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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담에 꼬리가 길면 밟힌다 했다. 특유의 자상함과 세심함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샀던 어학원 내 미국인 튜터 할머니가 실은 거짓말로 돈을 빌려 상습적으로 갚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최악은 그가 학생들을 타깃으로 삼은 것인데, 내게 "진정한 크리스천은 삶으로서 증명된다"했던 이 철면피 여인의 접근방식은 이러했다.

"너의 필리핀 엄마가 되어줄께"

연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그는 늘 학원식당 옆 카페에서 담배를 태우며 오가는 이들과 대화를 즐겼다. 그날도 노인은 여러 학생들과 젊은 튜터들 사이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 중에 곁을 지나던 본인에게 함께 할 것을 청했다. 이미 몇 번인가 인사를 나눴고, 무엇보다 외국어로 대화할 기회가 생겨 반가웠다.  

처음 얼마간은 형식적인 대화였다. 그러나 수업종이 치고 주변이 잠잠해지자 그가 점차 개인적인 주제로 옮겨갔다. 그리곤 얘기 끝에 자신의 모친이 불과 석 달 전에 운명했음을 전했다. 당황하는 나와는 달리 담담한 표정으로 "괜찮다" 하는 그가 되레 안쓰러웠다. 가족이 그립던 참에 오래도록 벗삼았을 그 관계의 상실을 짐작하니 마음이 저렸다.

이를 계기로 할머니 튜터와 가까워졌고, 그 후 어디서건 만나면 부러 손을 잡고 포옹을 했다. 이미 노환이 뚜렷한 그가 혼자 견디는 고독에 병이라도 날까 걱정돼서였다. 한날은 괜스레 침울한 나를 노인이 먼저 안아주며 "울고 싶으면 울어라. 나도 그랬다. 내가 너의 필리핀 엄마가 되어줄께" 했다. 당시엔 이 또 무슨 눈물겨운 인연인가 싶었다.

 미국인 할머니 튜터의 '작업공간(?)'. 그는 늘 학원 내 카페에서 대화를 즐긴다.
미국인 할머니 튜터의 '작업공간(?)'. 그는 늘 학원 내 카페에서 대화를 즐긴다. ⓒ 이명주

파란눈 '필리핀 엄마'의 실체

그러나 노인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사건은 지난 1월7일 저녁. 그와 처음 외식을 약속한 날이었다. 시간에 맞춰 예의 카페 앞으로 갔더니 노인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눈물까지 훔쳤다. 지인이 세상을 등졌거나 버금가는 사고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잠시 후 알게 된 이유인 즉 학원으로부터 월급을 못 받았다는 것.

사실 이 이야기는 앞서 한 바 있다. '각기 다른 만남'이란 전제로 그의 신분을 숨긴 채였다. 그러니까 보다 못한 내가 돈을 빌려줬고, 돈을 받자마자 눈물가신 얼굴로 담배를 사 피던 '의뭉스런' 외국인이 바로 할머니 튜터였다. 그 날 노인은 시내 레스토랑에서 본인이 사는 음식을 곧잘 먹으며, "진정한 크리스천은 그 삶으로서 증명된다"는 명언을 남겼다.

노인의 거짓말이 들통난 건 그 뒤 삼 주쯤 지나서다. 당시 한국인 원장을 만난 건 과다한 연수생 수용이 원인인 듯한 학원 내 문제들을 항의키 위함이었다. 그 즈음에 해당 학원은 두 주 사이에 총 100여 명의 연수생을 입소시켰다. 덕분에 초등생을 포함한 어린 학생들이 부랴부랴 지은 신축건물에서 시멘트 냄새를 맡으며 수업을 받아야 했다.

이어 추가로 온 50명의 학생은 외부 호텔에 묵으며 등하교를 한다는 사실도 접했다. 식사시간이면 급작스레 불어난 학생들이 '밥줄'을 형성해 수십 분씩 기다리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한정된 튜터들이 너무 많은 수업을 담당하면서 기존 학생들의 수업 조정에 차질이 생기고 전체적으로 교육의 질(質)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새로 지은 어학원 내 신축건물
새로 지은 어학원 내 신축건물 ⓒ 이명주

두 얼굴의 미국인 튜터, '영어광풍'의 산물?

본인의 경우 세 튜터가 각각의 개인사정으로 결석을 해 보충과 대체수업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해당 튜터들의 빡빡한 일정으로 여러날 시간 조정에 실패했으며, 해당 과목과 전혀 상관없는 튜터가 수업을 대신해 당혹스러운 경험도 했다. 최대 13시간을 일하는 튜터들은 물론, 거기에 못다한 의무를 다하라 요구해야 하는 학생의 입장도 지치긴 매한가지였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달라 요청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튜터들 처우 문제가 불거졌다. 그리고 조심스레 할머니 튜터의 사례를 언급했다. 모든 걸 수긍하는 듯 보였던 원장이 강한 부정을 한 건 그때였다. 학생들에게 보다 나은 환경을 제공하지 못하는 건 유감이지만 어학원 설립 이래 직원들 월급이 늦어진 적은 단 한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 할머니 튜터가 돈을 빌린 게 나뿐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됐다. 원장과 헤어진 뒤 행여나 싶어 가까운 연수생에 내 경험을 알렸더니 "어!" 하는 반응이 나왔다. 똑같은 수법에 속아 무려 세 차례에 걸쳐 돈을 빌려준(그러나 못받은) 피해자가 다름 아닌 본인의 친구였으며, 필리피노 튜터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한 이야기라고 했다.

2008년 미이민국 발표에 따르면 2006년부터 3년 연속 미국연수 1위 국가가 한국이다. 필리핀 또한 영어권이면서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든다는 강점 때문에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하지만 형식적인 아메리칸 커리큘럼을 비롯해 튜터 선정의 불투명성 등 갖가지 허점을 안고 있다. 본 학원 역시 문제의 할머니를 포함해 미국인 튜터는 단 두 명 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본인이 이 두 얼굴의 할머니 튜터에게 농락 당하던 날, 필리핀에 유학 온 한국 어린이 120여 명이 현지에서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외국인 학업허가증인 SSP를 발급받지 않았단 이유였다. 이미 과다한 영어 열풍이 부른 어학원의 실태를 몸소 경험한 본인으로선 이번 사태가 자업자득이란 생각이 들었다.

 2008년 미이민국 발표에 따르면 2006년 이후 3년 연속 미국 해외연수생 최다 국적이 한국이다.
2008년 미이민국 발표에 따르면 2006년 이후 3년 연속 미국 해외연수생 최다 국적이 한국이다. ⓒ 이명주

덧붙여 학생들을 속여 제 뱃속을 채운 미국인 튜터는 현재 학원 관계자로부터 1차 경고만 받았을 뿐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있다. 그리고 최근 새 튜터와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어학원 내 카페 안팎을 분주하게 누비고 있다!

덧붙이는 글 | twitter ID : sindart77 홀로 꿈을 좇는 여정에 매력적인 벗들의 응원과 멘토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필리핀어학연수#원어민강사#미국인강사#SSP#필리핀억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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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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