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승용차의 피켓들과 호의적인 시선들
내 승용차 뒷문 유리에는 세 장의 피켓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4대강에는 생명을', '한반도에는 평화를', '생명말살 혈세낭비 4대강사업 중단하라' 등등의 말이 새겨진 피켓들이지요. 지난해 11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거행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4대강사업 중단과 4대강예산 전액삭감'을 촉구하는 '생명평화미사'에 참례하였을 때 가져온 것들이랍니다.
집회 때 집회 장소에서만 손에 들었다가 반환을 하고 만다는 게 너무 아쉽고 아깝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새벽 집에 내려온 즉시 나는 여러 장의 피켓들 중에서 세 장을 골라 내 승용차 뒷문 유리에 부착하는 일을 했습니다. 아내가 도와주었지요.
그러니까 내 승용차 뒷문 유리의 그 피켓들은 해를 넘기고도 석 달째 '생동성'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70%에 이르고 있다는 4대강 파괴사업의 공정률을 말하며 체념한 듯 한숨을 쉬기도 하지만, 나는 파괴사업의 공정률 따위와 상관없이, 결코 진정한 완공일 수는 없는 '완공' 이후에도, 또 이명박 정권 이후에도 줄기차게 내 승용차 뒷문 유리를 이용한 그 절규와 함성을 계속 유지할 것입니다.
아파트에 사는 연유로 좀 더 많은 이웃들이 일상적으로 그 절규와 함성을 접하는 셈입니다. 고장에서 하는 일이 있음으로 비교적 자주 공공장소와 행사장에도 차를 가지고 갑니다.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노상 절규와 함성을 줄기차게 발현하며 사는 셈이기도 할 터입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반감 표출을 접한 적은 없습니다. 호의적인 반응을 접한 적은 많습니다. 피켓 여분이 있느냐고 묻는 낯모르는 사람들에게 여분을 나누어 준 적도 있습니다. 밤에 내 차를 가지고 나갔던 공익근무 중인 아들 녀석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달 26일 안면도 방포에서 가진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태안지회'의 신년회에 참석할 때는 은근히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음식점 정문 바로 앞의 내 차를 보고, 그 '절규와 함성'에 의문이나 반감을 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동의 뜻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60여 명이 참석한 태안 고엽제전우회 신년회에서 느낀 것인데,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가 드러내고 있는 과격한 수구성향은 전체 회원들의 결집된 의사 표현도 아닐뿐더러 대다수 회원들의 성향과는 많이 유리되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또 이명박 지지율이 50% 이상이라는 여론조사 결과는 더욱 불가해한 일입니다. 고엽제회원 대다수가 콧방귀를 뀌더군요.)
작은 논쟁들
내 승용차 뒷문 유리에 부착된 피켓들을 이용하여 계속적으로 시국관련 절규와 함성들을 발현시키며 사는 것에는 아직 아무 문제도 없지만, 지난해 11월 29일 이후 거의 매주 월요일 저녁 서울 여의도 '거리미사'에 참례하는 생활을 이어오는 여정 속에서는 지금까지 세 번의 작은 충돌을 경험했습니다.
한 번은 50대의 한 택시기사와 논쟁을 벌인 일입니다. 그는 4대강 파괴사업에 관해 얘기하면서 '정리'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4대강은 너무 문제가 많기 때문에 정리가 필요하다는 설명이었지요.
나는 '정리'라는 말이 너무 오만방자하게 느껴진다는 말을 했고, 정리라는 말 자체부터 어불성설임을 설명했지만, 일정한 거리를 달리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어떤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 택시기사에게는 '정리'라는 말이 시멘트 옹벽처럼 응고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지요.
또 한 번은 국회의사당 앞 거리미사에 참례한 후 서울 합정동의 한 음식점에서 내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때였습니다. 내 손에 들려 있는 피켓들 때문에 쉽게 점화된 논쟁이었지요. 6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음식점 주인은 "자연은 사람이 늘 '가꾸어야' 하는 법"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나는 "4대강 사업이 어떻게 '가꾸는' 것일 수 있느냐"는 말부터 시작해서 '가꾼다'는 말의 의미 범위와 절대로 '가꾸는' 것일 수가 없는 4대강 파괴사업의 실상을 설명했지만, 역시 그에게는 이미 '가꾼다'는 말이 철저히 응고되어 있었습니다. '자연은 사람이 가꾸는 법'이라는 생각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한 번은 태안읍 버스터미널 대합실의 한 매점 주인과 잠시 논쟁을 벌인 일입니다. 나보다 연배인 그는 천주교 사제들의 '시국기도회'를 문제 삼았습니다. "왜 종교인들이 정치에 관여하느냐"는 비난이었지요. "정부에서 깊이 연구해서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하는 일인데, 왜 나라에서 하는 일을 종교인들이 반대하고 훼방을 하느냐"는 논지였습니다.
많은 말이 필요했지만, 그에게 무슨 말인들 온전히 먹혀들 수 있을까요. 나는 많은 말을 하는 대신 그가 제기한 '왜?'라는 의문 부호를 그에게 던져보았습니다.
"왜 종교인들이 관여하느냐? 라고 하셨는데요, 그 '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왜 천주교 사제들과 신자들이 그렇게 추운 밤 길거리에서 미사를 지내면서까지 4대강사업에 반대를 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냥 덮어놓고 비난과 부정만 할 게 아니라, 한 번 그 이유들을 알아보세요. 그러고 나서 옳으네 그르네 말씀하세요. 그래야 옳은 태도가 됩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고 싶다면 내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읽을 것들도 충분히 갖다 드리고…. TV만 보고, '조중동' 신문만 보아서는 아무것도 모르거나 잘못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얼굴을 저었습니다. 그러고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일침을 가했습니다.
"천주교 오야봉인 정진석 추기경도 4대강 사업을 찬성허잖남? 그 양반도 일부 신부들이 4대강사업을 반대허는 이유를 자세히 알어보았을 거 아녀? 천주교 최고 지도자도 찬성허는 일을 일부 신부들과 신자들이 그렇게 반대헌다는 거 우습지 않남?"
나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정진석 추기경님이 참 여러 가지로 일을 많이 하신다는 우스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지와 단순함 속으로 손쉽게 파고드는 매스컴의 괴력을 거기에서도 느끼고 확인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버스 시간이 촉박하여 논쟁(?)을 다음으로 미루고 서둘러 그 매점을 나오며 나는 완전히 패배를 당한 것 같은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이유
천주교 신자가 아닌 그 매점 주인도 그렇게 정진석 추기경을 이용해먹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지와 단순함 속에서 거짓말과 왜곡에 손쉽게 순치되며 사는 사람들, 이념을 앞세우며 기득권 수호에 골몰하는 사람들이(천주교 신자이든 아니든) 정진석 추기경을 '무기'로 삼는 현상을 앞으로도 많이 접하게 될 거라는 슬픈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날은 많이 우울하고 슬프고 외로웠습니다. 또 다시 서울 여의도를 향해 가는 가슴은 더욱 무겁고 암울하였습니다. 시사주간지들을 휴대했지만, 손에서 묵주를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 기본 40단을 훌쩍 넘기고도 버스 안에서도, 9호선 지하철 안에서도, 여의도 국회의사당 역의 에스컬레이터 위에서도 내내 더욱 뜨겁고 절절한 마음으로 묵주를 쥐었습니다.
일단은 무겁고 슬픈 마음으로(그래서 더더욱) 매주 월요일 저녁 여의도 거리미사에 참례하는 것이지만, 미사에 참례할 때마다 희망을 보고 또 확인합니다.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사제들이 수십 명씩 참여하여 미사를 지내는 곳이 대한민국 어디에 또 있을까요? 비록 신자들은 100명 안팎으로 적게 참례하지만, 이보다 더 큰 교회가 어디에 또 있을까요?
언제나 중심은 작은 점(點))이며, 심장은 몸의 작은 일부일 뿐입니다. 나는 여의도 '거리미사'에 갈 적마다 '중심'을 보고 '심장'을 느낍니다. 감히 그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 모두가 뜨거운 기도로 발현하는 '보편 지향'이 언젠가는 분명히 실현되는 날이 올 것임을 믿습니다.
7일 저녁의 미사에서는 원주교구 고한성당 고정배(요셉)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강론의 주제는 '세상을 바꾸려면 예수의 옷깃을 잡아라'였고, 이날의 복음 '마르코 6장 53- 56절'의 말씀과 관련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비록 수도 적고 미약한 힘이지만. 오늘의 복음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옷깃을 붙잡으려는 그 마음을 '월요전국사제시국기도회'에 참례한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깃에 의지해 병자들이 구원받은 것과 같이 우리 사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다함께 더욱 열심히 기도합시다."
여의도 '거리미사'에 참례할 적마다 예수님의 옷깃을 잡으려는 마음이 더욱 확실해지고 뜨거워지는 것은 '왜'일까요. 이 '왜?'라는 의문부호를 나는 사랑합니다. 이것은 오늘 내 어깨에 지워져 있는 십자가이기도 하면서 나를 살게 하는 희망입니다. 나는 오늘의 이 귀중한 십자가와 희망을 결코 놓지 않을 것입니다. 강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원근에서 여의도 거리미사에 참례하는 뜨거운 가슴의 사제, 수도자, 신자 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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