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변호사, 검사, 판사, 요리사, 축구선수, 교사, 스튜어디스, 모델, 연예인, 아빠, 엄마...
요즘 아이들 꿈은 예전 아이들에 비해 참 다양해졌다. 딸 졸업식장에 가보니 아이들 장래희망을 사진, 간단한 신상명세와 함께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80년대, 그것도 농촌 아이들 장래 희망은 아무리 꼽아 봐도 열 손가락을 넘지 못했다.
영상으로 꿈을 소개하는 순서가 끝나자 봉인식을 했다. 아이들 장래 희망이 들어있는 단지 모양 함을 봉인하는 행사였다. 이 함을 30년 후에 개봉한다고 교장선생님이 힘주어 말했다.
30년 이라는 말이 귓전에 꽂혔다. 왜 30년 일까. 30년이면 꿈을 이루기에 충분한 시간일까! 아니면 30년이 지나도 꿈을 이루지 못했으면 실패했다고 단정지어도 괜찮아서일까. 30년 이란 말이 귓전에 박힌 이유는 이런 잡다한 궁금증보다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올해 꼭 30년 째기 때문이다.
30년 전 꾸었던 꿈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지만 아득하기만 하다. 어른이 되면 무엇인가 근사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만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은 보는 만큼, 경험만 만큼의 정보를 갖게 되는 것인데, 당시 농촌 마을 어른들 직업은 농사 밖에 없었다. 당연히 알고 있는 직업도 농사를 제외하면 몇 개 되지 않았고 그 몇 개마저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어린 시절 누군가 장래 희망을 물어오면 참으로 난감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어른이 되면 농사를 짓겠다고 말 할 수도 없었다. 그 소리가 나오는 순간 어른들 입에서는 "예끼 이놈아 고작 꿈이 농사꾼이냐" 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사는 농촌 마을에서 농사꾼을 가장 천한 직업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부모님은 입버릇처럼 "공부 열심히 해서 농사일은 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농사일 말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살라고는 가르치지 않았다. 아니 가르치지 못했을 것이다. 농사꾼 아들(딸)로 태어나 평생 농사만 지으시던 분들이 농사일 말고 다른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요즘 아이들이 참 부럽다. 최소한 수 십 년 전 나보다는 덜 난감하고 덜 답답해 보이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은 이 세상에 수도 없이 많은 직업이 있다는 사실도,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가지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사실도 대강은 알고 있을 법 하다.
아이들 장래 희망을 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게 있다는 점도 발견했다. 장래희망이 곧 '장래직업' 이라는 점이다. 간혹 아빠, 엄마가 장래 희망이라고 적어 놓은 아이도 있지만 대부분은 '직업' 을 적어 놓았을 뿐이다.
직업은 실존보다는 생존의 문제다.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는 '생존'의 문제고 어떻게 살 것인가는 '실존' 의 문제인데 직업 선택의 문제는 역시 '생존' 문제와 가깝다. 아이들이 선택하고 싶은 직업은 하나같이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거나 화려해 보이는 직업이었다. 아이들도 의식하지는 않지만 역시 생존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부모님이 내게 주신 가르침은 아주 단순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제발 뼈마디 쑤시는 농사 일만은 하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고 어떤 마음으로 그 직업을 대해야 하는가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했지 어떻게 살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는 질문만 나오면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은 예전과는 좀 다른가 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게 분명하다. '꿈 단지'가 그 증거다. 딸내미 졸업식에서 본 '꿈 단지' 는 참으로 신선했다. 졸업식에 이런 행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박수 받을 만하다. 30년 후, 중년이 된 동창생들이 모여 정말로 꿈 단지 봉인을 푼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한 가지 욕심을 낸다면 장래 희망하는 직업만 적지 말고 어떻게 살 것인가도 함께 적어서 넣었으면 하는 것이다. 교사가 되는 게 꿈이라면 '페스탈로치' 같은 교사, 의사가 되는 게 꿈이라면 히포크라테스 같은 의사라고 적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생존과 실존을 함께 고민하는 게 되는 것이다.
직업은 중요하다.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그렇다면 좋은 직업은 무엇일까? 연봉 많이 받을 수 있는 직업일까 아니면 자기 가치관과 소질에 맞는 직업일까. 둘 다 갖추고 있으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그렇게 뜻대로만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만약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난 과감하게 연봉 쪽을 포기하라고 충고 하고 싶다.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30년 된 선배가 올해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후배들에게 보내는 축하 메시지다.