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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982년 신기하게도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인 제게 군대 입대(?)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1982년 신기하게도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인 제게 군대 입대(?)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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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명절 보너스로 얼마 받았노?"
사장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말이 생각나 "못 받았다"라고 말했습니다.

1976년, 내 나이 16살 때 이야기입니다. 당시 내 고향 강원도 화천 삼일리라는 마을은 화전민들이 모여 사는 촌락이었습니다. 이곳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상급학교(중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보다 대도시의 공장이나 자장면집으로 취직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당시 내 동창들 10명이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중학교에 진학한 친구는 2명.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내 진로는, 어느 아주머님의 소개를 받아 서울 창동에 있는 자동차부품을 만드는 개인 공업사에 취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장님의 "니 나이 때는 기술을 배우는 게 최고인기라! 열심히 하그레이!"라는 말이 '봉급은 없고 먹여주고 재워 주기만하겠다'란 뜻이란 건 한 달이 지난 뒤에야 알았습니다.

"내가 봉급을 많이 주는 곳을 알아놨는데, 우리 여기서 도망가자."
내 또래의 동료 직원이 말했습니다.
"사장한테 말하고 나가면 되지. 왜 도망을 가는데?"라고 묻자 그 친구는 "나간다고 말하면 사장이 밥값 내라한다, 안 내면 팬다, 지난번에 내가 봐서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튿날 도봉구 창동에서 새벽에 가방을 챙겨 나와 쌍문동을 지나 미아리를 거쳐 동대문 광장시장까지 걸어 나오니까 늦은 저녁시간이었습니다.
"배고픈데 밥 먹을래?"
"니 돈 있나? 난 없다."

그러자 그 친구는 서울에서 3년을 살아온 노하우(?)를 발휘합니다. 어느 5평 남짓한 자장면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곳은 동대문시장(광장시장)에 상가들이 많기 때문에 배달만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는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저희는 봉급 필요 없고요. 밥만 먹여주면 여기서 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지금 당장 배달도 할 수 있습니다" 라는 친구의 말에 사장은 일손이 달렸던지 약도를 그려주면서 가방은 가게에 두고 자장면 3그릇을 배달을 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친구와 저는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배달 장소는 가지 않고 건너편 보령약국 골목에서 자장면을 다 먹어 치웠습니다.

"니 가방에 뭐 들었나? 그거 포기하자"라는 말과 함께 초겨울 어딘지도 모르는 골목에서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그 친구의 먼 친척 형님이 운영한다는 필동 동국대학교 앞에 있는 합지공장을 찾아갔습니다. 10평 정도의 공간에서 공원들이 라면박스 같은 골판지에 회사 라벨이 붙은 종이를 열심히 붙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도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것과 월급이 있다는 것은 내게 최고의 조건이었습니다.

먹여 주는 것이래야, 나이 어린 직원들이 새벽 5시에 일어나 곤로에 불 피우고 큰 양은 솥에 쌀을 안치고, 중부시장까지 걸어가 50원 단위로 비닐봉지에 담긴 김치와 짱아찌 그리고 찌개거리를 사오는 것이었습니다. 재워 주는 것은 공장에 박스를 깔고 군부대 깔깔이 비슷한 이불을 덮고 자는 정도였습니다.

저녁시간만 되면 신사용 가방을 들고 언덕을 내려오는 젊은 사람들... 나중에 그들이 동국대학교를 다니는 대학생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어린나이에 배신이란 걸 배웠습니다

당시 내 봉급은 한 달에 4천원이었습니다. 그해 설날에는 합지 주문이 얼마나 많았던지, 고향을 가지 못했습니다. "대신 이것 마치는 대로 니들 보너스 줄 테니 고향 다녀와라"는 사장의 말에 정말이지 고향을 가겠다는 생각으로 설날에도 밤샘 작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작업이 다 끝날 즈음인 설날 다음날 사장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니는 성실하고 착하니까 보너스로 2천원 더 준다. 대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그레이." 어린 생각에 순간 이 분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맹세를 했습니다.

1개월 봉급과 보너스로 받은 돈 합쳐 6천 원으로 중부시장에서 내 구두와 어머님 스웨터를 사,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사창리행 완행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구두를 샀던 건 어머님께 난 서울에서 호강하며 잘 지낸다는 모습을 보여 드리기 위함이었고, 어머님 스웨터는 지난 추석 때 뵌 어머님이 군복 잠바를 입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도 '사장님의 나에 대한 특별 배려' 생각은 내내 나를 기분 좋게 했습니다.

2일간의 휴가. 어머님의 눈물을 뒤로 하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당시 집에 와서 서울로 돌아갈 때마다 어머님은 우셨습니다. "그러게 잘사는 집에 태어나지. 왜 못난 어미 만나서 중학교도 못 가고..." 그러고는 또 목 놓아 우십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사장님이 나를 얼마나 귀여워 해 주시는데...엊그제 보너스를 2천원이나 주셨어요."

그런데 복귀한 공장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그때 동료 직원이 내게 물어본 말이 "니 명절 보너스 얼마 받았노?"였습니다. '아! 이 친구는 사장님이 보너스를 안주셨구나!'라는 생각에 못 받았다고 했더니, "다 4천 원씩 받았는데 닌 왜 못 받았는데?"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왜 사장님이 내게 2천원을 보너스로 주면서 다른 직원에게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을 말입니다. 아마 촌티를 못 벗은 이놈은 2천원을 줘도 감지덕지 할 거라고 사장님은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바보처럼 새벽 일찍 일어나 밥하고, 반찬 사오고, 청소하고 하는 당번제도(당번이래야 어린 졸병 직원 3명이 돌아가며 했지만)가 싫어서 자처 할 정도로 멍청했으니까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무식인기라!

이런 상황에서 16살 어린 마음에도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가방을 챙겨들고 국도극장 옆에 있는 직업안내소를 찾았습니다. 한번 직업을 소개받는 대가는 4천원.

이 돈은 지난번 설날이 지나 집에 다녀오던 날 어머님께서 주머니에 넣어 주시며 가다가 배고프면 계란 사 먹으라고 주신 돈이었습니다. 신림동에 있는 작은 합지공장. 직업안내소에 합지공장을 부탁 했던 것은 지금까지 해 오던 일이라 수월할 것 같았고, 경력사원(?)이라 봉급이 조금 많은 6천 원을 준다는데 망설일 필요가 없어서였겠지요.

당시 어떤 공장이나 한 달에 셋째 주 일요일 한번 정도 휴일이 주어지고, 야근은 거의 필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친구에게는 사장이 야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쟤는 아마 사장 친척쯤 되나보다'라는 생각으로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이 친구가 야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니 사장님 친척이니?' 라고 묻자 "니 국민학교 나왔나?"라고 묻는 겁니다. "닌 국민학교 6학년이라도 졸업했재. 내 최종학력은 국민학교 4학년이 전부다." 평소 말이 없던 이 친구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내 고향은 부산인데, 어머님이 집을 나가신 기라. 그때 공부가 얼마나 하고 싶었던지 아버님이 엿장수 하면서 주워온 책을 모아 공부해서 국민학교 검정고시, 중학교 검정고시,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했다. 그래서 예비고사를 봤는데 240점 맞았다. 고려대 법대를 가기위해 본고사를 쳤지. 근데 떨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대성학원 원장님이 공짜로 학원에 다니게 해서 서울 올라왔다. 지금 사장님이 대성학원 원장님 친구인기라."

"세상에 가장 무서운게 뭔지 아나?"
"무식이 젤 무섭데이..."

모험을 하기로 했습니다

서른살 같은 21살 시절...방황도 참 많이 했습니다.
 서른살 같은 21살 시절...방황도 참 많이 했습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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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를 통해 검정고시라는 제도를 알았습니다. 청계천 헌책방에 들러 중학교 완전정복과 완정학습이란 교재를 그 친구가 일러준 과목수대로 샀습니다. 이 친구는 야근을 하지 않으니까 공부가 가능했지만, 매일 잔업에 밤 12시까지 이어지는 야근은 공부할 여건이 되니 않을 것 같아, 조간신문 배달을 시작했습니다.

어머님께는 아들이 서울에서 기술을 열심히 배울 것 이라는 기대를 저버리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아 말씀을 드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400부의 신문을 배달하고 오면 아침 7시. 9시부터는 신문 확장이다 수금이다 해서 밖으로 다니다 저녁 7시에 검정고시 학원인 교려학원에 가면 매일 졸기 일쑤였습니다.

그 신문 보급소에는 월급이 없었습니다. 한 달 신문 구독료가 600원. 그것을 수금해 오면 50원이 제게 떨어지게 되니까 학원비 라도 벌려면 신문 확장(비 독자를 독자로 만드는 일)은 필수였습니다.

18살 때 중학교 검정고시에 어렵게 합격 하고는 집으로 향했습니다. "어머님 저 중학교 졸업했어요. 이게 졸업장이에요"라고 어머님께 말씀드리자 어머님은 미안하다며, 정말 미안하다며 하루 종일 우셨습니다.

내친김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수차례에 걸친 실패. 그때 정말 힘들었던 것은 어려운 수학문제가 아니라 밖에 나가 술을 마시고 싶은 유혹, 동시상영에 150원 하는 극동극장(대한극장 건너편)에 가서 영화를 보고 싶은 유혹 등을 이겨야 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스무 살 때 몇 번의 과목합격(검정고시는 60점 이상은 과목합격으로 인정해 줍니다)을 거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을 했습니다.

군 생활은 내게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21살 때 군대를 가기위해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기 전, 간단하게 작성하는 서류의 최종학력 란에'고졸'이라고 썼습니다.

결과는'2급 갑종 현역병 입영대상!' 대학을 가고 싶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친구의 말처럼 최종학력 란에 '국졸'이라고 썼어도 군대에 안 가는 건데 괜한 자존심 때문에 군대를 가게 됐다는 후회를 정말 많이 했습니다.

TV에서 보아온 것처럼 군대에서 남들 장기 둘 때 공부하고, 남들이 축구할 때 공부하자 라는 생각은 입대와 동시에 포기했습니다. 단체 생활이라고는 국민학교 생활 그리고 공장생활이 전부인 내게 군 생활은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85년 2월. 30개월 9일이란 기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했습니다.

젊었기 때문에 부린 객기 그리나 현실

1989년 처음 정선에서 공무원을 시작할때 사진입니다.
 1989년 처음 정선에서 공무원을 시작할때 사진입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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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을 바라보는 어머님은 산에 나가셔서 약초도 캐시고 산나물도 뜯어서 생활비를 버는데, 염치도 없이 나이 살이나 먹은 놈은 집에 처박혀 공부를 한다는 건 내게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었습니다.

군대 동기녀석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기왕 꿈을 크게 갖자. 행정고시 해볼래?"
폼 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연거푸 실패. 끝까지 자식을 믿는 어머님께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자라는 생각에서 4년 만에 방향을 돌려서 9급 공무원 시험을 봤습니다. 내 나이 29살 때입니다.

89년 3월에 9급 공무원시험이 있었습니다. 1월에 방향을 전환을 했지만 정말 어려웠던 과목은 수학이었습니다.

검정고시 수학점수도 60점 턱걸이로 겨우 합격을 했는데, 군대에서 깡통이 되어버린 머리 그리고 당시 행정고시는 수학이란 과목이 없었기 때문에 인수분해도 생각이 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응시지역을 강원도 정선으로 택했습니다. 내 고향인 이곳 화천에서 시험을 봐야 하는데 정선을 택했던 이유는, 온 마을 사람들이 나중에 면사무소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실망할 것 같았기 떄문입니다. 그때 9급 공무원 초임은 거의 면사무소에 배치가 되었습니다.

운 좋게(?)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하고는 내 점수가 궁금해서 강원도청 고시계에서 점수를 확인해 달라고 했더니, 여직원이 야릇한 미소를 보이며 과목별 점수를 적어 줬습니다.

왜 그 여직원이 웃었는지, 수학점수를 보고 알았습니다. 수학이 35점. 당시 공무원시험은 40점미만 점수를 받은 과목이 한과목이라도 있다면 아무리 평균 점수가 높아도 불합격입니다.

그런데 35점 받은 내가 합격을 했습니다. 이유는 현역병 제대자에게 가산점을 5점을 주는 제도 때문이었습니다. 군대 다녀오길 참 잘했다 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이 다음에 유명해 질지 몰라 '아호'를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23년간(군 경력 포함)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보다 훨씬 힘든 군 생활도 했는데 라는 생각은 큰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어느 날, 혹시 이다음에 내가 유명해 질지도 모르니까 아호(雅號)를 만들어야겠다는 참으로 건방진(?)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나울(naul)'입니다. 사전에는 없는 단어지만, '나 그리고 우리(가 함께사는 세상 )' 라는 억지스런 뜻입니다. 누가 압니까! 내가 유명해지면 국어사전 한 모퉁이에'나울'이란 단어가 등재될지...


태그:#신광태, #나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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