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저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소개, 아니 자랑하고자 합니다. 누구나 자녀를 사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자녀사랑은 그 감도가 남다르답니다! 이같은 까닭은 제가 받지 못 한 모정(母情)에서의 갈증이 첫 번째 요인으로 작용했지요. 저는 생후 첫돌을 즈음하여 그만 생모를 여의었습니다.
그 바람에 참 외롭고 슬프며 때론 괴롭도록 시린 풍상의 나날과 만나야만 했지요. 여하튼 무심한 세월은 뚜벅뚜벅 흘러 제 나이 20대 초반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곤 결혼하였지만 당시에도 빈곤하였기에 반 지하의 월세 방을 얻어 사는 수 외는 딱히 방법이 없었답니다. 방안에는 요강과 비키니 옷장 하나, 그리고 같이 붙어있는 조막만한 부엌엔 밥을 짓는 솥과 국을 끓이는 냄비 두어 개, 그리고 숟가락 두 벌이 세간의 모두였지요.
그렇게 허름한 '집구석'이었으되 우린 행복했습니다! 왜냐면 우리 부부는 정녕, 그리고 진정 그녀와 그대만을 사랑했으니까 말이죠. 저는 모정의 결여라는 박복함 외에도 겨우 초등학교 졸업만의, 속칭 '가방끈'까지 짧은 또 다른 불행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서 현재도 비정규직의 매우 헐한 박봉으로 매우 어렵게 살고 있지요. 그렇지만 제 사랑하는 아이들에게까지 저의 불학(不學)이란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하여 저는 이를 악물고 노력했는데 우선 아이들을 기르면서 매 한 번을 안 댔지요! 대신에 사랑과 칭찬을 양수겸장(兩手兼將)의 아낌없는 비료로 뿌렸습니다. 아울러 돈이 들어가는 사교육 대신에 주말과 휴일이면 함께 도서관을 다니며 많은 책을 읽게 했지요. 더불어 사무실로 배달되는 여러 종의 신문(하루 지나면 버리는)을 낱낱이 살펴 아이들에게 교육적 자료가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수집하여 전달하였습니다. 그런 덕분이었을까요.
자식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개의치 않고 자랑하렵니다. 초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공부에 단연 두각을 나타낸 아들과 둘째인 딸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그렇게 상(장)을 얼추 '트럭에 실어다' 날랐지요. 세월을 더 흘러 작년 이맘때 아들에 이어 딸도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기업에 취업한 아들과 달리 공부에 미련이 더 남은 딸은 오는 3월부터는 서울대 대학원생이 됩니다.
동(同) 대학을 작년에 과 수석으로 졸업한 자타공인의 재원(才媛)이죠. 똑똑한 아이들에 걸맞는 아빠가 되려면 그에 맞는 자격을 갖춰야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여 저는 나이 오십이 된 3년 전에 사이버대학에 입학하여 '열공'하였고 또한 작년 말엔 마침내 3년 과정의 공부를 모두 잘 마치고 졸업을 하기에까지 이르렀지요. 어제는 인척 형님의 딸이 결혼을 했습니다. 꽃처럼 아름다운 2월의 신부는 마침 제 아들의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해서 저의 흐뭇함은 더했지요.
예식장에서의 음주도 부족하여 오후엔 형님의 호출을 받아 형님 댁에까지 갔습니다. 거기서 술잔을 나누는데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윽고 신랑과 신부가 왔더군요. 신부는 마치 제 딸과도 같다는 감흥에서 저는 덕담을 아낄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런 소린 하는 게 아니다만 아무튼 세상이 자꾸만 변하여 요즘엔 이혼도 흉이 아닌 세상이라더구나. 그렇지만 내가 고루한 사고를 지닌 중늙은이여서인지는 몰라도 무조건 백년해로(百年偕老)로써 잘 사는 것만이 진정한 효도란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표하는 신혼부부를 보자니 문득 나이가 스물아홉이나 되었음에도 여태껏 애인이 없는 아들이 그리움의 보름달로 두둥실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전화를 했으나 토요일인 어제도 근무 중이었다는 아들은 전화를 받지 못 하였지요. 대신에 술에 흠뻑 취해 귀가하여 늦은 전화를 받았지만 말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이실직고하건대 한 때, 아니 참 오랫동안 너무도 일찍 저의 곁을 떠난 생모와 선친까지를 싸잡아 원망한 적이 있습니다.
남들은 다 받고 자란 겨울철의 난로와도 같은 뜨겁고 훈훈한 모정의 사랑은 차치하고라도 학교 다닐 적에는 어쨌든 반에서 줄곧 1-2등을 질주했던 저를 고작 초등학교 졸업만으로 방치한 아버지 또한 오늘날까지도 저를 어렵게 살게 한 단초라고 믿은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이같이 삐뚤어진 사고와 편견, 그리고 사시(斜視)까지를 바뀌게 한 것이 바로 아이들의 잇따른 어떤 승전보(勝戰譜)였던 것입니다.
즉 사교육이란 지원사격 없이도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마치 엿 붙듯이 척척 들어간 고마움 외에도 장학금의 수령과 장학생으로의 질주는 풍랑을 탓하지 않는 참한 어부라는 느낌과 아울러 저를 영락없는 팔불출로 만들기에도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말이죠. 어슴새벽에 출근을 서두르면서 반찬이라곤 고작 신김치 달랑 하나 뿐의 도시락을 수 년 동안이나 싸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에 더하여 하루 경비라곤 겨우 4천 원으로만 살았지요.
믿기지 않겠지만 이같은 '증언'은 사실입니다! 버스카드 기준으로 왕복차비 1,900원(950원× 2)에 즐기는 담배(디스 플러스=2.100원= 하루 한 갑 태웁니다)의 셈이 바로 4천 원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자린고비로써 노력하였기에 그나마 두 아이를 모두 대학까지 가르칠 수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얼마 전 친구의 초대를 받아 그의 대궐 같은 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순간 금세 압도당하면서 여전히 내 집 한 칸조차도 없는 저의 초라함이 비교되면서 자못 울적해지기까지 하더군요!
그러나 술잔을 나누자니 친구는 도리어 제가 부럽다고 했습니다.
"나는 친구들 중에서 네가 젤 부럽다! 아이들을 그렇게 똑똑하게 잘 키운 건 물론이며 너 또한 비록 늦긴 했지만 작년에 사이버 대학을 마친 건 그야말로 인간승리의 표본이라고 봐. 어디 그뿐이랴? 재작년에 출전한 퀴즈 프로그램(2009년 1월에 '우리말 겨루기' 본선에 나간 적이 있음)은 너 아니면 뉘라서 가능했겠니? 그리고 작년엔 또 수필가로도 등단한 건 너만의 어떤 차별화된 업적이었다고 봐."
친구의 그같은 공치사 남발은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간에 여하튼 기분 좋은 칭찬으로 들리더군요. 가치불변의 제 재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사랑하는 아들과 딸입니다. 애인이 있는 딸과는 달리 지금도 싱글인 아들이 올해는 꼭 애인을 사귀었음 합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랬다고 참한 규수라면 금상첨화겠지요.
그래서 어제 본 형님의 딸 결혼식처럼 혼례를 마치고 인사를 오면 저는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해 주렵니다.
"아가, 너는 이제부터 내게 있어 며느리가 아니라 다시 얻은 딸이다. 그것도 아주 소중한! 그러니 시아버지라고 어려워 말고 친아빠처럼 그렇게 우리 잘 지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