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식재료를 이용해 퓨전 요리를 만들어내는 특별한 청년 셰프(요리사)가 있다. 그의 이름은 토니 유(33·유현수), 그의 삶은 그가 만드는 요리처럼 특별함이 묻어난다. 한때 전도유망한 디자이너였지만 꿈을 위해 직장을 포기했다. 그리고 과감히 도전을 시작, 알토란 같은 성공을 이뤄냈다.
해외를 돌며 요리 기행을 시작한 토니 유는 '셰프들의 성서'로 불리는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아쿠아>(AQUA)에서 2년간 실력을 쌓았다. 이후, 국내에 컴백한 그는 자신만의 색깔 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며 외식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또 '전국을 누비며 찾은 식재료'에 관한 칼럼을 <에쎈> 등에 연재하며 일약 화제의 인물이 됐다.
그는 최근 열풍처럼 불고 있는 '한식 세계화'에 대해서도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달 28일, 청담동 D6 퓨전 한식 레스토랑에서 토니 유 셰프를 만났다.
강원도 출신 디자이너, 한식 셰프를 꿈꾸다토니 유라는 이름, 유명 아쿠아(AQUA) 레스토랑(샌프란시스코 소재)에서 일한 경력. 인터뷰의 첫 시작으로 '어디가 고향이죠?'라고 질문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분명히 미국 샌프란시스코 태생이거나 그게 아니면 한인들이 많이 사는 LA에서 정도겠거니 생각하며,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물었다. 그런데 들려온 답이 "산 좋고 물 좋은 강원도, 원주입니다"였다. 예상 밖 답변에, 물고 있던 커피를 쏟을 뻔했다.
셰프와 산골소년 사이의 이질감은 컸다. 하지만 그 당혹스러움은 곧 느낌표로 변했다. 산골소년이던 토니 유에게 요리는 유년 시절의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할머니의 영향이 컸다. 강원도에서 레스토랑 경영(오너셰프)을 했던 아버지 덕에 자연스럽게 주방을 접했다. 할머니를 통해 음식에 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험했다.
"할머니가 손자(저)를 위해서 만들어주는 음식을 통해 오랜 시간 정성을 쏟은 요리가 맛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할머니들 중에 손맛 안 좋은 분들은 없잖아요(웃음). 이와 함께 셰프이셨던 아버지를 통해 요리가 몸에 배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토니 유는 첫 직업으로 요리를 선택하지 않았다. 요리는 좋아하는 취미라는 생각에 감히 직업으로 할 생각을 못했다. 그는 디자이너였다. 대학에서 디자인 전공(그래픽)을 했다.
미래가 창창했다. 한 대기업에 입사, 근사한 생활을 영위했기 때문이다. 괜찮은 평판, 풍족한 보수, 사회적 선망. 많은 것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단 한 가지가 없었다. 행복하지 않았다. 그 갈증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요리가 하고 싶어졌어요. 물론 좋아하는 걸 취미로 즐기느냐, 이걸 직업으로 삼고 나아가느냐는 별개의 문제였고 어려운 선택이었죠. 하지만 (요리를) 못 놓겠더라고요. 미련을 남기지 말고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도전을 시작했죠."2002년, 3월 그는 다니던 디자인 회사를 과감히 그만뒀다. 운명이라 믿고 요리에 도전했다. 주변에서 제정신이냐고 말렸지만, 자신의 결정을 믿은 토니 유는 요리 공부를 시작했다.
레스토랑을 직접 경영했던 토니 유의 아버지는 처음엔 반대를 했다. 요리사라는 직업이 가진 (당시의) 낮은 사회 평판과 그로 인한 고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국 마음을 돌렸다. "포기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시작을 해라!" 무엇보다 큰 힘이 된 아버지의 응원이었다.
한식, 맛의 비결은 손맛과 정성
토니 유가 선택한 분야는 한식이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한식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한식을 배우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일식이나 양식 같은 경우는 유학을 가지 않고도 서울에서 손쉽게 배울 수 있었지만 한식은 교육기관도 적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2003년 4월부터 2005년 6월까지 한식을 배웠습니다. 여러 한식 교육기관과 한정식집 등을 다니며 이론과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약간, 서로를 배제하는 분위기입니다. 쟤네는 아니야. 우리야!라고들 했죠. 그럼 어디지?라는 고민이 들었고 그래서 여러 곳에서 다 배웠습니다." 한식을 배우는 과정에서 재밌는 일화가 있다. 2005년도에, 떡을 1년 정도 배웠던 토니 유는 우연한 계기로 전국 떡 만들기 경연대회에 나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질겅질겅한 떡과 푸석푸석한 빵의 조화를 이룬, 일명 '떡 케이크'로 금상(농촌진흥청장)을 수상한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떡 케이크를 만들어 상을 탔기에 '떡집을 차려볼까?' 농담 반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머물고 싶지 않았습니다. 2년 동안 한식 공부를 계속했고 주말이면 맛집 탐방을 했습니다. 지역별로 음식의 특징을 알기 위해 전국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죠. 그러던 중 특이한 곳을 알게 됐습니다. 전주의 허름한 한정식집이었는데, 가격(당시 7천 원)에 비해 반찬들이 맛있고 푸짐했습니다. 일을 배워보겠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비결은 손맛, 정성이더라고요."이런 과정을 거치며 토니 유는 '한식은 외국 음식같이, 레시피대로 딱딱 끊어질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후, '정해진 규격, 레시피도 중요하지만, 거기 맞춰서 한국 특유의 정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토니 유 요리의 신념이 된다. 어렸을 적, 할머니가 정성껏 만들어주신 그 음식들처럼 말이다.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아쿠아에서 살아남기
2005년, 토니 유는 또 한 번 도전을 하게 된다. 한식을 익힌 다음, 곧바로 외국 유학을 결심한 것이다. 외국의 발전된 식문화를 몸으로 체험해 보고 싶다는 그의 열망은 곧 실천에 옮겨졌다. 5년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그 여정의 나침반이 있었다. 미슐랭 가이드 북과 미슐랭 가이드 3스타 셰프 토마스 켈러(Thomas Keller)였다.
"미슐랭 가이드북이라고 있습니다. 셰프들 사이에서는 바이블(성서)이라 할 수 있는 잡지죠. 레스토랑 순위를 매기는 세계적 권위지인데 여기서 수여하는 별을 받기 위해 레스토랑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별 3개 만점인데, 만점인 레스토랑은 각 나라에 극소수고 별 2개, 별 1개만 돼도 유명세를 타죠. 그 미슐랭의 3스타 셰프가 미국의 토마스 켈러였습니다."미슐랭 가이드북에 적힌 레스토랑을 찾아 일본, 호주, 미국을 돈 토니 유. 유명 레스토랑에서 잠깐 잠깐씩 일을 배우며 경험을 쌓는다. 그리고 미슐랭 3스타 프렌치 런드리(French Laundrey)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하며 미국 최고의 셰프로 불리는 토마스 켈러를 만나게 된다.
동경하던 요리사를 만났다는 사실은 토니 유에게 뜨거운 감동을 줬다. 당시 '완벽이라는 것은 아무도 얻을 수 없다. 완벽은 갈구하는 무언가일 뿐이다'라는 토마스 켈러의 한 마디는 그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계속 정진하라, 만족하지 말라는 뜻을 지닌 그 말은, 토니 유가 미슐랭 2스타 아쿠아(AQUA)에서 '2년간의 생활'을 멋지게 이겨내는 원동력이 된다.
"미슐랭 2스타 아쿠아 레스토랑 주방에는 셰프의 꿈을 가진 세계 각국의 요리사들이 모입니다. 미국 내의 사람들은 물론 유럽, 중국, 일본 나아가 멕시칸들도 있죠. 경쟁률이 엄청납니다. 일을 시켜달라는 이메일이 하루에도 수백, 수천 통이 올 정도로 경쟁률이 셉니다."
120석 규모의 레스토랑 손님들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30명의 요리사들이 전쟁을 치르는 곳이 바로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아쿠아였다. 실수하는 날에는, 바로 짐을 싸야 하는 요리사의 치열한 서바이벌의 장.
그런 현장에서 토니 유는 실력을 인정받고 자신의 요리를 유감없이 뽐냈다. 밑 준비부터 시작해, 장장 2년 동안 콜드파트, 핫파트, 그리고 메인요리까지 두루 경험을 쌓은 것이다.
"처음엔 위기가 많았습니다. (처음 보는 식재료가 많았기 때문에) 셰프가 요구한 것이 아닌 전혀 엉뚱한 것을 가져올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니 아쿠아의 셰프 론 보이드(Ron Boyd)도 인정을 해주더군요. 2009년 5월, 꿈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메인 파트 요리 스케줄 표에 제 이름이 들어가 있던 것이죠. 그 이름을 본 순간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치열한 경쟁에 숨 돌릴 틈 없이 바빴지만, 토니 유는 틈틈이 한식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의 식재료를 셰프에게 소개하며 요리에 쓰일 수 있기를 갈망했다. 올리브 유 대신, 참기름, 들기름. 한국의 김과 간장을 소개했다. 한국의 식재료를 본 아쿠아 셰프의 눈빛이 달라졌다. 흥미롭다는 반응이었다,
토니 유는 패밀리 밀 시간의 당번이 되어 식사를 준비할 때면, 일부러 한식만을 만들었다. 한국 음식을 알리기 위해서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세프를 비롯해 주방 사람들이 한식을 거의 몰랐습니다. 일식만 아는 모습이 안타까웠죠. 그래서 패밀리 밀 당번 때면 일부러 한식을 했는데…. 불고기, 잡채 등의 요리를 했는데, 반응이 정말 좋았습니다. 특히 잡채를 참 맛있어하더라고요."외국인들을 위한 한식 세계화? 우리 입맛부터 맞춰야 한다
2010년, 토니 유는 2년의 아쿠아 레스토랑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왔다. 5년간의 유학 생활을 끝마친 것이다. 청담동에서 오후 6시부터 새벽 3시까지 한식 레스토랑의 주방을 지휘하고 있는 그는, 아침과 낮 시간을 이용해 전국을 돌며 다양한 한국의 식재료를 찾고 있다. 좋은 요리의 뿌리는 좋은 식재료라고 믿기 때문이다.
동충하초, 우설, 도래창, 장치 등 잘 알지 못하는 식재료로 고급 퓨전 한식을 만드는 토니 유의 모습은 이채롭게 보인다. 그는 서양에 허브가 있다면 한국엔 수십 종류가 넘는 산나물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 산나물의 고유한 맛을 이용해 아이스크림, 버터 등을 만드는 놀라운 솜씨는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우리 식재료를 통해 한식을 세계에 알리는 토니유 셰프, 그는 정부 주도의 '한식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진심 어린 조언을 보낸다.
"한식은 비주얼도 중요하지만, 음식이 가지고 있는 뿌리, 어떤 마음으로 요리를 풀어내느냐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추진하는 '한식 세계화'는 그냥 예쁘게, 또 모양만 신경을 쓴 것, 외국인을 위한 한식 같습니다. 외국인들한테 맞추는 요리는 쉽습니다. 하지만 한식이라는 건 우리나라 음식이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음식이어야 합니다."그는 말을 이었다.
"기본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한식 세계화'는 막대한 예산을 들인 거대한 음식점으로 해결할 게 아닙니다. 다양한 한식집들이 생겨 창의성 있는 메뉴가 나오면 그게 곧 한식 세계화가 되는 방법일 것입니다. 단지 김치, 비빔밥으로 풀기보다는요."마지막으로 토니 유 세프는 세프를 꿈꾸는 젊은 세대에게 짧고 굵은 한마디를 전했다.
"안전빵을 믿지 말고 다양하게 도전하세요. 새로운 식재료를 보고 겁먹지 마세요. 도전정신을 갖고 새로운 메뉴를 만드세요!"안전빵을 거부하고 도전했던 토니 유 셰프, 그가 자신 있게 전한 한마디가 필자의 가슴에 와 닿았다. 그렇다. 우리가 가진 젊음은 안전빵으로만 가기엔 너무 역동적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