개조의 조약(정미조약)을 체결시켜 황제를 폐위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의병이 일어나고 10만이 넘는 한국인이 잔학무도하게 학살되었으니 마땅히 민족의 원흉이다.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곧바로 러시아 공안들에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해 3월 26일 처형되었는데 오늘까지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어 우리를 더욱 분노케 한다.

박 시인은 "도마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1909년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해서 11월 1일까지 열하루 동안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러 하얼빈에 왔습니다"라며 "'송화강'에서 열리는 '얼음축제'(빙등제) 관람은 서비스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얼빈역 거사 3일 전 사진관에서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안중근 의사, 우덕순 선생, 유동하 선생입니다.
 하얼빈역 거사 3일 전 사진관에서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안중근 의사, 우덕순 선생, 유동하 선생입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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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많은 사진 자료 가운데, 이토 저격 3일 전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공원 근처 사진관에서 찍은 마지막 기념사진은 볼수록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안 의사의 변함없는 충정과 기개, 장부다운 담력과 여유 등을 발견할 수 있어서다. 

남북한에서 높이 평가받는 안중근 정신이 제대로 이어지려면 기념이나 추모로 끝낼 게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년 불멸의 생애를 가슴에 담는 일도 중요하지만, 한 번이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게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안중근 의사와 인연이 깊은 하얼빈은 작년 8월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었다. 그러나 안 의사의 글 '청초당'이 새겨진 비가 서 있는 조린공원(옛 하얼빈공원)이나, 이토를 처단한 하얼빈역에도 한글 안내판 하나 없었다. 

민족의 원흉을 처단한 역사의 현장에 한글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웠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지난 2005년 6월21일~24일까지 열린 제5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도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사업을 공동으로 하기로 합의했으니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김대중이 '진따이중'이라는 버스 기사

하얼빈역 구내에 쌓인 눈을 치우는 청소부 아저씨.
 하얼빈역 구내에 쌓인 눈을 치우는 청소부 아저씨.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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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플랫폼에서 대합실 밖으로 나오는데 새벽 6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 캄캄한 새벽인데도 청소부로 보이는 아저씨가 대나무 빗자루로 역 구내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었다. 

새우잠을 자면서 심야 열차를 일곱 시간 가까이 탔더니 그 깊이만큼 추위가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약간 피곤하고 속도 허전했다. 대합실을 지나 역 광장으로 나가니까,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아침을 먹기 위해 버스를 타고 사우나로 향했다.

작년 8월에 했던 사우나는 냉탕이 없어 불편했다. 그런데 이번에 들른 사우나는 수영할 수 있을 만큼 크기의 냉탕이 갖추어져 있고 시설도 좋았다. 5층에서 목욕하고 4층 식당으로 내려가 버스 기사와 안전가이드와 한 테이블에서 아침을 먹었다.

버스 기사가 ‘진따이중’이라며 활짝 웃고 있습니다.
 버스 기사가 ‘진따이중’이라며 활짝 웃고 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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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는 뷔페식이었는데 맛은 괜찮았다. 식사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었다. 조선족 3세 안전가이드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주었다. 한족이라는 버스 기사에게 한국 대통령 이명박을 아느냐니까 몰랐다. 그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느냐니까 역시 몰랐다. 

해서 북한 김정일 위원장, 2000년 남북정상회담, 강택민, 주룽지, 따거 등 떠오르는 인물들 이름을 열거하면서 '김대중'이라고 재차 강조하니까, 가이드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오른팔을 번쩍 들면서 "진따이중!"이라며 활짝 웃었다.

안중근과 김대중의 공통점은 '평화'

글을 작성하다 발견한 게 있다. 안중근(1879년생)과 전직 대통령 김대중(1924년생)의 공통점인데 다름 아닌 '평화'였다. 45년의 시차를 두고 태어난 두 사람 모두 '평화'를 주창하다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려순감옥으로 이첩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하고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내용은 한·중·일 세 나라의 공존과 단결, 동아시아의 평화를 뼈대로 삼고 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통해 자신이 사형당한 중국의 려순을 동양 평화의 근거지로 삼아 한·중·일의 '동양평화회의'를 창설하고, 세 나라의 공동은행과 공용화폐 유통 등을 주창한 것이다. (박영희의 <만주를 가다>에서)

김대중은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미·일·중·소 4대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체결하자는 '4대국 보장론'을 내놓는데, 목적은 평화통일이었다. 대통령 퇴임 후에는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을 지냈고, '평화의 사도'라는 별칭도 있다.

야당 시절 몸담았던 '평화민주당'(1988년),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1994년)에 '평화'가 들어가고, '평화를 위하여'(1989년),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1991) 등 저술한 책도 있다. 또한, 2000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반세기 가까이 긴장과 대립의 관계였던 남북이 화해의 시대를 10여년 유지하더니 군함이 침몰하고 연평도에 포탄이 떨어지는 등 불안이 지속되고 있는 현실에서 '평화'는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생각되기에 열거해보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하얼빈역, #안중근,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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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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