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타 뮐러의 장편소설 <숨그네>를 읽은 적이 있다. 열일곱 살의 소년이 러시아행 명단에 올라 있어 집을 떠나는데 그가 당도한 곳은 강제수용소. 그 소년은 5년 동안 수용소생활을 한다. 공포와 굶주림, 목숨이 숨그네처럼 흔들리는 한계상황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의 말 한마디였다고 그는 말한다.
수용소로 떠나던 날, 할머니는 그에게 "너는 돌아올 거야"라고 말했다. 뼈와 가죽만 남은 처참한 숨그네의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은 어려운 순간마다 끊임없이 들렸던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할머니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돌아올 거야'하고 할머니가 말했으므로 나는 행복해야만 한다. 그 말 역시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다. 모두 돌아가고 싶어 하니까. 행복을 얻으려면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 목표가 한낱 울타리 말뚝에 쌓인 눈일지라도."(p274)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역시 긴장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의 시간들 속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아 살아난 프랭클의 실제 경험이 생생하게 실려 있다.
빅터 프랭클이 숨을 거둔 후, <뉴욕타임즈>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해 표현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야만적이었던 20세기의 수난을 가장 극한 상황에서 체험했지만 20세기 인류에 가장 희망적이 메시지를 던진 사람"이라고.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출판사)는 어떤 극적이고 극한 상황에 있다할지라도 마지막 남은 선택인 태도인 인간의 존엄성까지 박탈할 수 없다는 것을 다루었다. '왜 살아야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것, 삶의 의미를 부여해야 하고 시련을 견디어 낼 때, 그 경험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며 그것은 그 누구도 앗아 갈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란 것도 말한다. 아울러 인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것 없다는 것을, 그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 우리들을 일깨운다.
책에는 제1부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과 제2부 <로고테라피의 기본개념>과 함께 1984년 개정판에는 제3부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 첨가되었다. 1부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에서는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을 이야기하며 제2부, 로고테라피의 기본개념에서는 저자가 개발(?)한 로고테라피 개념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한다. 또 마지막 3부에서는 비극 속에서의 낙관으로, 어떻게 하면 삶에 대해 예스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일깨우는 책이다. 프랭클의 말대로, "이 책은 어떤 객관적이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다. 개인적인 체험, 즉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시시때때로 겪었던 개인적인 체험에 관한 기록이다. 생존자 중 한 명이 들려주는 강제수용소 안에서의 이야기이다."(p125)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어느 날, 유대인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1500명의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며칠 동안 기차를 타고 낯선 곳으로 이동한다. 기차가 선 곳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오른쪽 왼쪽 이 두개의 길이 삶과 죽음으로 갈랐고 삶과 죽음을 가르는 첫 번째 판결을 통과하면서 첫 판결에서 왼쪽으로 선택된 사람들은 곧 목욕탕이라 쓰여진 화장터로 간다. 그 시간부터 그는 수감번호 119번, 104번으로 불려지고 맨몸뚱이 하나의 실존만 남는다. 프랭클은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도 전에 첫 번째 환상이 무너지고 충격을 받는데, 과학서적 원고뭉치를 빼앗긴다.
지금까지의 인생전부를 박탈당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벌거벗은 몸뚱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그는 두 번째 정서적 감정인 냉담한 궁금증에 이어 점차적으로 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겪는 정서적 변화를 경험한다.
섬뜩한 농담과 혐오감, 무감각, 모멸감 등. 강제수용소에서 짧지 않은 시간에 경험한 그 모든 것을 그는 말한다. 그 가운데서 그는 인간이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또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 정서가 메마르고 철저하게 다른 일에 무감각해지다는 것 등의 정서적 변화들을 이야기한다. 살아남은 자의 증언이기에 더 생생하다.
나의 시련과 경험...그 누구도 가질 수 없다
프랭클은 수용소의 생활, 그것은 매순간 삶과 죽음의 선별 앞에 서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매 순간 결정해야 했다고 말한다. 그 결정이란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겠다고 위협하는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지, 말 것인지였다고.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는 결코 빼앗을 수 없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긍정하는 그를 본다.
그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길 수 없다고 말한다. "왜(why) 살아야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고. 그는 절망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무의미해 보이는 '숨그네' 순간들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으며 긍정했던 사람이었고 고통을 승화시킨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하나하나는 깊은 감동과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보통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경험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한다(146p)고. 그의 말대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 자신 만의 소중한 경험들을 만난다. 그것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다. 이 책 또한 아우슈비츠에서 경험한 프랭클 자신의 생생한 경험이다. 그것으로 수많은 독자들의 삶에 희망과 용기를, 긍정을,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은가. 프랭클 자신이 경험한 체험적 이야기이기에 그것은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경험뿐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간직해왔다는 것도 하나의 존재방식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가장 확실한 존재방식인지도 모른다."(146p)
하나님 한 분 외엔 그 무엇도 두려워할 것 없다
수용소에서의 매 순간순간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시간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매순간마다 자신의 태도를 결정해야만 했다. 오직 강제수용소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야만 했던 사람들... 그러나 프랭클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결정이란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 알고 경악한다. 삶의 길이라고 나갔던 사람들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는가하면 죽기를 각오한 결행이 오히려 삶의 길이었음을 그는 체험한다. 엇갈린 운명을 나는 읽으면서 인간이란 한치 앞을 모르는 존재라는 것, 하나님이 생명을 지켜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
한 예로 수용소에서 병든 사람을 요양소로 호송하게 되었을 때, 프랭클은 의사가 필요해서 그의 번호가 리스트에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그 목적지가 요양소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들 가스실로 가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프랭클에게 평소 호감을 갖고 있던 주치의가 프랭클을 명단에서 빼내주겠다고 했을 때 프랭클은 거절한다. '이것이 내 길이 아니라고, 나는 운명이 정해놓은 길로 가야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속임수가 아니었다. 가스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요양소로 간 것이다. 몇 달 뒤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그전의 수용소에 있었던 한 친구를 만났을 때 그는 끔찍한 이야기를 듣는다. 프랭클이 떠난 그 수용소에서는 굶주린 나머지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발생했던 것을 알게 된다.
엇갈린 운명들... 정세가 뒤바뀌었고 기대 속에서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날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날 밤 나치대원들이 트럭을 타고 와서 수용소를 비우라고 명령했고 마지막 남아 있던 수감자들을 중앙수용소로 보내진 다음 그곳에서 48시간 안에 스위스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프랭클과 그의 친구는 주치의의 실수로 명단에서 빠져있었다. 여러 주가 지난 뒤에야 운명의 신이 그들을 우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날 밤, 자유를 향해 간다고 믿고 트럭 위에 올라탔던 사람들은 수용소로 이동되었고 그곳 막사 안에 갇혀 불에 타서 죽었다. 인간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생과 사를 가르는 것,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수용소에서 자유의 몸으로 풀려난 후 어느 날 그는 꽃들이 만발한 들판을 지나 시골길을 걷던 중, 멈추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무릎을 꿇는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제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자유로운 공간에서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절망 앞에서도 끝내 희망을 선택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p182)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라는 프랭클의 말이 가슴에 꽂힌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각축장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용할 양식과 목숨, 그 자체만을 위한 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였던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에서 말한 것처럼 목숨이 숨그네처럼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도 내 삶이 궁극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가 하는 의문 앞에서도 시련의 의미를, 삶의 의미를 찾아야함을 가르쳐준 프랭클...
그는 인간은 조건 지워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211p)라는 것을 또한 일깨워 주었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다시 사는 것처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다시 내 자신을 향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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